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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YOU Feb 06. 2017

어른이 된다는 것 -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어른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넘어졌는데도 울지 않았을 때, 비누칠을 하고도 눈을 뜰 수 있었을 때, 혼자 병원에 갔을 때, 취직을 했을 때, 독립을 했을 때. 나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캉디드라는 순진한 청년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배경인 18세기 유럽은 전제정치와 종교적 맹신이 지배하고 있었다. 지배계급은 가톨릭 성직자들이었고 지배 논리는 신께서 모든 것을 최선의 것으로 노정해 두었다는 것을 골자로 한 낙관주의였다. 캉디드 역시 스승 팡글로스로부터 지금 이 순간이 ‘모든 가능한 세상 중 가장 좋은 세상’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며 낙관주의를 맹신하게 된다. 그러다 살던 성에서 쫓겨난 이후 전혀 낙관적이지 않은 현실의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볼테르의 의도 때문이겠지만 캉디드가 겪는 고통과 시련의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한다. 간신히 살아남을 때마다 캉디드는 이것이 정말 가장 좋은 세상인가 의심한다. 그때마다 스승 팡글로스는 왜 지금이 가장 좋은 세상인지 끝끝내 설명한다. ‘그래도 지금 빵을 먹고 있잖아? 네가 그곳에서 1천대의 매를 맞는 벌을 받지 않았다면 도망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도망을 나오지 않았다면 노파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노파를 만나지 못했다면 빵을 먹을 수 없었을 거잖아. 그런데 너는 지금 허기를 가셔줄 빵을 먹고 있잖아. 그러니까 가장 좋은 세상에 있는 것이지. 이 모든 시련은 신께서 네게 가장 좋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미리 정하신 거야.’ 


소설은 이러한 설정을 반복한다. 캉디드와 팡글로스에게는 지긋지긋한 시련이 이어지고, 캉디드가 낙관주의를 의심할 때마다 팡글로스는 지금이 가장 좋은 세상이라는 점을 지겹도록 주장한다. 캉디드는 반박하지 않지만 어느 날 “낙관주의가 대체 뭐냐?”라고 묻는 친구에게 “그건 나쁜데도 불구하고 좋다고 무조건 우기는 거야.”라고 답하며 스승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기나긴 시련 끝에 이제 캉디드에게 남은 것은 작은 집과 추녀가 된 첫사랑, 팡글로스를 비롯한 딸린 식구 몇과 농사를 지을 밭 몇 뙈기이다. 그 순간에도 팡글로스는 지금이 왜 ‘가장 좋은 세상’인지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다 듣고 난 캉디드가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라고 답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캉디드와 팡글로스는 똑같은 고통과 시련을 겪지만 서로 다른 성장사를 써 나간다. 그리고 시련의 끝에서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만난다.


어린 시절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던 소소한 사건들은 이제 아득하다. 지금의 나는, 삶이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영원한 시험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지 못했던 시련을 감내하고 폭풍 같은 불안을 달래고 또 달래며, 좀 더 성장한 어른이 될 것인지 결핍과 상처 혹은, 끝없는 낙관에 갇힌 어린애로 남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과정이 삶이고 인생인 것 같다는 생각 말이다. 


내가 항상 좀 더 나은 어른이 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낙관, 때로는 회피, 그리고 때로는 상처의 서사를 만들어 안주하기도 했었다. 아마, 앞으로도 또 그럴지 모른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늘 아쉬웠다.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자면 어떻게든 꼼지락거려야만 했다.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한다는 캉디드의 말처럼 말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책 이야기를 좀더 하자면,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지배계급으로 추앙받던 성직자들의 부패와 비리를 거침없이 그려내고, 시대의 지배논리였던 낙관주의를 조롱한다. 볼테르는 모든 것은 신의 섭리라는 낙관은 거대 악을 수용해 버리는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 전 리스본에는 대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까지 덮쳐 육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도시도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볼테르는 고통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도 신의 섭리와 낙관을 이야기하며 방관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가 탄생했다고 한다. 볼테르는 이 소설을 통해 고통과 악에 맞서 소박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에서 일부 인용)


책은 200페이지가 채 안 될 정도의 얇은 분량이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무거운 메시지에 비해 책장도 잘 넘어간다. 심지어 순간순간 웃음이 터진다. 대체로 실소이기는 한데, 궤변을 매우 격식 있고 진지하게 늘어놓는 상황에서 툭하고 웃음이 터진다. 18세기에 쓰인 소설을 21세기에 읽으며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니, 너무나 환상적이다. 다만, 번역이 아쉽다. 한 권을 사서 읽고 번역이 아쉬워 다른 출판사의 것을 샀는데도 마찬가지였다(국내 번역서는 두 권뿐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밭을 갈기 위해 강력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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