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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06. 2021

쓰기는 지성으로

나는 써야하는 사람이다

지성적이라는 것...

그건 거리 두기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감정을 건드리는 어떤 사태와 마주쳤다. 내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글을 쓰려면 지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지성은 감정에 거리를 두고 수습하는 능력이다.


감정은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살아있는 한 심장이 뛰듯, 감정은 그렇게 동일하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감정과 거리 두기'란 그렇다면 가능한 것인가. 감정을 단일한 것으로, 고정된 실체로 뭉뚱그려서 보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감정은 움직인다는 사실, 코미디를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현재 나를 폭발시키고 있는 이 감정을 잊을 수 있다는 사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감정과 거리를 두며 살아가고 있긴 하다. 코미디를 보겠다, 맛있는 것을 먹겠다는 결정이 지성적인 일인 것이다. 그러나 미약한 지성이다. 잊는다는 것은 미봉책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감정과 거리 두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지성적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글 쓸 때 아주 고약스러운 처음 단계가, 쓰고싶은 소재에 대해 얼만큼의 거리를 둘 수 있는가 가늠하는 일이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 써야지 할 때, '그것'은 그것이 나에게 일으킨 일종의 소용돌이, 한 마디로는 끝나지 않는, 펼쳐놓아야만 조금 근접할까 싶은 아주 모호한 '느낌'이다. 그런데 그것을 붙잡아 쓰고 싶은 것이다. 


느낌이란 태생적으로 언어화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느낌에 집 한 채를 지어주는 것과 같은데, 집을 지으려면 혼동된 이 느낌을 나무 기둥, 철 골조, 시멘트로라도 나누어야 가능하지 않겠나. 나눈 다음에라야 성냥갑 같은 아파트를 짓던, 전원주택을 짓던 할 것 아닌가, 건축예술가라면 내가 예측하지 못한 형태의 집을 짓겠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는 자신의 "소설을 다양한 상념들의 우연이라는 실타래로 엮은 회상록 정도"로 여긴 당대의 평론가들에 대해 조소를 날린다. "그들은 진리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차에 적신 마들렌 부스러기들이 내게 잃어버린 시간을 상기시키는 장면 등을 인용한다"라고. 그리고 "문학평론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미지들, 생각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관계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볼 수 있는 감각을 보유한 상태를 광기라고 불러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도 말한다. (마르셀 프루스트, <플로베르의 문체에 관하여>에서)


(내가 모호한 느낌이라고 쓴) 이미지나 생각들의 복합물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정확히 볼 수 있는 감각을 나는 거리 두기 능력이라고 칭했다. 모호함이 글이 되려면 어쨌거나 그 모호함을 지성적으로 파악 가능할 때다. 프루스트는 소설가의 작업을 광기라고 말하는 것에 반대했다. 때때로 천재성과도 같은 의미로 쓰이는 광기는 글쟁이들의 지난한 노고를 폄훼하는 말이다.


[소돔 120일]을 쓴 사드를 가리켜 미치지 않고는 이렇게 쓸 수 없을 거라 말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아마 그는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미쳐있지 않았을 것이다. 미쳐서는 쓸 수 없다. 쓰는 일은 광기와는 완벽히 반대되는 일이다. 광기와 쓰는 일이 관계가 있다면, 쓰는 일을 추동하는 힘이, 그 자체가 광기였을 것이다.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힘. 


그러나 쓰기 자체는 극도로 지성적인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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