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한산하고 북적한 가을 제주 남원 기록
1일 차
전형적인 무계획 여행자인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본 숙소를 예약하고 제주도로 향했다. 오후에 일정이 있어 저녁 5시 비행기를 예매했는데 1시간가량 연착이 됐고 기다리는 동안 숙소를 검색해 보니 공항에서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때마침 숙소에서 밤 10시 이전에만 입실이 가능하다는 문자가 왔다. 7시 도착이면 그 안에는 무난히 가겠지 싶었지만 내 눈앞에서 배차 간격 1시간이 넘는 버스가 떠나버리는 바람에 다음 배차 시간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10시 몇 분 전에 세이프해 도착하니 무서운(?) 인상의 주인장님이 전화하려고 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셨다. 직원분을 따라 방을 안내받았는데 전체적으로 청소가 되어있지 않아서 "내일은 해주시나요?"라고 물으니 "몇 박 묵으세요?"라고 다시 물어 "3박 4일이요." 했더니 "해드려야죠!" 하고 나갔다. 연착된 시간에 숙소에 대한 리뷰를 쓱 보니 청소가 아쉽다는 글이 몇 개 보이긴 했는데 정말이군. 뭐 그래도 도미토리에 저렴한 가격이고 예약기간 동안 혼자 쓰니 하나하나 지적하는 게 더 이상하다는 걸 알아서 (과거 제주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한 전적이 있다.) 간단한 쓰레기만 치워준다면 감사한 조건이라 더 이상 군말 하지 않기로 했다.
짐을 풀고 씻고 자리에 누우니 벌써 잘 시간이 되었는데 잠이 오질 않아서 유튜브나 올릴까 싶어 혼자 주절 주절대며 영상을 찍다가 영 내용이 재미없는 것 같아 끄고 내일 해야 할 일을 새벽 5시까지 했다. 이번엔 여행이라기보단 출장차 온 거라 사실 3박 4일 동안 꼬박 일을 해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존과 다른 장소가 주는 환기 효과가 있는지 마음은 편안했다.
2일 차
2일 차 아침. 한참 잔 것 같아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침 9시였다. 나이가 들고 최소 수면시간은 지키는지라 더 자야 한다는 생각으로 눈을 감았고 한 시간 뒤에 일어나 대충 씻었다. 짐을 가볍게 다시 정리하면서 어제 입고 온 티셔츠를 보니 사람이 입을 수 없을 정도로 해져있었다. 이걸 어떻게 입고 돌아다닌 거지. 나는 한번 산 옷은 거기다 마음에 드는 옷은 구멍이 뚫려 삭을 때까지 입는다. 아니 옷뿐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오래된 것이 많다. 하지만 넌 이제 수명을 다했구나. 짐도 줄일 겸 의류수거함에 버려야겠다. 싶어 캐리어에 대충 던져놓고 제주도에 오기 전 대여했던 카메라를 둘러맸다. 누군가 대여를 하다 렌즈 뚜껑을 분실했는지 처음 올 때부터 뚜껑이 없는 상태라 아 이거 흠집안나게 조심해야겠는걸. 생각하며 어디 부딪히기라도 할까 조심히 다뤘다.
나가기 전 커튼을 걷어보니 숙소 바로 앞에 바다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풍경 좋네. 하고 잠시 지켜보다 지난 새벽에 핸드폰으로 검색해 찜해놓은 한식집으로 향했다. 버스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었는데 사실 이동 없이 숙소 근처에서만 짱 박혀 있을 생각이었지만... 근처에 가볍게 먹을만한 한식집이 없었고 가격도 비싼 편이라 검색해서 찾은 곳이었는데 덮밥을 좋아하는 나는 음식 사진을 보자마자 여기다. 싶어 일어나자마자 봐둔 식당으로 향했다.
내가 시킨 메뉴는 흑돼지간장덮밥. 마늘 후레이크가 섞여 있었고 곁들여진 구성도 마음에 들었다. 오는 동안 목이 말라 가볍게 한잔이 마시고 싶어 맥주를 시켰는데 500ml 병이 나왔다. 요즘엔 300ml에도 7000원에서 10000원까지 받는 곳도 있는데 괜찮은 곳이군. 혼자 흡족해선 금방 밥과 맥주를 뚝딱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점점 손님이 몰려와 테이블을 채우길래 얼른 일어나선 계산을 하고 나왔다.
밥도 배부르게 먹었겠다. 근처의 카페를 검색해 보니 카페숑 이라는 곳의 평이 좋았다. 10년째 들른다는 리뷰가 눈에 띄었고 걸어서 5분 거리길래 산책할 겸 걸어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작아서 2시간 정도 머물 작정이었던 나는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중 사장님이 주문받는다고 얘기하셔서 그래. 풍경 구경 잠깐하고 일어나자 싶어 라테를 시켰다. 그 뒤로 들어온 사람들이 주문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 집의 시그니쳐 메뉴는 따로 있는 듯했지만 워낙 시그니처와는 담쌓고 사는 사람이라 카메라로 예쁜 인테리어를 몇 장 찍고는 다음에 갈 카페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숙소로 다시 돌아가야하니 숙소 근처에 대형 카페가 없나 찾아보니 새로 생긴 스타벅스가 있었다. 그걸 검색하는 동안 어느새 손님이 꽉 찼다. 자리를 비켜줘야겠다 싶어 일어나 조용히 나와선 스타벅스로 향했다. 혼자 있으니 심심하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내가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동영상으로 내 모습을 찍으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뒤에 사람이 가까이에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뭐가 재미있다고 혼자 깔깔 웃으며 떠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봤겠다. 싶었지만 프로 유튜버인척 태연하게 행동했다.
12분 정도 걸으니 2층짜리 스타벅스 건물이 나왔다. 사람도 적당하고 청량한 바다가 보이는 곳. 이곳에 죽치고 앉아 새벽에 끝내지 못한 서류 작업을 했다. 4시 쯤되자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가야겠다. 여전히 작업을 끝내진 못했지만 90%는 해놨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섰다. 카페에서 숙소를 찍어보니 도보로 25분이라고 찍혔다. 왜 난 15분 거리라고 생각했던 거지? 운동할 겸 걸어가자 싶었지만 한 10분쯤 걸었을 때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 등딱지엔 노트북과 카메라, 노트, 배터리가 든 가방이 붙어있었다. 아냐. 긍정적으로 생각해. 15분만 걸으면 돼. 해안도로를 따라 좋은 풍경을 보면 고통이 가실 거야. 하는 생각으로 걷기 시작했지만 끝은 보이지 않았다.
뭐 그래도 걷다 보니 끝이 나오긴 했다. 휴. 어느덧 시간은 저녁 6시. 걷다 보면 배가 고플 줄 알았지만 고프지 않았다. 아침부터 맥주에 카페를 2군데 가서 물배가 찼나 보다. 그렇다고 배고플 때까지 시간을 때우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음료 배와 밥 배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 나는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른 뒤에 근처의 로빙화로 향했다.
사람이 없으면 남은 작업을 하려고 했지만 저녁시간이라 손님들로 북적였고 식사만 하고 자리를 떠야겠다 머릿속으로 계획 변경을 한 뒤 마침 자리가 난 창가석에 앉았다. 먹다 보니 금방 배불러졌지만 간밤에 배가 고파질 것을 우려해 어떻게든 배 속에 집어넣으려고 노력했다. 편의점이 숙소 근처에 없었기 때문에 어제도 배가 고파져 굶주림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이어트가 되긴 했다.
맛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다시 돌아와서 지금은 오늘의 소회를 정리할 겸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꽤나 실시간 여행 기인 셈이다. 오늘은 일찍부터 잠이 온다. 꽤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나 보다. 내일은 뭘 할까 생각하다 보고 싶은 것보단 뭘 먹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했다. 1인 해물정식을 파는 곳이 있던데 거길 가볼까. 점심때쯤 가는 게 좋겠다. 막연히 계획을 세우곤 일찍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