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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망친 곳의 낙원 Sep 17. 2023

13. 학사 먹튀의 눈물의 영어 에세이

참고문헌 리스트만 봐도 성적이 보이는 이유

13주로 구성된 1학기가 끝나면 4주 간의 짧은 겨울 방학이 시작된다. 아름다운 런던의 크리스마스가 포함되는 기간이지만 대학원생들은 맘편히 크리스마스를 즐기지 못한다. 징글징글한 에세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 대학원은 대부분 에세이로만 성적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 부담이 상당히 크다. 더구나 학사시절 꿀을 찾아 실습과목만 잔뜩 수강했던 나란 놈은 제대로 된 아카데믹 에세이를 써본 경험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남보다 훨씬 혼란스럽고 불안한 방학을 맞아야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나처럼 학사를 날로 먹고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한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내가 영문 에세이를 작성하며 느낀 점과 몇 가지 팁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좀 재미는 없을 예정이다. (특히 전공 공부 쌉고수들은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누르시길..)


1. 에세이! '서론-본론-결론'으로 쓰고, '서론-결론-본론'으로 읽는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기-승-전-결', '3막 7장' 등, 내가 배운 글 구조의 대부분 이야기를 좀 더 매력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스토리텔링 기법들이었다. 난 콘텐츠를 만드는 프로듀서였으니까. 하지만 학문 에세이이나 논문은 반드시 'Introduction - Body (2~3개) - Conclusion' 구조를 따라야 한다. 제 아무리 발칙하고 도발적인 에세이라도 결국 저 구조 안에서 깝쳐야만 하는 것이다. 전 세계 어디 대학이나 연구소든 이 규칙에는 예외가 없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 논술시간에 닳도록 들은 '서론-본론-결론' 구조이긴 하지만 학문 에세이는 그 안에서도 몇 가지 더 세부적인 룰들을 따라줘야 하는데 이건 좀 길고 심각하며, 영양가는 있지만 재미는 없는 글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다음에 따로 한 섹션을 할애해서 쓰기로 하겠다.


반대로 자못 갑갑해보이는 이 룰 덕분에 우리는 매우 빠르고 효율적으로 논문들에 담긴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서론에서 어떤 문제를 다룰 것인지 파악하고, 결론에서 그 결과가 무엇인지 파악한 후에 내가 인용할 만한 연구겠다 싶으면 그제서야 본론에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읽으면 된다. 학생들마다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 에세이 한 편을 쓰기 위해 읽은 20여 편의 논문 중 전체를 읽은 에세이는 채 5편도 되지 않는다. 내가 받은 성적이 보통 B학점 정도에 해당하는 merit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평균적인 학생들은 보통 이 정도 수준에서 에세이를 쓰지 않는가 싶다.


2. 나의 의견 따윈 중요치 않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난 굉장히 허황된 상상을 하곤 했다. 예능 PD인 내가 발칙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가지고 에세이를 써내면 어쩌면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엄청난 관점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그렇게만 된다면 교수님도 "내가 추천서를 팍팍 써줄테니 제발 박사가 되어 학계를 빛내주게"라고 하시겠지...하는 뭐 그런 상상들.

내가 생각한 교수님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


그런 내게 영국 대학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한국인 형이 해준 얘기를 너무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난 말이야, 학생들 에세이 채점할 때 참고문헌 목록만 봐도 대충 그 에세이 수준과 점수가 다 보여." 당시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참고 문헌만 보고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글 사이사이에 스며든 나의 번뜩이는 재치와 입담을.


하지만 에세이를 두 세 번 쓰고, 그리고 교수님들의 피드백을 몇 차례 받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에세이에서 나의 의견이나 필력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그저 "내가 해당 이론에 대한 얼마나 많은 참고문헌들을 읽었는지"를 증명하는 글에 불과했다. 그리고 성적이 좋은 친구들의 에세이를 보면 비록 세부적인 내용이 다르더라도 거의 유사한 참고문헌 목록이 작성되는 소름돋는 발견을 하게 된다. 그 형의 말이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몇 차례 에세이를 더 제출하며 나는 에세이의 참고문헌이 스타크래프트의 테크트리와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치 '배틀크루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배럭→팩토리→스타게이트→사이언스퍼실리티' 따위의 필수적인 테크트리를 거쳐야 하는 것처럼, 특정한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름난 학자들의 그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논쟁한 몇 가지 논문들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그 과정은 배틀크루저의 테크트리보다 훨씬 다양하고 방대하지만). 결국 참고문헌만 보면 대충 그 학생이 그 이론을 잘 이해했는지 아닌지 사이즈가 나온다는 그 형의 얘기가 아주 틀린 말이 아니다.

'??? 왜 배틀크루저가 안 눌러지지?????'


결국 예전에 내가 상상했던 나의 모습은, 비유하자면 '팩토리도 생산 공장이니까 그곳에서 배틀크루저를 생산해보면 어떨까요!'따위의 글을 쓰는 매우 참신한 병신에 불과했던 것이다.


3. 파파고와 ChatGPT

이번엔 영어에 대한 문제다. 나 같은 토종 유학생들은 보통 영어로 1페이지 이상의 무엇인가를 작성하기가 매우 막막하다. 회사 다닐 적엔 너무 간단한 영문 이메일도 떠듬떠듬 쓰느라 허송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우리는 늘 'God 네이버'의 은총, 파파고를 이용해 왔다. 도저히 영작이 안 되는 문장을 척척 써내려가는 파파고를 보고 있자면 '정말 파파고만큼만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게다가 영 안 읽히는 논문들을 긁어다주면 한국어로 척척 번역해주기도 하니 정말 최고의 파트너다.


한편 2학기부터 혜성처럼 등장한 ChatGPT의 영어실력은 그야말로 놀랍기만 하다. 이 녀석은 문맥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문장을 매우 부드럽게 의역하기까지 한다. 때론 너무 사견이 많이 들어가서 곤란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 결과물을 읽은 '영국 친구들은 어떠한 문법적 오류도 없고 원어민이 쓴 것 같은 매우 매끄러운 문장'이라고 평가한다. 이 녀석이 몇 년만 일찍 나왔더라면 'Member Yuji' 따위의 오역은 나오지 않았을 지도.


하지만 이 두 녀석은 유학생에게 매우 치명적인 독이다. 바쁘다고 이 녀석들에게 너무 의존하면 영어실력이 아예 늘지가 않는다. 영어 실력이 늘지 않으면 더욱 그 녀석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악순환이다. 그러니 가장 좋은 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문법에 어긋나는 것 같아도 일단 자기 힘으로 영작을 하는 것이다. 영 안 되겠으면 파파고에게 약간의 힌트를 얻어가면서 말이다. 그 후 완성된 영어 문장을 ChatGPT로 가져와 "Correct the following sentence."라고 명령하면 의역없이 깔끔하게 문법적 오류만 잡아준다. 내가 봤을 땐 토종 유학생들에겐 이게 가장 이상적이고 정석적인 방법이다.


이걸 알면서도 ChatGPT를 거의 공동저자급으로 활용한 멍청한 나의 석사 생활은 비밀...


4. 인류 3대 발명품 종이, 바퀴, 그리고 ZOTERO

영국의 대학원에서는 학기 시작부터 표절과 인용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엄격하게 주지시키고 교육시킨다. 듣고보면 같이 베껴와도 인용 표기를 하면 박수 받고, 인용 표기를 안 하면 표절로 처벌받다는 내용이다. 아니, 베껴와도 잘했다고 박수받는 방법이 있다니?? 석사 나부랭이인 내 입장에서는 지금도 도대체 왜 인용을 안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될 따름이다. 한편으론 이 중요한 걸 우리나라 대학에선 왜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어쨌든 우린 본문에서 열심히 인용한 문장들을 에세이 제일 마지막에 [References(참고문헌)]으로 깔끔하게 리스트화 해야 한다. 인용을 하는 방식도 하버드, 시카고, APA 등등 여러 스타일이 있지만 그 스타일과 관계없이 무조건 알파벳 순으로 리스트화를 해야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앞서 누차 말했다시피, 학문 에세이 초보자였던 난 한 학기 내내 엑셀을 돌려서 본문에 인용한 참고문헌들을 알파벳 순으로 정렬하고, 그 이후에 추가로 무언갈 인용하면 "ABCDEFG~" 노래를 불러가며 기존 리스트 사이 사이에 채워넣곤 했다. 정말 븅신 짓이었다 ㅠㅠ


부디 여러분은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말고 대학원생을 위한 최고의 발명품인 ZOTERO를 이용하자! 사파리, 엣지, 크롬과 같은 인터넷 브라우저들과 MS워드와 함께 결합되는 확장프로그램인 Zotero는 인터넷 상에 있는, 또는 pdf로 다운 받은 참고문헌들을 자동적으로 저장해 스타일에 맞게 인용 부호를 달아주고, 특히 제일 마지막에 본문에 인용된 참고문헌들을 알파벳 순으로 자동으로 정렬해 생성해준다. 1초 만에 정말 마법같이 생성되는 참고문헌 리스트를 본 순간 한 학기 동안 내가 해운 븅신 짓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며 분노가 치밀 정도였다.


처음 사용방법을 익히는대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빠른 사람들은 10분, 아무리 늦어봐야 1시간이다. 당신이 투자한 이 짧은 시간이 결과적으로 당신에게 몇 십 배의 축복이 되어 돌아올지니 귀찮아하지 말고 무조건 Zotero를 설치하고 익혀두자. 아래 몇 가지 친절한 유튜브 사이트를 링크해두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PNNEFhgOlU (엔드노트? 멘들레이? No! 조테로(Zotero)로 참고문헌, 서지관리하자! 완벽 리뷰)

https://www.youtube.com/watch?v=S8A4_2kue4s (참고문헌 작성, Zotero(조테로)로 간편하게 하세요! 레퍼런스 수집부터 MS워드 논문 인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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