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아직도 ‘건담’에 열광하는가 - 4

하사웨이의 비극과 자쿠의 모노아이가 2026년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

by Gildong

4. 영웅의 하얀색보다 강렬한, 악당의 붉은색


대중은 언제나 승리하는 영웅의 이름을 가장 먼저 기록합니다. 174만 명이 참여한 투표의 맨 앞줄에 아무로 레이의 ‘뉴 건담’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얀 장갑, 무결점의 성능, 인류를 구원했다는 숭고한 서사. 그것들은 ‘건담’이라는 제국을 지탱하는 가장 완벽한 기둥입니다.

하지만 삶의 중반을 넘어선 제 시선은 그 견고한 기둥을 살짝 비껴가 있습니다. 제 리스트의 최상단에는 영웅의 하얀색이 아니라, 그와 격돌했던 붉은 기체 ‘사자비’가 있습니다.


사실 제 리스트는 온통 붉은색입니다. 1위 사자비, 2위 샤아 전용 자쿠 II, 3위 시난주. 이른바 ‘붉은 혜성’의 궤적을 따르는 기체들이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아니 나는 주인공의 승리보다 패배한 자의 붉은색에 더 깊이 매료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이를 먹으며 영웅의 무결함보다 악당의 결핍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샤아 아즈나블의 처절한 고독과 뒤틀린 열망은, 매끈하게 완성된 최신형 건담보다 훨씬 더 인간적으로 다가옵니다.


‘병기’로서의 투박함, 자쿠가 건네는 위로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 있습니다. 대중의 순위에서 2위를 차지한 것이 가변형의 세련된 ‘제타 건담’이라면, 제 리스트의 2위는 40년도 넘은 구닥다리 양산형 기체인 ‘자쿠 II’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폭발하기 위해 존재하는 소모품에 불과하겠지만, 제 눈에는 그 투박한 질감과 거친 리벳 자국이야말로 우주세기라는 가상의 역사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거의 유일한 증거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연방의 ‘짐(GM)’이나, 사실상 기동병기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볼(Ball)’을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짠해집니다. 인기 투표의 화려한 상단과는 거리가 멀고, 때로는 전장의 소모품처럼 취급되지만, 이들의 연약하고 투박한 뒷모습은 전쟁이라는 비극을 가장 정직하게 증언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들에게서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특별한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매일의 삶이라는 전장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 전멸할 것을 알면서도 출격해야 했던 그들의 운명은, 어느덧 삶의 무게를 아는 중년의 우리와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부품처럼 소모되면서도, 끝내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몸으로 받아내던 그 굽은 등처럼 말입니다.


영웅은 시스템이 만들지만, 병기는 시간이 만듭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은 기계의 스펙이 아니라, 그 낡은 금속판에 스며든 전쟁의 냄새였습니다.


성능이 아닌 서사를 소유한다는 것

2025년 총선거에서 상위권을 점령한 기체들은 분명 경이로운 성능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수치들이 제 마음을 흔들지는 못합니다. 사실 제 건담에 대한 기억은 「역습의 샤아」 언저리에서 멈춰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낡은 지식이겠지만, 저에게는 가장 밀도 높은 서사만을 정제해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100위권 밖으로 밀려날지언정 제 마음속 10위 자리를 꿋꿋이 지키는 ‘즈고크’, 그리고 리스트의 가장 끝자락에 겨우 이름을 올린 ‘짐’은, 제게 성능 수치가 아닌 그 시절 그 기체를 보며 설렜던 나 자신의 서사를 이야기해 줍니다.


기업이 설계하는 효율의 시대에, 우리는 자쿠처럼 자꾸만 비효율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3배 빠른 성능보다 3배 더 짙은 슬픔을 간직한 붉은 기체에 열광하고, 우리 아버지들을 닮은 이름 없는 양산형 기체들의 뒷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속 1위는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정해준 1위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상처와 닮아 있는 당신만의 1위입니까. 제국이 된 건담이 우리에게 스펙을 강요할 때, 우리는 조용히 자신만의 ‘구닥다리’ 기체를 꺼내 보아야 합니다. 그곳에 진짜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