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자 1과의 추억 1.
"학교에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첫 만남에서의 인상이 어땠는지는 미미하지만, 그가 이 질문을 했던 순간은 이상하리 만치 기억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내가 연두색 트위드 재킷을 입고 있었으니 초가을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카키색 재킷에 네이비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겨울을 제외하고는 늘 이 옷차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상당히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지만 - 180 센티가 넘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약간의 곱슬기를 가진 짙은 금발 머리, 푸른색과 녹색의 중간 쯔음 되는 에메랄드 색의 눈, 그리고 반듯하게 남자답게 생긴 얼굴까지 - 그를 알게 된 초기에 모든 장점을 제쳐두고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딱 한 가지였다 - 뒤로 질끈 묶은 짜리 몽땅한 꽁지머리. 그 꽁지머리 때문에 나는 그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까칠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인들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수더분함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기꺼이 피아노 연습실이 있는 음대 건물로 그를 안내했다. 나도 취미로 피아노를 쳤기 때문에 자주 들리는 곳이었다. 우리가 만난 공대 건물에서 음대 건물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낙엽이 지는 나무 아래에서 책을 보는 다른 학생들에게 잠시 눈길을 주며, 우리가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한 친근감을 나누며 걸었던 그때의 느낌 - 약간의 설렘 - 은 지금도 선명하다. 햇빛에 잘 말려 뽀송뽀송한 이부자리에 처음 들어갈 때의 느낌? 비가 온 뒤 촉촉하게 젖은 공기의 신선한 향기를 맡는 느낌? 주말 아침 여유 있게 준비하는 커피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 같은 느낌? 그러니까 특별하지는 않아도 괜스레 기분 좋게 만드는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그때의 느낌은 그 이후로 더 자세히 알게 된 그의 매력과, 그 이후로 우리가 함께 나눈 시간들 덕분에 실제보다 더 미화돼서 기억될 수도 있다. 그때가 적당한 추위에 누군가의 온기가 기분 좋게 느껴지는 가을이었다는 것도 아마 한몫했을 것이다.
음대 건물에 도착했을 때 빈 연습실이 없어서 피아노를 쳐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곳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했다. 문득 그의 손이 (아마도 대어 보면) 내손의 두배 정도는 될 만큼 크다는 것을 깨달았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어떤 음악을 연주할지 조금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도 나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음대 건물을 나와 공대 건물로 돌아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올 때와 똑같은 거리와 친근감을 두고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