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치료를 받는 것에는 심리적인 저항감이 크다. 정형외과나 내과에서 치료를 받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선 훨씬 비용이 높고, 약이나 물리치료 같은 가시적인 “상품”으로 교환받는 것도 아니며, 한두 번으로는 효과가 체감되지도 않는다. 확연히 통증이 느껴져도 병원을 방문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기분이 처진다고 상담치료라니. 그 엄청난 기회비용을 치를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많지 않다.
흔히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하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피함으로써 우울감을 그 순간만 쫓아낼 수 있는 표면적인 해결책이었다. 불안감은 그런 미봉책조차 먹히지 않는다. 늘 심장이 요동치고 욱신거리며 작은 것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 일상이었다.
상담을 받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상담 선생님이 이런 시시한 광고 문구 같은 말을 했을 때 나는 당연히 의심했다. 그렇다 해도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시간당 8만 원은 나에게 엄청나게 큰돈이었고, 어떻게든 뽕을 뽑자(?)는 생각으로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마구 쏟아냈다. 그렇게 시작해서 10개월 정도 꽤나 긴 시간 치료를 받았고, 마지막으로 상담센터를 방문한 지 반년이 흘렀다. 지금은 선생님의 말이 허황된 약속이 아니었음을 이해한다.
요즘은 사는 것이 전반적으로 편해진 것을 느낀다. 별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도 없고, 기분이 땅을 치더라도 금방 반등한다. 내 근본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그걸 잘 이용하는 방법을 배운 덕이다. 내심 어지간해서는 상담을 받기 이전의 불안정한 상태로 회귀하는 것은 어렵다는, 어쩌면 섣부른 확신도 생겼다. 하지만 10년, 20년이 지난 까마득한 미래에 대해서는 나도 알 도리가 없다.
<어느 날 나는 그들이 궁금해졌다>의 저자 로버트 U 아케렛은 반대로 상담사의 입장에서 치료를 마친 내담자들이 결국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결말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아케렛 박사에게 있어서 ‘서재에 있는 모든 소설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뜯겨 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치료행위가 정말 효과 있었던 것인지 궁금했던 그는 30년이 지난 뒤의 내담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접 방문해보기로 했다. 이 책은 내담자들을 치료한 그의 수기와 이후의 방문기를 담고 있다.
심리 치료는 셜록 홈즈의 추리 쇼를 보는 것처럼 흥미롭다. 내담자의 미스터리 한 증상에 이어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트라우마가 밝혀지고 기발한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추리 소설의 구조와 같다. 매 챕터마다 각 내담자들이 호소하는 증상은 하나 같이 충격적이다. 그중 단연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북극곰에게 성욕을 느끼는 남자 ‘찰스’의 사례다.
찰스는 서커스 조련사 보조 일을 하면서 지로에게 사랑에 빠졌다. 그는 우리 안에 갇힌 지로와 가까워지기 위해 위험한 시도를 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아찔한 부상을 입었다. 왜 그는 그러한 이상 성애가 생겼을까? 뒤이어 밝혀진 찰스의 성장 배경에 그 원인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출신 대학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는데, 그곳의 마스코트가 바로 북극곰이었다. 온 집안에 북극곰과 관련된 물건들이 즐비했고, 생일이면 찰스는 매년 아버지로부터 북극곰 인형을 선물로 받았다. 특이하게도 이 집안사람들은 부부 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따뜻한 포옹과 같은 스킨십이 전혀 없었다. 유일하게 어머니와 신체접촉을 하는 경우는 털옷을 뒤집어쓴 그녀와 술래잡기를 할 때였다. 그녀는 아들을 붙잡으면 짐승의 흉내를 내며 배를 깨물었다. 상황이 이러니 찰스는 밤마다 품에 안고 잠에 드는 북극곰 인형에 강한 애착이 생겼고, 그는 급기야 그 인형으로 수음을 하기에 이르렀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과거에 이어 치료 방식도 예사롭지 않다. 상담은 좀처럼 진전이 보이지 않았고 찰스가 지로의 우리 안에 들어가 성관계를 시도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아케렛은, 찰스에게 지로와 성관계를 하고 싶을 때 ‘그녀’에게 진정제를 놓을 것을 권고했다. 당연히 찰스는 분노했다. 그는 지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아케렛의 요구는 그 사랑을 강간이나 다름없이 만드는 것이었다. 그 이후 상담소에 발길을 끊었던 찰스는 나중에 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나타났다. 아케렛은 불신과 분노에 가득 찬 찰스에게 마지막을 약속하며 놀랍고도 황당한 제안을 한다.
그리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찰스는 이상 성애를 ‘극복’했다. 30년 뒤에 아케렛이 다시 만난 찰스는 서커스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있었고, 곰이 아닌 인간을 아내로 맞이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치료는 성공적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떤 함정이 있다. 아케렛이 부단히 애를 써서 찰스의 곰에 대한 성욕에 제동을 걸 수 있었지만, 찰스가 인간과 성관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내는 결국 그를 떠났다. 아케렛이 기억했던 30년 전의 찰스는 담보로 목숨을 걸어두긴 했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열정으로 반짝거렸는데, 자신 앞에 선 현재의 찰스는 그런 반짝임이 사라져 있었다. 물론 이런 자기 파괴적인 사랑은 막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사례를 연구하는 것이 일반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라고 한다. 내가 찰스의 사례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은 상담치료는 역시 ‘포기’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몹시 중요하게 여겼던, 어쩌면 스스로의 본질에 가깝다고 여겨왔던 것들을 일부 쳐내야 한다.
내가 포기한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내 나름의 정의”가 있다. 그간 남자에게 지지 않으려고, 문화적인 것은 물론 물리적인 차이조차 좁히려고 노력해왔다. 애써 고정적인 성역할에 반대되는 행동을 고집했는데, 그건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봐도 피곤한 일이었다. 그런 사고방식을 오랫동안 고수해왔고 내 안에서 존재감이 컸던 만큼, 저버리는 데에는 굉장한 저항감이 있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신이 믿고 있는 정의를 지키기로 결정한 모든 사람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경한다. 하지만 심약했던 나는 신념보다 마음의 평화가 더 중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요는 상담 치료를 통해 어떤 가지를 쳐낼 것인지에는 내담자의 선택권이 있다는 것이다. 찰스는 발길을 끊을 수 있었지만, 결국 아케렛을 다시 찾음으로써 위험한 열망보다 자신의 생을 선택했다. 반대로 마지막 챕터의 내담자였던 소설가 사샤는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뒤틀리게 만든 자아도취적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 덕에 유수의 자전적 작품들을 남겼다. 상담사에게는 내담자를 기능하는 정상인의 범주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내담자에게 그것은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이다.
누군가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행복’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상담치료를 통해 내린 결론이다. 나는 창작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이름을 알리는 것에 대단한 집착이 없다. 아마 상담 선생님이 30년 뒤에 다시 나를 찾는다면, 지금처럼 범속하고 즐거운 생을 살고 있는 나를 마주치게 되지 않을까. 이 책에 등장한 모든 내담자들처럼 선생님을 만났던 것이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며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