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전쟁이 증명한 '정직한 야만'의 시대, 생존의 기록
돈을 빌려줄 때 차용증을 쓰고 공증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상대방이 나중에 딴소리할까 봐 걱정돼서입니다.
개인 간의 거래도 이런데, 국가 간의 약속은 오죽할까요? 특히 상대가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강대국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2025년 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과의 통화 후 마음이 더 불안해졌습니다. "협력이 잘 될 것 같다"는 좋은 말들이 오갔지만,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트럼프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내일 아침에 트위터(X)로 딴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외교적 '확인 도장' 받기 기술입니다.
젤렌스키는 미국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짐을 싸서 영국, 프랑스, 독일 정상들을 차례로 만났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미국과의 대화 내용을 공유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진짜 속내는 따로 있었습니다.
"자, 내가 미국이랑 이런 이야기를 했어. 너희들도 들었지? 너희도 동의하는 거지? 자, 여기 증인석에 서명해."
즉, 유럽의 주요 국가들을 '보증인'으로 세우는 작업이었습니다. 나중에 미국이 말을 바꾸려고 할 때, "어? 그때 영국이랑 프랑스도 다 같이 동의했잖아. 이제 와서 딴말하기 없기!"라고 따질 수 있는 근거를 만든 것입니다.
강대국과 1:1로만 약속하면 언제든 힘으로 뭉개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의 현장에 다른 힘센 친구들을 증인으로 끌어들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친구들에게 확인 도장을 받고, 여러 겹의 보험을 들어놓는 치밀함.
상대방의 '선의'를 믿지 말고, 상대방이 배신을 못 하게 만드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야만의 시대를 건너는 약소국의 서글프지만 확실한 생존법입니다.
[다음 글] 09화. 이중 전술: 악수하며 발 밟기, 대화하며 미사일 쏘기 (러시아의 압박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