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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유 Aug 28. 2022

피구에서 배운 삶의 비밀

피구 공포증에서 피구 에이스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

어릴 적 나는 피구를 너무 싫어했다. 아니 혐오했다.  나는 공을 잡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공을 던지는 성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무조건 공이 오면 이리저리 피하기 바쁜 겁쟁이 었다. 나에겐 피구경기 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치 도살장으로 들어온 것 마냥 두렵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 안에 갇혀 옴짝 달짝 못한 채 공에 맞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꽤나 잔인하다고 느껴지기도 하였다. 게임이 끝나기 위해선 우리 편이 이기진 않는 한 언젠간 맞아야 하고 우리 편이 이긴다는 확률도 절반일 뿐이었다. 그 마저도 내가 공에 맞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팀이 이기고 그 와중에서도 끝까지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따져보면 낮은 확률에 불과했기에 그저 그 상황에 바랄 것은 우리 팀이 공격을 잘하길 바라는 것이고 상대편에게 공이 넘어가지 않길 바라며 맞을 순간을 기다리는 일 밖에 없었다. 난 언젠간 맞아야 한다는 두려움과 피하는 동안 느껴지는 조마조마함이 싫어 차라리 덜 아픈 곳을 맞고 탈락하기를 바라기도 하는 무기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내가 피구를 잘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던 것은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일 것이다. 어느 날, 공을 맞아야만 끝난다는 두려움과 나는 공을 맞기만을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함이 극에 다했던 그 순간, 지기도 싫고 맞기도 나를 맞추기 위하여 공을 나에게 겨냥하던 친구를 보고 지기도 싫고 맞기도 싫다면 맞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나는 날아오는 공을 끝까지 응시한 채로, 공을 처음으로 잡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공을 잡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유일하게 지지 않으면서 맞지도 않고 끝날 방법이란 사실을 깨달았으며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피구 수비 에이스가 되었다.


그날 공을 잡기 전까지 난 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왜 그저 피하고 맞는 것이 답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공을 잡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 스스로 한계를 정했기 때문이고 나는 해낼 수 없을 거라고 나 스스로를 나를 평가절하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선택지 안에도 없던 선택을 나는 새로 만들었고 그것을 택했다. 그리고 피할 때 보다 훨씬 덜 두렵고 더 역동적이고 용감해질 수 있었고 두려움을 잊고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내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엄청난 용기와 깨달음을 주었다.



사실 피구도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삶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일들을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여전히 회피적인 성향은 피구공을 극복해 낸 초등학교 이후에도 종종 발견되었다. 괴로운 상황이 오면 그 상황을 벗어나 다른 것을 하려 한다던가, 다른 즐거움을 유발하는 일을 찾아 덮어버린다거나, 성인이 되어서는 술을 마신다거나, 직접적인 방법이 아닌 것들을 선택하고 그것이 일을 해결하는 일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관련 없는 즐거운 순간으로 덮어버리고 해결되었다고 믿은 문제들을 다시 살며시 열어보았을 때, 대부분의 상황들은 여전히 그 모양 그대로, 내지는 다른 복합적인 문제들과 섞여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해결을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방법들은 본질을 벗어난 엉뚱한 방법이었고 그 방법들은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고 나게 돼서야 결국 내가 마주한 괴롭고 막막한 것들은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문제 해결의 주체와 에너지 전환>>


 난 문제에서 오는 그 불안감을 그저 미뤄두고 덮어두고 있었던 것 같다. 불안감과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진 않고 시간이나 누군가가 해결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벽히 해결되지 않은 그 상황 속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계속되었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는 것을 직면한 순간, 무기력함을 극도로 느끼기도 하였다.

우습게도 피구공을 두려워했을 때의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극복했던 것을 성인의 나는 삶 속에서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구 공을 피해 도망가면 결국은 맞는 것을 기다리며 나 말고 다른 이들이 이겨주기를 바라는 무기력함 밖에 나에게 없을 것이지만, 피구 공과 맞선다면 팀의 승패를 좌우하게 할 수 있는 주역이 될 수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인생에서도, 상황이 우릴 향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무기력함 대신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돌파하며 미래를 바꿀 주역이 되는 편은 불안한 미래와 문제에 대한 생각지도 못한 새롭고 희망적인 대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피구공을 계속 피해 다니며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크고 그 에너지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그 불안감을 짧은 용기를 냄으로써 바꿔 피구공에 정면으로 맞섰을 땐, 오히려 두려움은 줄어들고 성취감과 자신감이 나를 둘러쌌다. 인생에서도 그러한 부정적인 상황과 에너지를 충분히 희망과 자신감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의 많은 경우에 그렇게 바꾸기는 쉽지가 않다. 나의 경우처럼 자신이 바꿀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경우가 주된 원인이라는 생각을 한다. 위기상황에서 인간은 시각과 사고방식이 더 편협해지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원래 해왔던 것에 대한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기에 이 위기 상황을 대면했을 때 가져왔던 고정관념을 바꾸는 것은 인간의 특성상 쉽지 않고, 큰 에너지이고 큰 용기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로 상황을 겪는 것은 다르다. 생각을 전환하는 것이 시작이다. 바꿀 수 있고 내가 상상하고 쳐다보고 동경해만 왔던 그 상황과 그 능력이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린 모든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할 뿐, 우리 모두는 사실하기만 하면 그만한 능력을 발휘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믿는다. 나처럼 피구공을 두려워했던 겁쟁이가 날아오는 공을 다 잡고, 끝까지 남아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조력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회피하지 않고 마주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감내해야 할 일이자 괴로운 상황을 이겨낼 단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많은 것을 회피하고 괴로우면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 상황이 저절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해결되는 것들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나 스스로 직면해야 해결되는 일들이 더 많았다. 겉으로는 해결된 듯 보이는 사항들도 회피한 시간 동안 그 속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은 동결된 채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다분했다. 결국엔 내가 손을 대야 끝이 나고 변화가 보이는 것들은 내가 용기를 내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난 생각한다.


나는 항상 두려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고 그 한계는 항상 나를 규정하고 문제가 항상 제자리를 돌게 만들며 나를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나의 선택지를 새로 만들고 나에게 새워 둔 벽을 깨부수고 도전하고 용기 내는 것은 괴롭고 해결되지 않았던 굴레를 타파하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두렵고 도망가고 싶은 그 순간에 이를 악물고 두려워하는 에너지를 맞서는 에너지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의 두려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보다 1만큼 더 용기를 낸다면 어느 순간 세상에서 내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들을 꽤 많이 이루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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