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려 살기를 선택한 교회

by 광규

코로나로 분산하던 한해가 절반이 지났다.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이전의 생활은 어느덧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백신이 보급되며 제자리로 돌아갈 희망을 꿈꾸는 이들이 있지만 여전히 어려운 현실이다.


자영업자들에게 특별히 타격이 컸던 코로나의 여파는 교회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개신교의 목사들은 동일업종간의 빈부격차가 극심하다. 한마디로 잘되는 곳은 수많은 인파를 불러모으며 주말에 은행이 문을 열게 만들만큼의 영향을 행사한다. 그러나 당장 생계 유지가 않되는 개척 교회는 오늘도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사라진다. 오직 새벽부터 밤까지 눈물 흘리며 목청 터지게 기도하던 가난한 목사의 목소리만이 쓸쓸하게 울렸다 사라지곤한다.


현실은 씁쓸하다. 패배자는 기억되지 않으며, 종교계라고 그것이 다를 것이 없다. 세상과 구분된 거룩함을 논하는 이곳에서 세상과 똑같은 논리로 사람을 판단하고 승패를 가른다. 사실상 구분된적 없음을 자백하는 위선조차 행하지 못하던 추한 민낯을 드러내는 꼴이다. 경제논리로 지배당하는 세상에서 교회는 대형과 소형으로 나뉘어졌다. 하나된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적 교회, 사도적교회를 외치던 이들의 목소리는 폭우를 만난 횃불 처럼 사그러 없어졌다. 복음의 논리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아야한다 주장했던 이들은 조용히 사라졌다. 똑같은 말을 휘황 찬란한 강단에서 토해내는 이들은 오늘도 박수와 아멘을 복창하는 회중의 환호 속에 교리를 설파한다. 오랜 전통과 신학자의 숙고로 정돈된 교리보다는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풀어내는 일종의 썰풀기 시간이지만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은혜를 받았다며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신을 찾았다. 기도를 할땐 주여 세번을 열창하며 부르짖지만 나는 성공했노라 간증할 수 있는 이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그들이 말하며 믿는 복은 한정된 자원이라서 누군가 거머쥐면 누군가는 쪼들릴 수 밖에 없는 재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편적 복음과 그것을 동일시했다.


인기가 권력이 되었고, 신성을 모독하는 목소리를 이단이라 규정하기를 망설였다. 개혁을 퇴행하는 교회가 정의에 주저하는 것은 이젠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그렇다. 교회는 엎드려 살아남기를 선택했다. 스스로 주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죽었노라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맘몬의 발등상에 드러누워 배를 까고 낑낑대는 들개와 다를바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공공의 적을 만들기 시작한다.


스스로 지키는 구절은 어느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2천년 전의 문자를 그대로 따와 이것 저것 따지며 정죄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들보다 약했고, 그들보다 작은 권력과 목소리를 가진 이들이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드높은 말씀의 권위와 철퇴로 죄인의 숨통을 끊었다. 그리고 예배당에 정장을 빼입고 들어와 읊조렸다. 아멘 아멘… 나는 말씀 앞에 떳떳하지 못하여 주의 은혜에 기대어 간신히 살아갈 뿐이었다.


영광스러운 주의 자녀는 비굴한 개가 되었다. 벼룩 처럼 좀먹고 황충이 처럼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예수가 찾고 함께 거닐던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교회는 살아남았다. 억척 같이 살아남는 중이다. 맞서 싸우며 살아남지 않았다. 열심히 싸우고 있긴한데 알고 있잖은가 주의 이름으로 거병했던 그 옛날의 군대는 옛적에 엎드러져 백골조차 남기지 못한채 풍화 앞에 바스라졌다.


나는 신이 교회의 편이란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교회가 신의 편에 서기 위해 악착 같이 메달리며 싸워야한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편에 서려면 우리도 사랑을 해야하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한다. 그게 믿음이며 그게 거룩이다. 일어서서 싸워라 그러다 죽어야 그 생명을 우리가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