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창 역주행 중인 윤하님의 6집 앨범 [END THEORY]의 노래 '사건의 지평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몇 개월 전 우연히 운전 중에 듣고 제목이 너무나 이과 친구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기에, 그리고 윤하님의 곡이었기에 몇 번 더 반복해서 들었었다. 그리고 잠시 잊고 지내다가 요즘 여기저기서 많이 들려와서 출퇴근을 하며 반복 재생하며 곱씹으며 듣고 있다.
나는 보통 노래를 들으면 가사보다는 주로 멜로디와 가수의 가창력에서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반복 재생하며 듣다 보니 가사에 자연스레 집중하며 듣게 되었다. 하나둘씩 들려오는 친숙한 용어와, 참신한 표현들, 따뜻한 한글 단어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건의 지평선', 영어로는 event horizon, 그리고 혹은 '사상의 지평선'이라고도 불리는 용어는 블랙홀을 예를 들었을 때, 블랙홀의 영향이 닿는 바깥 지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는 블랙홀의 영향이 닿지 않는 곳이다. 위키에서는,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그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경계면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과학적인 용어로써 사건의 지평선은 위의 설명과 같겠지만, 조금 더 은유적인 표현에서 의미를 확장시켜보면 '사건'이라는 것을 사람 사이의 관계로도 생각해볼 수 있고, 고3 수험생활이나, 고시, 취직 준비 등과 같이 특정한 기간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라는표현은 마치 현재의 익숙한 상황과 환경을 넘어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이들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노래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은 연인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 모퉁이'라는 표현이 둘 사이의 관계 어딘가의 '경계'를 가리키는 것 같고, 이어지는 가사에서 '하나 둘 추억이 떠오르면 많이 많이 그리워할거야'라는 표현은 이별이 연상되지만 꼭 이별만을 말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든다. 이별이 아닌 어떤... 새로운 관계의 시작으로서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이야기하는 건 아닐까?
또, 이 노래를 곱씹다 보면 표현들이 참 보드랍고 따뜻하다. 한글 표현이 풍부해서일까, 낯선 단어들이 종종 등장함에도 낯설기보다는 오랜만에 보는 친척과 같이 어색함 속 반가움이 있다.
특히 가사 중에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 빛'에서 아스라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예쁘고 듣기에도 좋다. 발음도 맛있는 솜사탕을 혀에 굴려먹는 느낌으로 착 감기는 듯이 흘러 나가는 것 같다.
국어사전에서 아스라이는 몇 가지 뜻이 있다.
1) 까마득하게 멀거나 아슬아슬하도록 높게,
2) 기억이 아주 오래되어 어렴풋이,
3) 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거나 하여 분명하지 않고 희미하게.
가사에서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 빛'은 시각적인 관념이므로 아마도 1번의 '까마득하게 먼' 뜻이 사전상으로는 적합할 것 같다. 하지만 앞 내용에서 '문을 열면 들리던 목소리'에서 '들리던'은 과거의 기억을 나타내므로 2번의 뜻이라고 보아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또한 공감각적인 심상으로 빛이 사라져 가는 것을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것처럼, 그리고 사물이 물리적으로 멀어짐으로써 아득해지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3번의 뜻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참 예쁜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다시 가사 내용에 집중해보면, 후렴 B부분을 통해 연인 사이의 이별의 이미지가 특히 많이 부각되는 것 같다. '사건의 지평선'을 가리키는 '여기'는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 모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분명 '여기'를 경계로 서로가 물리적으로 멀어질 것 같은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데 끝이 아닌 새로운 길이라니... 또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는 건 마치 오래된 연인이 권태로운 관계 속에 관성처럼 이어져가던 그것을 직시하고 돌이켜보자는 점에서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둘의 관계에서 남긴 추억 때문에 그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을 뒤로하고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가자는 이야기를 마저 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 '솔직히 두렵기도 하지만, 노력은 우리에게 정답이 아니라서'라는 표현은 단조로웠던 현재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서길 더욱 바라는 것 같다. '마지막 선물은 산뜻한 안녕'이라는 표현에서 노래하는 화자가 선물로 이별(안녕)을 준다고 말하고 있으니, 둘의 마음 중 화자가 미지의 세계인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청자보다 더 동경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50:50 합의하에 이뤄진 이별은 아니랄까? 사실 이별에서 50:50과 같이 딱 떨어지는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더 사랑했던 쪽에서 아쉬움과 미련이 더 크지 않을까?
사실 노래 첫 두 마디의 가사부터 나는 매료되었었다. '생각이 많은 건 말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라는 말속에 요즘 나의 고민에 대한 실마리가 담겨있었다. 어느새 서른과 마흔 사이에 시간을 살고 있는 삶 속에서 남편으로 아빠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와중에 세상 속에서 의미 있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계속 고민 중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매일 묻고 답하는 것이 반복되는 속에서 종종 떠오르는 사명이라 생각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이 떠오른다는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에 그렇게 자주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어릴 적에는 잘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이키의 광고 문구, Just do it. 이 말을 듣는 것과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에는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가는 것만큼의 결단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부스럭부스럭 조금씩 움직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