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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잠 Sep 28. 2020

[월간 꽃잠] 49재, 만 스물여섯 시인의 이야기

한 시인의 49재.

그 날, 그녀의 유고시집이 발표되었습니다. 


시인의 나이는 올해로 만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시인은 2017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등단', '유고시집', '만 스물여섯', '49재'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 단어들의 조합.

오늘 함께 만날 시인은 바로 김희준 작가입니다.


1994년 9월 10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2020년 7월 24일 불의의 사고로 영면한 시인은 등단하기 전까지 전국 백일장의 장원을 휩쓸고 다닐 만큼 미래가 총망했던 문학도였다 합니다.


“사라지는 건 없어 밤으로 스며드는 것들이 짙어가기 때문일 뿐”


등단작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속에 나오는 이 구절은 그녀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 읽고 가는 문장입니다. 인용한 저 문장 속에서 홀연히 사라진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독자만의 상상일까요. 그녀는 자신의 시에서 마치 곧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본 것처럼 쓰라리지만 아름답고, 사라지지만 곁에 있는 문장들을 우리들에게 남기고 떠났습니다.


문학동네시인선 146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김희준 시집 (2020년 9월 10일 출간)


김희준 시인의 「친애하는 언니」 의 한 구절로 등장하는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은 그녀의 유고 시집의 제목으로 선정될 만큼 그녀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수많은 문장 중 하나입니다. 『문학동네』 편집자가 그녀의 그 많은 문장들 중에서 이 문장을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것은 그녀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들지 않는’ ‘언니의 나라’로 떠난 그녀가 여전히 아름다운 시를 짓고 있을 것이라 믿어지니까요.


10월 월간 꽃잠은 아직 그녀의 시와 조우한 적 없는 분들께 그녀를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시를 조금 먼저 만난 독자로서,

그녀를 추모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시인 김희준의 많은 작품 중에서 그녀의 유고시집 제목이자, 그녀만의 특별한 결이 느껴지는 시「친애하는 언니」를 함께 낭독해보려 합니다.




친애하는 언니

김희준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 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제봉된 마음이었다는 걸, 의사는 누워있으라 했지만 애초에 봄은 흐린 날로 머무는 때가 많았지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에 어린 엄마와 어린 언니가 있어 놀이기구가 안개 속에 숨어있었던 거야 숨바꼭질을 좋아하던 언니가 이불과 옥상과 돌담 그리고 유채꽃과 산새와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한때 비가 내리고, 물의 결대로 살 수 없다면 늙지 않은 그곳으로 가자 소매 안에 훔쳤던 벚나무에 대해 사과하는 밤, 나무의 탯줄이 보고싶었다 뭉텅이로 발견되는 꽃의 사체를 쥘 때 알았던 거지 비어버린 자궁에 벚꽃이 피고, 사라진 언니를 생각했어 비가 호수 속으로 파열하는 밤에 말이야 물속에 비친 것은 뭐였을까


언니가 떠난 나라에선 계절의 배를 가른다며? 애비가 누구냐니, 사생하는 문장으로 들어가 봄의 혈색을 가진 나를 만날 거야 떨어지는 비를 타고 소매로 들어간 것이 내 민낯이었는지 알고 싶어


파문된 비의 언어가 언니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한 번에 그녀의 단어들이 읽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몇 번을 곱씹어 읽어볼 수도 있고,

또는 그저 물 흘러가듯 단어에 몸을 맡겨보는 것도 그녀의 시를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녀는 이 시에서 꽃을 필 준비를 하는 '유채'로 시문을 열고, 활짝 핀 꽃이 아닌 ‘꽃의 사체’에 주목하며, ‘비어버린 자궁’처럼 죽음 속에서 ‘벚꽃이 피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사생하는 문장’에서 ‘봄의 혈색을 가진 나를 만날’ 거라는 말을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화자의 속삭임에는 죽음과 살아있음 사이에 경계가 없고, 죽음 속에서 ‘나무의 탯줄’ 즉, 생명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작가의 탁월한 시선이 한 숨에 느껴집니다.


그녀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시어 선택의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녀.

그런 그녀를 아무 예고 없이 데려간 하늘이 이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시를 읽으며 그 시 안에서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시인 김희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겠죠.


김희준 시인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는 바로 어머니 입니다. 그녀의 시적 재능과 시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바로 어머니로부터 왔다는 것은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녀만큼이나 시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어머니 역시 시인으로서 두 모녀는 밤마다 옥상에 올라 별을 바라보며 시로 태어나기 전 씨앗같은 대화들을 무수히 많이 쏟아냈을 것입니다. 실제로 김희준 시인이 남긴 여러 시에서 천체, 밤, 별의 시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엄마와의 시간이 많은 영감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들지 않은 ‘어린 엄마와 어린 언니가’ 함께 손붙잡고, 서로가 그토록 좋아했던 ‘이불’, ‘옥상’, ‘돌담’, ‘유채꽃’, ‘산새’, ‘먹구름’ 속으로 달려들어가 놀이 하는 모습.

그녀를 먼저 떠나 보낸 어머니는 이 문장을 닳고 또 닳을 데까지 읽어 내려가겠지요.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딸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는 시인 김희준의 49재 날, 그리고 그녀의 생일이기도 한 그 날에 유고시집을 받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스물일곱, 만으로 고작 스물다섯의 나이에 유고시집이란다. 주변에 고마운 분들 천지인데 나는 왜 이렇게 아프기만 하는 것인지… 아이의 시를 손에 잡히는대로 꺼내 읽어본다. 문장마다 아이의 목소리가 그대로 묻어난다. 나는 또 오늘을 잘 견뎌야 한다… 그것밖에 모른다. 엄마라서 더 모른다…”

-시인 강재남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eos6710


그녀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녀의 어머니, 강재남 시인의 블로그에서는 딸아이의 절절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글들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습니다. 김희준 시인에게 닿길 바라는 엄마의 간절한 말들이 차곡 차곡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고, 남겨진 딸의 사진은 왜이리도 가슴아픈지, 엄마는 매일 울고 또 웁니다.


세상에 태어나 문장을 남기고 떠난 수많은 시인들을 보아왔지만, 어째서인지 김희준 시인의 시는 더 가슴아프게 느껴지는 건 얼마전까지 함께 이 땅에 살아있었던 한 젊은 작가였기 때문인건지, 그녀가 남긴 시가 떠난 그녀와 너무나 닮아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상실의 슬픔보다는 죽음의 민낯에서 생을 보고자 하였던 젊은 작가 김희준. 지금, 먼저 떠나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을 분들과 함께 그녀의 시를 읽고 싶습니다.


10월 월간 꽃잠이었습니다.


ps. 김희준 시인이 남긴 문장들


"때때로 스펙트럼 행성에선 그리운 사람을 한평생 쓸 수 있는 이름이 내린다"

-「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 부분


"사라지는 건 없어

밤으로 스며드는 것들이 짙어가기 때문일 뿐"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부분


*10월의 꽃 _ 무궁화

무궁화의 꽃말은 일편단심, 변하지 않는 마음, 끈기, 인내라고 합니다. 어느덧 2020년의 한 해도 두달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매일 매일 사회적 거리두기로 심신이 지쳐가고 있을 우리 생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인내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지만 그 끝은 존재할 것이기에, 그 믿음으로 함께 이겨나가면 좋겠습니다.




[월간 꽃잠]은 새로운 엔딩스타일을 만들어 나가는 꽃잠이 상실과 치유를 주제로 그 달에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는 힐링 매거진입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장례 지식], [이 달의 인생질문], 꽃잠 팀원들의 소소한 일상을 소개하는 [꽃잠 티타임], 죽음 관련 문화 콘텐츠를 소개하는 [꽃잠 북클럽], [꽃잠 감성] 그리고 매월 정기적으로 열리는 꽃잠의 [상실치유 워크숍] 안내 등 다채로운 꽃잠의 이야기를 매월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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