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큐레이터 Aug 02. 2024

사색의 온도, 사랑의 온도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가? 이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풀어내는 사랑의 방식은 어떤가?

 

 한발씩 다가가는 오랜 꿈만큼이나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내게 있어 가장 큰 성장의 양분이 되었다. 온 세상이 영화이고, 저마다의 인생이 소설이라 여겼기에 다큐멘터리나 인생의 회환을 담은, 사회를 매섭게 꼬집은 예술작품만큼 로맨스 역시 좋아하였다.

  꽤나 오래된 기억이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긴 제주도에 살던 동창이 있었다.

 대학생 시절 만난 연인과 헤어지고 힘겨워하던 그 친구에게 전했던 글귀가  블로그 글을 쓰려하다 발견한 옛 노트에 적혀있어 옮겨본다.

 

 "00아,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마치 불을 지피는 것 같아.

 누군가는 바닷가에서 화려한 불꽃놀이로, 누군가는 묵묵히 쌓아올린 장작에  모닥불로, 누군가는 마치 온기가 계속 될 것 같은  벽난로에 피워둔 불처럼.

 그렇게 누군가를 언제 만났느냐에 따라 불을 피워내는 것이 저마다 다르더라.

 

 누군가는 꺼져간 불을 다시 살리려고 재를 뒤집어 쓰고,  누군가는 아스라히 흩날리는 연기와 불의 잔향을 뒤로하고 떠나버리지.

 

 어떤 불꽃이든 그 자체는 아름다우나, 누군가는 불을 지키기위해, 혹은 온기를 오랫동안 남기기 위해 주위에 벽을 세우고 집을 짓고, 누군가는 불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장작을 준비하고 때론 젖어있는 것들을 말리기도 하지.

 

 이번 사랑은 어떤 불길이었니? 그리고 너는 다시 어떤 불을 피워내고 싶니?"

  친구에게 보냈던 말이 내게 다시 돌아온다.

 나이 차가 꽤 있지만, 책임감과 친절함이 매력적인 최근 알게된 선생님에게 영화를 이것저것 추천해주었다. 아뿔싸! 첫사랑 영화말고는 로맨스를 잘 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에 되려 추천해주고 싶은 다른 영화들이 더욱 생겼다. 물론 로맨스가 아닌 장르들로.

  고백을 하나 하자면 한동안 어떤 영화도 보지 않은 적이 있었다.

영화과로 편입시험을 몇 번 보고 그 길을 접은 무렵이었다. 그리고 내 재능의 가능성 만큼이나 명확한 한계를 같이 보게 된 시기였다.

 로맨스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현실의 사랑에 비해 가볍거나 유치하게 느껴지고, 스릴러와 미스터리는 영화 감독의 시선으로, 극을 쓴 작가의 시선으로, 배우의 연기적인 측면으로, 극의 음악 감독의 역량으로 자꾸 분해되어 읽히고 온전히 영화 자체를 빠져들지 못하였다. 영화가 미웠고, 공부할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약 2년간 영화관을 간적이 없었다.

 어느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었다. 민요를 전공한 사람이었다. 짦은 만남이었고 꽤나 시간이 지나 지금은 얼굴이나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기억나는 장면이 딱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너무 더운 여름날 소위 말하는 썸을 타는 사람들의 데이트 중 가볍게 생긴 궁금증에 고즈넉한 한옥 건물에서 흔쾌히 내게 불러주던 아리랑의 곡조.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분과 가게 된 영화관에서 나눈 영화 취향에 대한 대화.

 "지극히 현실적인 성향이라 로맨스 영화보단 차라리 아예 판타지나 액션 영화가 좋아요. 그런데 누군가를 만나느냐에 따라 어떤 추억을 가지게 되냐에 따라 변하는 것 같아요."

 나는 그녀에게 액션 영화같은 걸 좋아하냐는 실례되는 말을 꺼냈었지만, 그 뒤로 다시는 예술 취향의 고급함, 저급함이나 평가를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꽤나 오래전 본 고전 영화를 시작으로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를 다시보게 되었다. 인간적인 호감이 드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즐겁게 본 영화나 드라마, 즐겼던 음악들을 추천하고 또 공유 받게 되었다.

 

 삶이 더 로맨스 영화 같아지길! 그리고 조커를 좋아하는 분이 할리퀸과의 사랑도, 해리포터 속의 스네이프의 사랑도 새롭게 보이고 누군가와 다시 보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오길 바라본다.

 

 영화이야기를 벗어나 사랑의 단상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우리는 세상에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논리와 효율의 공식들이 통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걸 꼭 사랑이 아니라도 사람과의 관계들 속에서 깨닫곤 한다. 그렇기에 사람에 치이고 일보다 사람이 어렵고, 사람때문에 아프다.

 커뮤니케이션기법에 관한 수업을 듣게 되면 언제나 나오는 말이 있다.

 (좋은 관계에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관계에는 각자가 정한 기준 선이 있고, 그 거리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지만 때론 적절함(?)의 상호 오해들로 쉽게 상처입거나 깨져버리곤 한다. 누군가와 서로 사랑한다는 건 이 적절한 거리의 공식을 서로가 줄이는 과정이 필요하기에 어렵고 대단하며 생각보다 더 멋진 일이다. 더군다나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하는 선이기에 때론 기적과도 같은 타이밍 혹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한창 캘리그라피가 유행할 때 많이 쓰이던 문구가 떠올려진다.

 나는 연필이었고, 그래서 흑심을 품고 있었다. 당신 마음에 '좋아해요'라고 쓰고 싶었지. -김연수 소설 중-

 

 오늘 퇴근길에 마주한 하늘에 그 문구를 적어두었다가 언젠가 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면 그대로 편지에 옮겨 적어주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이별과 이별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