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터 위에 다시 세우는 교회 02 |
교회가 누군가의 비윤리, 부도덕한 일이 드러나면서 갈등과 분쟁으로 치닫게 된 후 이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하지만 교회는 생각지 못한 새로운 문제로 당황한다.
목사의 은퇴시기가 오거나 리더십 전환의 때에도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수면 아래 감추어졌던 감정과 의심, 불만들이 터져 나온다. 새로워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한다.
두 가지 사례 모두 격랑의 시기가 끝난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길을 잃는다. 얽혀서 풀리지 않으니 초조한 시간을 보낸다. 새로운 항해를 출발할 줄로 생각했으나, 항구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암초에 걸려 좌초한다.
여러 원인으로 갈등이 폭발하거나, 교회 리더십이나 성도 간 비윤리적 문제가 드러나게 되면 교회는 휘청이게 된다. 누구에게나 납득되는 정상적인 처리가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결과가 좋은 때가 많지 않고 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다.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오해로 나뉘고, 피해자와 가해자 편이 구분된다. 찾아내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의 승부가 이어진다. 상대에 대한 날 선 비난과 책임을 따져 묻는 자들과 회피하고 숨기려고 노력하는 자들로 뜯어진다. 평화로워야 할 예배와 교제는 할퀴고 물어뜯으며, 변명하고 저주하는 자리로 바뀐다. 평화롭게 끝나기를 바라지만 기대를 벗어난 방식이 계속 이어진다.
교회 갈등과 문제의 끝자락은 문제를 일으킨 목사의 면직이나 해임이 되어 떠나거나 문제를 제기한 성도들의 새로운 시작으로 끝맺음된다. 정확히 이야기해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끝과 시작의 경계에서 남는 것을 선택한 성도든 떠나기를 선택한 성도든 교회는 갈라짐으로 마무리된다.
목회자의 면직이나 해임으로 떠나 남겨진 성도나 문제를 제기하다 교회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워가려 하거나 두 가지 상황에서 보이는 유사점이 있다.
먼저는 목사가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애초에 목사가 없는 교회를 상상하지 못했던 성도에게는 큰 불안의 요소다.
두 번째는 목사의 권한을 대리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권력과 권위의 진공상태를 견지 못하는 성도는 ‘선택’과 ‘결정’을 대신해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그를 무한 신뢰한다. 권력과 권위의 진공상태라는 의미는 자의든 타의든 누군가 권력과 권위의 자리로 빨려 들어간다는 의미다. 그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주변의 필요에 의해서 세워지는 경향을 자주 보인다. 교회를 위해 나서보겠다고 한 것이 막대한 권한과 권위의 자리로 이끌린다.
세 번째는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에 대한 전문가가 부재하거나 소수라는 점이다.
교회는 다양한 부서와 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운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곳이 많다. 이들의 역할을 이해하고 서로를 조율해 줄 사람이 부재하거나 소수라는 점이다. 방향 설정과 조율의 역할을 대부분 목사가 맡고 있었으니 그의 부재가 낳은 어려움이다. 애초에 교회 운영에 대하여 더 관심 있었어야 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새롭고 건강한 교회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롭고 건강한 교회가 무엇이냐는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과거와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기대와 심리적 압박이 함께 있다. 변화가 가진 어려움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면서 무조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심히 무엇이 달라져야 하고 무엇을 이어가야 할지를 살피기보다는 달라져야 한다는 주장만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교회개혁과 변화를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함께 버린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변화에 대한 압박 때문에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까지 바꿔 버림으로써 교회가 어려움에 다시 빠지기도 한다.
교회가 어려움에 빠진 후 다시 세워가려는 처음 시작은 공통의 관심사로 인해 매우 고무적이다. 달라져야 한다는 의지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긍정의 마인드는 매우 강한 변화의 동력이 되고, 함께하는 성도를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변화와 안정이라는 것이 생각만큼이나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다.
몇 달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예기치 않은 문제에 부딪혀 지지부진해진다. 전에 지나쳤던 새로운 갈등이 비로소 등장한다.
교회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욕구와 이 기회에 다른 성도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고자 하는 인정 욕구가 수면 아래에서 부딪힌다.
거센 풍랑은 지났고 순항할 줄 알았는데 작은 바위 같은 문제에 걸려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다.
하나 둘 성도가 흩어지기 시작하고 결국 좌초의 위기에 몰린다. 수면 위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문제들을 소홀히 한 결과다. 과거와 달라야 한다는 목적만을 붙들고 그 목적에 다다르기 위한 세심함을 놓친 것이다. 예를 들어 젊은 세대가 중심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의사결정은 장로, 권사를 주축으로 한다. 젊은 세대 한, 두 명 자리한 것으로 우리 회의체가 젋어진다고 믿지만, 한, 두 명의 이야기는 십 수 명의 의견에 고립되고 만다. 더 치밀했어야 했다.
갈등과 분쟁은 색다르게 표출되고,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 소란한 상황이 지속되면 동력을 잃는다.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더니 과거와 달라져 보이지 않을 때 더 크게 실망한다. 보이는 것들을 정리하면 보이지 않는 것들도 함께 정리할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이 교회를 다시 기울게 한다. 새롭게 시작하며 단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바스러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대감이 흐려지는 가운데 교회에 대한 기대도 조각나기 시작하면 새로운 주장과 선택지를 찾는다.
첫째는 불안을 극복하고 흩어지지 않기 위해 더욱 빨리 목사가 청빙 되어야 한다고 더 강하게 이야기한다.
좋은 목사가 오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성도를 회유한다. 목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신앙 패턴은 의존할 대상이 사라진 시간이 버겁다. 선택과 결정해 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목사가 와서 이 상황을 정리해 주기를 목놓아 기다린다.
새롭게 청빙 한 목사와 또 새로운 갈등을 경험하는 교회가 많고, 갈등이 분쟁이 되고, 한 번은 했는데 두 번은 못할까 생각하여 목사를 내보내거나 자신들이 또 떠나서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물론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나, 좋은 목사가 청빙이 되는 시기까지 임시적 시간에도 목사의 역할이 필요하다. 예배와 목양의 순기능을 맡아주고 성도의 질문을 받아가며 사심 없이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신뢰할 만한 누군가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목사청빙이 교회를 새롭게 세우는 과정에 필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없다. 목사는 모든 것에 있어서 만능일 수 없다.
둘째는 새롭게 시작한 교회를 뒤로하고 떠났던 교회로 다시 돌아간다.
돌아가는 걸음을 막을 수는 없고, 그 결정의 좋고 나쁨을 논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는 새롭게 시작한 걸음을 비난하고 조롱하며 원래 자신이 돌아올 수밖에 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부족함이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공동체였거나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냉철하게 바라보기보다는 다른 이들을 깎아내리는 방법으로 변명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더 나쁜 사례는 새롭게 시작한 교회에서 한 자리라도 해보고 싶었던 욕망을 숨기려는 것이다.
하지만 자리가 없고 느낄 때에는 소란을 피우고 떠난다. 그리고는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라고 떠든다. 그렇게라도 선택을 번복한 자신에 대하여 위로받고 싶어 한다.
셋째는 떠나온 교회를 따라 하기 위해 애쓴다.
보고 배운 것이 딱 거기까지고, 신앙과 교회에 대한 상상력이 없으니 예전에 하던 것, 안전하게 보이는 것을 다시 하려고 한다. 오래된 습관에 스스로를 옭아 매고는 후진 생각을 고집스럽게 바꾸려 하지 않는다. 전에 다 그렇게 했다고 밀어붙인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열정에 찬 물을 끼얹어 놓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넷째는 이 혼란의 시기를 틈타 중심인물이 되고 싶어 한다.
괜히 앞서 있는 사람의 꼬투리를 잡고, 이유 없는 불만을 토로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에 급급하다. 전에는 말없던 이들이 나타나 다양한 요구를 쏟아 놓는다.
교회를 위한다고 하는데 정말 교회를 위한 것인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인지 혼란스럽다.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냐고 따져 묻는다.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는 사랑 없는 교회라고 말한다. 나는 공동체로부터 상처받았으니 떠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상처’라는 단어에 무기력한 교회는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다섯째는 교회 상황이 복잡해지면 흐지부지 흩어지는 이들이 있다.
말없이 사라지거나 만남을 피한다. 아예 이사를 가버리기도 한다. 여러 핑계로 관계를 멀리 한다. 그리고는 숨어 지낼 만한 교회를 찾는다. 아니면 아예 함께하는 공동체를 거부한다. 나 스스로 떠난 것인지 밀려난 것인지 모를 슬픔에 오래도록 교회와 거리를 둔다. 차라리 이것이 좋다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은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만 생각한다.
떠나는 이들에게 잘 가라고 말하며, 쿨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현재의 안일에 빠져 더 이상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문제 일으킨 목사가 나간 것에 만족하거나, 문제를 제기하고 바르고 정의롭게 실천하려 했던 과거와 지금을 재료 삼아 반복적으로 자신의 기특함에 만족하며 산다.
큰 꿈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많은 것이 생각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부터 들여다보아야 했을까. 무엇을 놓친 것일까.
새로운 항해가 아니라 좌초하는 당황스러운 이야기는 목사의 은퇴와 청빙의 시기에도 발생한다.
위의 이야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다.
겉으로 잘 진행된 사례도 살펴보면 무리한 전별금 요구, 떠나가는 목사에 대한 실망 새로운 목사에 대한 기대 등 다루어야 할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가 문제를 꺼내기보다는 덮는 자세를 기본적으로 취한다. 복잡한 원인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인과과정만을 생각하고 결정한다. ‘교회의 안정’을 위해 덮는 것이 미덕이고, 두둑이 전별금을 주는 것이 소란을 피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은퇴와 청빙에 대한 질문을 가진 이들은 현실을 모르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질문과 의심을 가진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질문과 의심에 답변과 설명을 할 수 없다는 점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신호와 같다.
또한 이 시점에서 ‘노회’ 혹은 ‘연회’에서의 영향력 행사도 비선적으로 이루어진다.
소위 교단 내에 브로커 역할을 하는 이들이 교회를 혼란하게 한다. 자신이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교회가 더 안정적으로 갈 수 있게 돕겠다는 말로 교회를 안정시킨 후. 자신이 좋은 목사를 소개하겠다는 언급으로 교회의 결정을 흔든다.
그러나 은퇴한 이의 영향력, 은퇴한 목사에 대한 연민과 새로 부임한 목사에 대한 낯섦이 섞이면서 교회가 풍랑에 휩싸인다. 이럴 때 암초라도 만난다면 큰 낭패다.
이 시기 교회는 객관적 시각으로 교회를 돌보고 이끌어 주는 도움이 필요하다. 문제 안에 있는 사람은 객관적일 수 없다. 편과 편이 나뉘고, 감정이 얽히는 상황에서 중립적 위치를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자신하지 말아야 한다. 정해진 시기 내에 교회 리더십 전환을 잘할 수 있도록 신뢰할 만한 사람을 세우고 도움과 조언을 들으면서 목사를 바꾸는 것이 아닌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시기를 지나는 교회는 떠남과 상처가 가득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렇게 힘들게 되었을까.
왜? 함께 기쁨의 소리로 예배하던 이들과 얽혀 당황하게 되는 것일까.
사람은 수많은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머리와 마음에서 나온 정답은 이 모든 일에 정답이 아니다.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 뒤에 감추어진 마음을 주님을 보신다. 교회의 갈등을 타고 멋진 서퍼가 되고 싶은 이기와 욕망을 주님은 아신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다.
계획한 대로 빠르게 정리되지 않는다고 불안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결정에 화를 내고, 다투고, 비뚤어진 말을 하고, 성도들과 왜 싸우는가 [2]?. 교회의 갈등을 기회 삼아 전리품을 챙기려 했으나 전리품 없는 상황에 당황하는 것 아닌가 [3]?.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비 앞에 머물러 기도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4]
교회가 위기를 지날 때, 새로움으로 할 걸음 나아가려 할 때, 수많은 계획을 세울 것이며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품에 결과를 안겨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마음이 없다면 계획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황하지 마라.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시니 [5]
이 과정도 하나님이 동행하는 순간임을 기억하라 목적은 믿음의 터 위에 새롭게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비뚤어진 관행을 바꾸고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목적에 다른 사심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조심하고, 마음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1] 잠언 16:1~2 새번역
[2] 잠언 16:28 새번역
[3] 잠언 16:19 새번역
[4] 잠언 16:32 새번역
[5] 잠언 16:33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