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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May 27. 2022

시댁에도 내편은 있습니다, 동서라는 내편.

장손 며느린데 딸 하나만 낳았습니다.#9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날이었지요. 그날은 바로 1996년 2월, 제게도 드디어 동서가 생긴 날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은지 100여일이 조금 지난 때였구요. 사실, 결혼 후 3년여 장손 며느리로 살면서 뭔지 모르게 미묘한 부담감, 혹은 책임감이 제 어깨를 누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댁은 대가족이었고, 횟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제사며 명절을 치를 때면, '아, 결혼이란 이런 것이구나, 나는 뭣도 모르고 며느리가 되었구나. 그것도 장손 며느리'라는 회한에 젖곤 했습니다.


워낙 타고난 성정 자체가 생각하는 것을 입 밖으로 잘 끄집어내는 편이 아니라, 제 속은 매번 타들어가는데도 친정엄마조차 제가 장손 며느리 노릇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는 줄 알고 계셨더랬죠.


하지만, 말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처음 겪어보는 날 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더군요. 저도 사람인지라 아이를 낳고 '독박 육아'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그 누구도 모르게, 심지어는 같이 사는 남편조차도 모르게 서재로 들어가 눈물을 훔치는 날들이 제법 많아지던 차였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이것이 '산후 우울증'의 흔한 증상이라는 걸 알아채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저 모든 것이 서럽고 버거워서 언제 이런 생각들을 지울 수 있을지에 대한 궁리만이 하루하루를 버티는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게도 한 줄기 빛이 생각지도 않은 타이밍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전, 그날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예식장에서 지나쳤던 하객들의 얼굴 표정까지도 대부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8살 차이가 지는 막냇동생이 있었는데, 대학을 졸업하던 해 그 어렵다는 대기업에  신기하리만치 수월하게 입사를 이뤄내더니, 무슨 번갯불에 콩을 볶아도 이렇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탄선언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결혼을 해야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남편과 전, 당시로서는 꽤 늦게 결혼을 한 터라,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막내 도련님의 결혼 선언은 그야말로 획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놀라는 가운데도 전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내게도 동서가 생기다니! 동서가 생기면 이런저런 일들을 상의하고, 함께 할 수 있으니 정말 좋겠다'는 생각에 밤잠마저 설칠 정도였으니까요. 집안의 첫 며느리자, 장손 며느리면서 당시까지는 유일한 며느리였던 제게 쏠렸던 시선과 기대를 이제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어쩌면 핏줄이 아니면서도 더욱 핏줄 같은 연대감을 형성하는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고맙게도 저의 이 판단은 틀리지 않았음을 그동안의 동서와 저의 관계에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나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시어머니와의 불편한 관계보다 오히려 시누이 혹은 동서와의 관계가 더 심하게 삐걱거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더군요. 그런데 저는 확실히 동서 복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서는 막내며느리답게 싹싹하고, 엽렵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시댁 식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었거든요.  


물론 나이차도 제법 있었지만 처음 시집와 하나부터 열까지

"형님, 이건 어떻게 해요? 형님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하면서 질문세례를 퍼부어도 저는 그 형님 소리가 얼마나 듣기가 좋던지 제가 아는 만큼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곤 했습니다. 이런 걸 두고 저는 '타성받이의 끈끈한 유대감'이라고 동서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결혼으로 인해 획득하게 된 낯선 관계들 중에서, 가장 내 편에 가까운 사람, 그게 동서 아닐까요? 굳이 '내편'이라고 표현하는 게 마뜩잖지만, '시댁'이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같은 시선으로 이해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전 참 든든했습니다. 동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멀리 살기는 해도 전화로 문자로 서로의 동질성을 찾고 공감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던 거 같군요.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말이죠. 주변인들이 동서와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할 때면, 나의 마음을 잘 알아주고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는 동서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친정 엄마가 돌아가신 날, 그 멀리서도 한달음에 달려온 동서의 손에는 제게 전해 줄 편지가 들려있었습니다. 내용이야 어떻든 천 마디 말보다 더 따듯한 위로의 마음이 글 한 줄 한 줄에 녹아 있어서, 그 편지를 보며 참 많이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지만 시어머니의 맥락 없는 한마디 말이나, 남편의 무심함, 혹은 가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의 반항 때문에 힘들어할 때,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어깨를 내주곤 했습니다. 나를 받혀주는 이토록 든든한 기둥 하나가 내 곁에 있다는 건 큰 축복이라는 걸, 지난날들을 통해 깨닫고 또 깨닫게 된 부분이었지요.


동서에게 구체적으로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형님으로서 제가 동서에게 어떤 사람' 인지 말이죠. 어려운 사람일 수도 있겠고, 가끔은 외면하고 싶은 대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자매 사이에서도 분란은 늘 일어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시댁 식구 전체를 통틀어(여기는 남편도 포함입니다) 저의 말과 행동의 이유를 가장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동서라는 겁니다.


바라건대 동서에게도 제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거의 30년이 다 돼가도록 큰 다툼 없이 서로의 자리를 넘보지 않고 잘 살아왔다 자신하지만, 또 그렇게 우리의 생이 끝날 때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기를 희망하지만, 인생이란 늘 알 수 없는 경로로 우릴 인도해 가기에 섣부른 확신은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다만, '시댁 식구'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같은 색깔의 끈으로 묶일 수 있는 유일한 관계라는 것만큼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할 겁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그 옛날의 두 새댁은, 이제 아이들을 다 성장시켜 사회로 보내고 자신들의 삶을 조금 더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다짐하는 중년이 됐습니다. 매일매일의 순간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충실해야겠다는 동서의 문자에 흐뭇한 웃음을 실어 보낼 수 있어 감사합니다. 어쩌면 굉장히 외롭고 때로 힘들기도 했을 '장손 며느리'의 행로에 '동서'라는 동반자가 있어서 더욱 감사합니다. 망울 맺은 봄꽃들을 지나치지 않고 사진에 정성스레 담아 보내는 그이가 내 동서여서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커버 이미지/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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