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은행 대신 수학을 믿기로 했습니다 - 6

각국 중앙은행이 암호학자들의 코드를 읽기 시작한 이유

by Gildong

6. 법전의 틈새에서 피어나는 영리한 규제 공학의 시대


새로운 기술이 세상에 나올 때, 법은 흔히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특히 금융처럼 국가의 통제가 강력한 영역에서 기술은 늘 '불법'과 '혁신'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풍경은 조금 다릅니다. 혁신가들은 더 이상 법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법을 우회하는 대신, 법의 문구 사이를 세밀하게 파고들어 기술의 언어를 규제의 언어로 번역하며 법을 '재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야흐로 '규제 공학(Regulatory Engineering)'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혁신 기업들이 규제 기관과 벌이는 싸움을 보며 승패에만 주목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의 진짜 움직임은 훨씬 더 영리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재판에서 이기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제도권이 안심할 수 있는 틀' 안으로 밀어 넣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타협이 아닙니다. 2026년 기준 약 320억 달러 규모로 급성장한 레그테크 시장이 증명하듯, 규제를 기술의 일부로 수용하는 것이 곧 거대한 비즈니스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리한 생존 전략은 미래 금융의 표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제도권 자격의 직접 획득: 리플(Ripple)이 최근 미 통화감독청(OCC)으로부터 국립 신탁 은행(RNTB) 조건부 승인을 받아낸 것이나, 서클(Circle)이 유사한 신탁 지위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은 상징적입니다. 법이 가로막는다면 그 법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주권을 확보하는 정공법입니다.

규제를 시장의 필터로 활용하기: 미 의회에서 논의 중인 '클래리티 법안(Clarity Act)'은 입법 과정에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엄격한 기준은 어떤 기술이 '금융 인프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가려내는 첫 시험대가 됩니다. 규제는 준비되지 않은 경쟁자들을 걸러내는 단두대인 동시에, 그 기준에 자신을 '정렬'시킨 기술에게는 공인을 부여하는 보증수표가 됩니다.

코드와 법전의 설계적 결합: 이제 혁신은 개발자의 책상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법전의 빈틈을 찾아내고 개발자가 그 틈에 기술을 배치하는 '규제 설계'가 성패를 가르는 핵심 역량이 되었습니다. 규제를 피하는 팀이 아니라, 규제를 시스템 설계의 구성 요소로 포함시키는 팀만이 살아남는 시대입니다.


결국 미래의 금융 패권은 가장 자유로운 기술이 아니라, 가장 정교하게 제도권과 정렬된 기술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지루하고 복잡한 법적 공방들은 사실 새로운 금융 질서의 기반을 다지는 치열한 설계 과정입니다.


혁신은 이제 파괴가 아니라, 정렬(Alignment)을 통해 완성됩니다. 법전의 차가운 문구 사이에서 피어난 이 영리한 기술들이 전통 금융의 심장부에 닿는 순간, 진짜 변화는 비로소 시작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