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3년 한국교류재단KF의 간행물 KOREANA 2023 가을편- Features에 기고하기 위해 작성한 원문입니다. 편집된 내용은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마르쉐는 도시 텃밭 활동을 하면서 만난 세 명의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살고싶지만 서울을 떠날 수는 없었던 사람들이 만나 서울의 어느 옥상에 텃밭을 만들어 꾸리고 있던 와중에 귀농귀촌, 농장직거래, 자연농, 토종씨앗 같은 것들을 주제로 수다를 떨면서 나온 아이디어가 마르쉐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 시장은 전국곳곳에서 재기발랄한 농부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 자기 밭과 부엌에서 정성껏 키우고 만든 먹을 거리들을 들고 나와 신나게 자랑하고 완판하고 돌아가는 꽤나 크고 활기찬 시장이 된 것이다.
마르쉐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에는 (당연히) 우리 모두가 전지구적으로 겪고 있는 고민이 있다.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살고 싶은 마음은 지구적인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다. 마르쉐가 추구하는 형태의 시장은 바로 파머스마켓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대규모 생산으로 인해 불거지는 지속 가능한 환경, 농업, 그리고 농부들의 삶에 대한 문제, 대규모 유통으로 인해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는 식품의 품질과 안전성 문제, 그리고 장거리 유통을 기반으로 하는 식품 산업이 사람과 음식과 지역사회를 단절시키고 있다는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책 ‘ 오래된 미래’의 저자로 유명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유능한 언어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로컬 퓨쳐스 Local Futures 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그녀는 “지속가능한 미래는 지역 경제를 살림으로서 시작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지역 중심 농업 체제가 복원돼야 지역 경제, 지역 사회가 회복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농업은 과거의 다품종 소규모 농업이다. 한 농장에서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고, 이 농작물이 지역 안에서 소비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지자체의 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우리나라 정부는 파머스마켓을 오래전부터 활성화하고 싶어했다. 지역 곳곳에서 열리는 전통시장을 상설화, 공영화하여 안착시키기도 했고, 비상설 파머스마켓 또한 지역 축제와 함께 꾸준히 개최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마르쉐처럼 소규모 농가, 다품종 작물, 자연스러운 비료와 농법을 지지할 수 없었다. 국가는 늘 다수의 입장에 우선권을 주기 때문이다. 정부가 주도하는 시장 프로젝트의 한계와 약점을 비영리 단체의 입장으로 풀어주고, 다양한 농업의 주제들을 매력적인 프로그램과 디자인으로 전달하고 있는 마르쉐는 우리나라 파머스마켓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마르쉐라고 하는 파머스마켓이 아직도 시민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더 많이, 더 빨리, 더 편하게’의 정서가 강하게 자리하는 ‘성장하고 싶은 나라’라는 욕망이 있다. 그리고 이 욕망의 그림자는 작은 농가의 다양한 농작물에 대한 가치를 평가절하 한다. 대규모, 강력함, 일원화에 대한 야망이 점점 커지면서 소규모, 역사와 전통, 장인, 오래된 것의 지혜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점점 한국의 근현대화에서 멀어지거나 박물관에 박제되었다. 작고 밀도높고 사방이 적이었던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마음이었다는 점이 이 현상을 부추겼다.
계속해서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은 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강력한 생존 전략이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을 무턱대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믿음과 그 믿음으로 인해 가려진 가치들 간의 갈등을 마주할 때마다 BTS의 리더 RM의 최근 인터뷰를 떠올리며 숨을 가다듬는다. “70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나라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한국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성장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성취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시적으로 풀어낸 그의 지혜에 모두가 감탄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일 것이다. 이 모든 맥락을 이해한 상태에서 바야흐로 지금부터 어떻게 해 나갈 수 있을 지에 힘을 실어야 할 것이다. 어째서 파머스마켓이 한국에서 더 많이 열리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민하던 에너지를 전환시켜서 지금부터의 활성화 전략에 쏟아부으면 될 일이다. 한국답게 말이다.
사실 이러한 에너지의 전환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식재료의 진정성을 기반으로 맛있고 건강하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점을 꾸준히 이어가며 인기를 얻고 있는 마르쉐에 수많은 러브콜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간 미처 소개하지 못했던 수많은 농가가 시장에 나오게 되었고, 더 많은 예비 농가들이 마르쉐와 함께하고자 땅을 가꾸고 있다. 작은 것들이 크고 강력한 힘을 함께 만들어가는 변화의 현장 속에 있음이 느껴진다.
국립극장과 만난 마르쉐는 매달 다양한 주제의 공연이 시장 안에서 펼쳐져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성수동에서 열리는 마르쉐에는 서울의 힙스터들이 형형색색의 장바구니를 들고 모여든다. 홍대 앞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열리는 마르쉐에는 자유롭고 진취적인 대화가 가득찬다. 많은 기업들이 마르쉐와 함께 시장을 열고 싶어 하고, 이들과 함께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하며 농부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우리가 모두 사실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안심이 들게 만드는 마르쉐의 활약이기도 하다.
물론 동시에 수많은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마르쉐가 단순히 즐길거리로 여겨지고 가볍게 소비되지는 않을지, 야채에 담긴 수많은 농사과정의 이야기가 과연 충분히 전달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오롯이 마르쉐의 몫으로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해나가려는 노력, 그 노력을 기반으로 성사되고 있는 다양한 단체, 기업과의 협업은 감격스럽기조차하다. 사실 자연농의 입장이 되어보면 세상에 너그러워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난관을 무찔러온 농부들이 세상으로 나오고 있고 대화에 응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는 커다란 사건으로 기록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새삼 자연을 대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의 힘과 포용력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고.
이렇게 마르쉐가 비영리 단체로서 오랫동안 지속되고 성장해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마르쉐가 지향하는 가치를 믿는 사람들의 강한 연결이 이 시장을 지탱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강력한 근거로 들 수 있다. 마르쉐라는 시장이 단순한 거래의 장을 넘어서서 연대감을 바탕으로 하는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선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르쉐는 ‘마르쉐 친구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마르쉐 친구들은 마르쉐의 기획과 운영을 담당하는 사람들인데, 사실 이들이 기획하고 운영하는 것은 시장 뿐만이 아니다. 이들이 연구하고 알리고 싶은 다양한 농업의 가치들을 전달하는 방식은 시장 밖에서도 끊임없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농작물이 어떻게 땅과 농법, 주변의 동물, 식물과 연결되어 있는지 소개하는 ‘채소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농부들과 농사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이 농가로 여행을 떠나 이야기를 나누는 ‘농가행’, 농부와 연결된 미식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농부, 요리사, 시민을 연결하는 ‘씨앗밥상’과 같은 시장 밖 프로젝트들 또한 마르쉐 친구들의 활동 내용인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 관계의 장이었던 본래 시장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삶의 토대를 이루는 먹거리를 통해 관계 맺고 대화하면서 단절되어 있던 삶을 다시 ‘연결’합니다. 우리의 다른 삶은 그곳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마르쉐가 2017년 지속가능성 보고서 ’말이 씨앗이 되다’를 발간하면서 정의한 마르쉐의 원동력은 ‘연결’이다. ‘삶의 중심인 먹거리, 먹거리를 둘러싼 생태계,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대화를 통해 도시와 농촌,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장을 펼친다’라는 마르쉐의 정의는 ‘먹거리를 통해 삶을 연결합니다’라는 비전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 사회는 지극히 관계지향적이다. 관계를 중심으로 모든 감정과 논리가 만들어지고 활성화된다. 때문에 농산물의 생산 방식과 유통 방식에 대한 기존 역학 관계를 인정하고, 재배치하고, 새로운 관계로 전환해가는 책임을 기꺼이 스스로 떠맡은 마르쉐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마냥 아름답고 평화롭지만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동시에 강하고 용감하다.
헬레나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협하는 대규모 대량 국제 무역의 비효율성을 알리고자 만든 영상의 제목은 ‘비상식적인 무역 insane trade’ 이다. 전세계 수많은 파머스마켓들과 우리의 마르쉐는 그야마로 ‘상식적인 sane’ 무역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제목이다. 매우 당연하며 지극히 일상적이어야 마땅한 시장을 가졌다는 점이 서울의 시민으로서 무척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