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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베 Nov 29. 2017

쓸쓸하고 찬란한 롱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 뻔하게도 현실은 냉정했다.

첫 연애는 수능을 마친 겨울에 시작됐다. 흔해빠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한 아이를 좋아하게 됐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서툴고 서툴렀다.


눈 깜짝할 새 두 달여가 흘렀다. 그 아이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삼척으로 떠났다. 하필 무슨 공예과인지를 가겠다며 그 멀리로 갔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신입생으로 적응하기도 힘든 시절인데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렸다.


2주 만에 그녀를 만나러 삼척으로 향했다. 버스로 6시간. 영동고속도로가 생기기 이전이다. 반가운 것도 잠시였다. 막상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니 짧은 시간 동안 너무도 달라진 각자의 상황이 어색하기만 했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새로운 만남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다가오던 시기다.


서울로 돌아오고 며칠 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전화로 이별을 통보했다. 그때는 인정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감정만 있으면 무엇이든 해결된다고 믿었다. 확실히 어리석었다.


가장 최근 연애는 이번 겨울이 시작되며 끝났다. 역시 ‘롱디’였다. 우린 각자의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충분히 성장해 있었다. 분명 어른이었다. 별 탈 없이 관계를 이어갔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서로를 존중했다. 믿었고 터치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면 결혼해서 큰 굴곡 없는 여생을 보낼 듯했다.


연애를 시작할 무렵 그녀는 대학원에 들어갔다. 배움에 대한 욕망이 컸다. 유학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고 싶은 바를 응원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행복하길 바랐다. 본인은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했지만 충분히 크게 될 인재가 분명했다. 막을 이유도 방도도 없었다.


처음에는 6개월 교환 학생 자격으로 베를린으로 향했다. 일단은 6개월 만에 돌아올 것이었다. 심각할 일도 없었다. 그녀는 교환 학생 기간 동안 여러 학교를 알아봤다. 입학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더니 덜컥 석사 과정에 합격했다. 합격하자마자 바로 내게 말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얼마 후, 최소 3년은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시 채비를 하고 돌아가야 했다. 복잡한 감정이었지만 진심으로 축하했다. 괜찮다고, 여차하면 내가 이민을 준비해서 가겠노라 말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스무 살 때처럼 보채거나 안달 내지 않았다.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잠시의 난관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평생을 함께할 것이고 지금의 몇 년은 그것의 작은 조각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그녀가 한국에 돌아와 있는 동안 이별을 직감했다.


서로의 현재를 너무 배려하느라 함께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었다. 일상을 공유했지만 이상에 대해 대화하지 않았다. 이유 모를 짜증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일종의 욕구불만과 소통의 부재 때문인 듯싶다.


2주 만에 그녀는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이대로라면 금방 끝이 찾아올 게 뻔했다. 2주 후 무리해서 베를린으로 향했다. 되돌리고 싶었다. 며칠 동안 우린 정말 행복했다. 관계가 다시 완전히 회복됐다고 믿을 정도였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이전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갑자기 며칠 연락이 되지 않았다. 노심초사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연락을 시도했다. 슬픈 예감이 밀려왔다. 분명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며칠 후 이메일이 한 통 왔다. 전화기를 잃어버렸고 현장 학습 때문에 잠시 다른 도시여서 인터넷도 쓰기 어려웠다는 내용이었다. 이메일에는 예상했지만 일어나지 않길 바라던 내용이 덧붙여져 있었다.


어이없게도 전화기를 잃어버린 게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마음을 정리했다. 연락이 닿지 않는 동안 미뤄왔던 숙제를 하듯 우리 문제점을 진단하고 결론을 내렸다. 단지 관계 유지만이 해답이 아닌 것은 맞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몇 달 동안 우린 너무 다른 곳을 향해 각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때 외국인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 그 경험으로 장거리 연애에 대단한 노하우가 생겼다고 착각했다. 장거리 연애에는 노하우가 없다. 누군가의 희생, 적당한 무관심, 돌아올 수 있을 만큼의 일탈, 억지와 욕심 등 관계 유지를 위해서 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될까 말까다. 끝을 알기에 매 순간 감정이 극대화된다. 잔인하다. 아름답진 않지만 치명적이다.




*<에스콰이어> 2017년 4월호에 실린 본인의 기사를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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