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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망친 곳의 낙원 Feb 17. 2023

11. 영국석사 첫학기 리뷰  (전반전)

한줄평 = 영어를 못해 미안합니다 

2학기의 절반쯤 돌이켜보는 1학기 총평. 요즘 갑자기 내 브런치 조회수가 폭등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지금 한창 내년도 영국 석사 지원들을 하시는 것 같은데, 내 주관적인 기록이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뒤늦게 한 번 정리해보고자 했다. 특히 non-native spearker들(대부분이시겠지만)은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보시길..(대부분 서러운 이야기들). 


0. 영국 석사 = 수업석사(taught master) 
= 강의가 많고 빡빡하다 

LSE 미디어 석사과정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평균 3년 정도의 직장경력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박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기 보다는 이 석사학위를 활용해 더 높은 position 또는 이직을 꿈꾸고 있다 (마치 나처럼). 학교는 이런 우리를 위해 연구보다는 '강의+논문'에 집중하는 커리큘럼이 제공되는데, 이를 수업석사(taught master)라 이른다. 물론 수업석사도 정식 석사학위이고 이를 바탕으로 박사로 진학하는데도 전혀 문제는 없다. 굳이 문제라고 한다면 생각보다 빡세다는 점? 특히 비영어권에서 온 학생들에겐 더욱 터프한 스케줄이다. 

1학기 시간표. 학부 때보다 훨씬 빡센 느낌이다. 

학교마다, 그리고 전공마다 커리큘럼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LSE media전공의 경우 필수전공 2개, 통계학 강의 1개, 방법론 강의 1개, 옵션강의 3개 등 총 7개의 강의를 2학기에 걸쳐 이수해야 졸업요건이 갖춰진다. 이론상 한 학기에 3.5개만 들으면 되니까 널널해보이겠지만 사실 결코 만만치가 않다. 이유는 수많은 리딩과 세미나 때문인데, 지금부터 자세히 설명하겠다. 


1. (강의 전) 리딩, 리딩, 리딩...

과목 1개당 매주 필수 읽을거리(essential reading list)을 2~3개씩 던져준다. 보통 20페이지짜리 내외의 논문이나 저널들인데, 사회과학 저널의 특성상 정말로 난해한 내용인 경우가 허다하다. 어쩔 땐 글쓴놈이 마치 일부러 어렵게 쓰려고 애썼다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 1학기에 필수강의 2개와 통계학 강의 1개, 그리고 방법론 강의 1개를 수강했는데, 통계학과 방법론은 별도의 사전 리딩을 강요하지 않아 나머지 2과목의 읽을거리들만 읽었음에도 주중의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야만 했다. 

평일의 도서관.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겠지만, LSE는 유독 그 정도가 심한 것 같다는 게 학계의 정론(?) ㅠㅠ 


내 영어실력을 대충 공개하자면, 초중고대학교를 국내에서 성실하게 마치고, 약 9년 간 영어를 쓸 일이 1도 없는 방송국에서 일했으며, 영국 유학을 오고자 토익 900점 초반대 정도 실력을 급조해낸 정도다. 최근 수능 영어시험지를 보며, 진심으로 풀어도 1등급을 받을 자신이 없다고 느낀 정도의 실력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런 사람을 기준으로 논문 한 페이지를 읽기 위해선 평균 20분의 리딩 시간이 필요하다. 논문 하나가 대충 20장 내외니까 400분, 즉 논문 당 6시간 40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도 Full로 집중했을 때의 일이고, 중간중간 화장실 가랴, 화장실 가다가 친구만나면 수다 떨랴, 밥먹으랴 하다보면 그냥 하루에 논문 하나만 읽어도 매우 감사한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단순히 논문 자체를 읽는 시간만 계산한 것이고, 논문의 내용을 정리하는 시간은 카운트하지도 않았다). 


물론 2학기쯤 되면 여러모로 상황이 조금 나아지지만, 순수 국내파라면 누구나 1학기엔 멘탈이 갈려나갈 수밖에 없다. "10분만 걸어나가면 런던아이와 빅벤이 있는데, 난 왜 한국인지 영국인지도 모를 도서관에 앉아 거지같은 영문장들을 읽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이따금 인스타를 통해 인도 애들을 포함한 네이티브 스피커 친구들이 상대적으로 매우 널널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 서러움을 넘어 분노의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2. 가장 행복한 시간 - 강의 

의외로 강의는 매우 들을 만하다. 특히 사전에 리딩을 꼼꼼하게 한 후에 들어가면 교수님의 영어 강의 7~80%가 이해되는 매우 신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물론 리딩이 안 되어있으면 그만큼 영어는 잘 안 들린다. (소통하는데 배경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며, 강의가 잘 들린다고 영어가 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게다가 1학기는 학부생 전체가 함께 듣는 대형 강의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가장 유서깊은 강의실인 Old Building의 Old theatre에서 강의가 진행되는데 그것은 또 그것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노벨상을 받은 교수들이 논쟁을 벌였던 그 장소에서,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과, #어려운 주제의 강의를, #영어로 배우고 있는, #나 자신, 이라는 정말 오그라들지만 끊기 힘든 자아도취 때문에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LSE의 Old-building. 하이에크와 케인즈가 논쟁했던 장소가 여기였다는 카더라가? 


어쨌든 강의 자체는 나 같은 순수국내파에게는 가장 부담이 덜한 시간이다. 그나마 국내파가 잘하는 리딩과 리스닝 능력을 활용하는 시간인데다, 시간도 그렇게 길지 않고, 그나마 강의를 듣고 있으면 가장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짜 거지같은 좌절감은 대부분 강의 후에 있을 세미나에서 느끼게 된다. 


3. (강의 후) 자존감 파괴기, 세미나 

영국의 석사 강의가 한국 학부강의와 가장 다른 것은 매 강의 후에 개별 세미나가 있다는 점이다. 보통 그 강의를 진행한 교수님이나 다른 박사들의 주도 하에 10명 내외의 소규모 집단으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매주 배운 내용들을 가지고 소규모로 토론하고 발표하며 이론을 심화해나가는 과정이다. 


여기선 정말 화가날 정도로 네이티브 스피커들과 non-네이티브 스피커들의 퍼포먼스 차이를 느끼게 된다. 우선 non-네이티브들은 네이티브 스피커들이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조차 힘들다. 교수님이 말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말도 빠르고, 두서도 없는데다, 가끔 슬랭들까지 섞이는 때면 정말 뭐라 리액션해야할지 힘들 정도로 알아듣기 힘든 경우도 많다. 그래도 남들의 말을 듣고 있을 때는 그나마 낫다. 나름 알아들은 척 "리액션 인형" 역할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이윽코 "How do you think of it"의 서늘한 칼날이 나를 찌르는 순간 진땀나는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국어로 해도 쉽게 설명하기 힘든 개념들을 영어로 말하려고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하지만 사회는 매정한 법. 답변을 한 두 번 절게되면 누구도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난 암묵적으로 세미나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으로 분류되고, 이후엔 세미나부터 내가 앉은 테이블에 앉으려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결국 특정 테이블에는 나처럼 영어가 서툰 아시아인들만 모여앉게 되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데, 나는 거기서 깊은 분노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지나친 피해의식이었을지도). 

그나마 가장 즐거웠던 세미나 멤버들. 이런 걸 보면 어쩌면 영어가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지 않았을까. 



그렇게 멘탈이 가루를 넘어 분자 단위로 갈려질 때 쯤 학교는 Reading Week라는 중간 휴식시간을 준다. 총 11주로 구성되는 한 학기의 딱 중간인 6주차에 주어지는 Reading Week는 원래대로라면 그간 채 읽지 못한 논문들을 마저 읽어오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1주 간의 방학이지만, 누구도 그것을 Reading을 위해 쓰지 않는다. 대신 갈려버린 멘탈을 여행과 휴식으로 복구하고, 학기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나 역시 리딩위크 동안 짧은 여행과 함께 전반기에 드러난 몇 가지 짜증과 슬픔과 분노의 원인을 발본색원하기 위한 작전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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