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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은 Jan 15. 2021

작은 아씨들과 티모시 샬라메

작은 아씨들

여자는 불완전한 남자다.


고대 그리스를 관통하던 정신이다. 시대는 죽었으나 문명은 망령처럼 떠돌아 내 어깨를 흔든다. 너는 반쪽짜리. 생의 아름다움은 네게 주어지지 않는 것. 세상 모든 여자들을 휘청이게 한 폭풍 같은 속삭임이 아닌가.


고대 그리스는 여자를 수동적이며 결핍된 존재로 봤다. 여성은 오직 에로스적 본능만 가진 욕망의 대상이었다. 보다 더 인간적인 관계 - 이성과 지성, 감성과 육체는 남자들의 사랑에서만 허락됐다. 이 모멸적인 정신을 담고 있는 영화가 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그리고 티모시 샬라메.


티모시 샬라메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를 연기했는데 엘리오는 대학원생 올리버와 사랑에 빠진다. 두 남자는 언어와 예술, 철학과 음악을 이야기하며 서로를 탐색한다. 이성과 정신의 교감, 플라토닉의 시작이다. 한 시점에서 엘리오는 여자친구 마르지아와 관계를 가지지만 그것은 오직 리비도의 분출일 뿐이다. 마르지아는 헐벗고 신음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널 부를게


이후 서로에게 빠진 두 남자는 이 영화를 상징하는 대사를 읊으며 에로스적 교감을 나눈다. 플라토닉과 에로스의 찬란한 합일은 남자들에게만 허락된다는 것.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고대 그리스의 스승과 제자, 성인남성과 소년의 동성애를 실현하며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남자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여 이 정신은 언제든지 티모시 샬라메, 그 이름을 앞에 내세우게 할 것이라고. 따라오는 여자들의 성취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여자에게 사랑이 전부라는 말 지긋지긋해요


로리는 조의 감수성을 사랑했지만 그 영혼에 담긴 빛나는 야망과 재능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아씨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랑을 거부한다. 여자는 가정 내에서만 존재하며 이성적이지 않다는 시대정신 아래에서 반쪽짜리 사랑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사랑은 오직 감정과 욕망으로 작동하기에 사랑에 내 영혼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없다면 차라리 돌아서겠다는 냉정한 결단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교수는 조에게 현실적인 한계를 떠나 당신이 쓰고 싶은 글을 써라고 조언한다. 그는 조의 영혼에 귀를 기울였다. 원작이 쓰이던 시대적 분위기가 조의 사랑을 완성시켰겠지만, 그 속에 나름의 저항이 있었음을.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여성을 단정한 숙녀에서 해방 시키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말 그대로 여성을 성별이나 특별한 객체로 구분하지 않았다. 때로는 대접받는 삶을 바라지만 결국 제 영혼이 향한 가난한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인 첫째 메그, 야심과 재능이 주는 기쁨과 좌절을 느끼고 상실에 슬퍼해도 언제나 펜을 다잡는 둘째 조, 누구보다 강하고 선량한 영혼으로 짧은 인생의 나날을 의연하게 보낸 셋째 베스, 가족과 자신을 위한 이상적인 현실을 택했으나 감정이 밝히는 불을 마주할 용기를 가진 막내 에이미.


이런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는 불완전한 남성에게는 없는 것.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오직 인간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 고전의 커다란 성취다.


하지만.. 너무 외로워요


여자에게는 생각과 영혼, 야심과 재능이 있다며 울분을 토하던 조는 사랑이 전부라는 말이 지긋지긋하다며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내 마음을 울린 것은 그의 마지막 대사, 외로움이었다. 이보다 더 인간적인 고백이 있을까. 이성과 감성으로도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근원적인 외로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초의 슬픔이 아니던가.


외로움 앞에서 조는 로리의 청혼을 거절한 게 잘못이었고, 결혼을 하는 게 정답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가 그랬듯이 후회 속에서 새로운 답을 찾아낼 수도 있다. 외로움을 끌어안고 다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다.


네 자매의 이야기로 알 수 있듯 인생은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과 동시에 슬픔도 준다. 그렇기에 <작은 아씨들>은 말한다. 여성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이성의 해방만이 아니라고. 가슴 뛰는 설렘을 느끼고, 현실에 분노하고, 상실에 대한 슬픔을 느껴라. 살아있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총체를 외면하지 말라. 감정은 이성의 불꽃이며 이성은 또 다른 전율을 만들어내기에. 그것이 바로 다시 쓰인 <작은 아씨들>이 전하는 메시지다.



나는 고난이 많았기에 즐거운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앞으로도 우리의 성취 앞에 티모시 샬라메의 이름이 먼저 쓰일 것이다. 또 다른 남자의 얼굴과 이름이 자매들에게 소리칠 것이다. 불완전한 남자여, 네게 생의 아름다움은 주어지지 않는다고. 그래서 루이자 메이 올컷은, 조는, 그레타 거윅은 이렇게 썼다. 충만한 이성과 타오르는 감정은 생의 선물이기에 그는 폭풍 속에서 글을 썼다. <작은 아씨들>이 보다 더 아름다운 까닭은 휘몰아치는 그 폭풍 속에서 죽지 않는 또 다른 정신을 낳았기 때문이다. 글로, 영화로, 잠들기 전 동화로 자매들의 등을 받치며 때로는 희미하고 때로는 천둥같이 속삭이겠지.



완전무결한 인간아, 네 삶의 모든 것을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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