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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은 Jan 11. 2021

무기가 된 영화

레 미제라블

작년 칸 영화제의 뜨거운 감자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만이 아니었습니다. 레쥬 리 감독의 장편 데뷔작 '레 미제라블'을 보았냐는 말이 영화인들 사이에서 인사말처럼 주고받아졌지요. 화제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이 영화는 그 해 심사위원상을 거머쥐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대서사시 <레 미제라블>의 상징성을 따왔지만 이 영화는 소설의 현대적 각색이 아닙니다. 오히려 2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몽페리메유의 비참한 삶을 절실히 대변하는 지금 이 순간의 기록이지요. 그렇기에 2019년의 '레 미제라블'은 그곳에서 나고 자란 레쥬 리 감독의 자서전이자 변화를 향한 무기입니다. 영화 후반 부의 클라이맥스는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1995년작 <증오>에 담긴 공포와 예언을 환기합니다. 비탄스럽게도 폭력과 빈민, 차별과 혐오에 의한 절망의 고리는 20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계속됩니다. 2005년 프랑스 소요 사태와 감독의 유년시절에 영감을 받은 이 영화 '레 미제라블'은 변하지 않을 세계에 관한 묵시입니다.


2018년 7월 파리의 개선문 광장 앞.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 소식에 하나가 된 파리 시민들 사이로 파리 외곽 도시 몽페르메유의 아이들이 환호하며 들어선다. 그리고 다시, 몽페르메유. 지역 강력반에 합류한 신입 스텐판(다미엔 보나드)은 크리스(알렉시스 마텐티), 그와다(지브릴 종가)와 팀을 이룬다. 스테판은 이들과 함께 지역을 순찰하며 주민들과 경찰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을 감지한다. 그러던 중 집시들이 운영하는 서커스 단의 새끼 사자 한 마리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스테판과 동료 경찰들은 용의자인 흑인 소년 이사(이사 페리카)를 추적하고 그중 심각한 폭력사태가 벌여진다. 더욱이 경찰들은 그 광경이 동네 아이 버즈(알 하산 리)에 의해 드론으로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공포에 휩싸인다. 영상 데이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경찰들과 먼저 영상을 입수해 경찰들을 협박하려는 지역 내 권력자들의 갈등이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폭력에 다치고 이용된 아이들의 분노 역시 극에 달하는데. 이들의 분노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경고대로, 폭력의 화염이 또다시 이곳을 뒤덮는다.


소설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기도 한 몽페르메유는 파리의 방리유, 즉 우울한 변두리 빈민가입니다. 북 아프리카 말리 출신의 이민 2세 레쥬 리 감독이 나고 자라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대다수의 방리유가 그러하듯 이곳 역시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무슬림 이민자들과 이방인들이 폐쇄적으로 살고 있는 "게토"입니다. 폭력, 실업, 매춘, 마약, 인종차별로 얼룩진 이 소외지역의 주민들은 공권력으로부터 외면당하고 폭압적인 통제를 받아왔습니다. 레쥬 리 감독이 어린 시절 카메라를 잡은 이유 역시 지역 사회의 고통과 경찰들의 과잉진압을 포착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일까요. 그는 자신의 첫 장편 데뷔작 '레 미제라블'에서 드론 촬영으로 참상을 기록하는 소년 버즈 역에 자신의 친아들을 캐스팅해 자신의 유년시절을 투영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전체가 내 인생, 내 역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마치 자서전 같다"는 레쥬 리 감독의 말처럼 '레 미제라블'은 르포르타주 형식의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어린 레쥬 리에게는 비참한 삶을 포착해 고발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막이었겠지요. 그러나 그가 영화 제작자의 꿈을 가진 17살부터 중년이 된 지금까지, 카메라는 이제 그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폭력과 차별에 저항하는 굳센 몸부림으로 말입니다.


'레 미제라블'의 오프닝 시퀀스는 월드컵 우승으로 들끓는 애국심에 단결된 프랑스 시민들을 보여줍니다. 삼색기 아래에 넘실거리는 국가 제창은 영광스럽기까지 합니다. 몽페르메유 아이들 또한 시민들 속에서 목이 터져라 국가를 부르고 환호하지요. 프랑스의 승리를 상징하는 개선문 위로 떠오르는 '레 미제라블'의 타이틀은 혁명의 승리를 외치는 역사 속 인민들을 재현합니다. 하지만 월드컵 우승은 혁명이 아니고 승리는 이들의 것이 아닙니다. 오직 축구 아래에서만 단결이 되는 이 시대 인민들의 모습은 '레 미제라블'의 비참한 의미와 맞물려 모순을 더합니다. 스테판이 지하철에서 내려 몽페르메유로 들어가는 이다음 장면은 관객을 곧장 환희에서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소외와 증오의 세계에서 되짚어보는 오프닝 시퀀스의 영광과 솔리다리티(solidarity)는 얼마나 공허한지요.


지역 강력반에 합류한 스테판은 몽페르메유의 외부인으로 영화 밖의 관객들과 같습니다. 공권력을 경멸하는 주민들과 동료 경찰들의 질 낮은 농담과 폭력적인 행동들은 그를 얼빠지게 합니다. 영화는 시종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스테판의 얼굴을 비추고 그의 시선을 통해 몽페르메유의 실상을 고발합니다. 느닷없이 내 삶에 침범한 폭력과 부조리 앞에서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묻는 회중전등이기도 하지요. 그에 반해 크리스와 그와다는 몽페르메유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베테랑이자 폭력적인 생태계가 체화된 인물입니다. 크리스는 폭압적인 불심검문과 인종차별을 일삼고 그와다는 몽페르메유 출신의 무슬림 이민 2세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사정에 무신경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동일한 인간들의 반죽에 섞여 든 무지가 악을 만들고, 그 무지는 사회의 방만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레 미제라블'이 짧은 대사나 쇼트를 제외하고는 인물들의 사연에 매달리지 않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크리스의 악행, 그와다의 분노, 스테판의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이들이 특별히 나쁜 인간이자 경찰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스테판이 어떤 경찰 공무 교육도 받지 않고 위험지역에 투입된 것처럼 이건 교육의 부재이자 무지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대문호가 결의에 차 쓴 것처럼 이들은 사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암흑인 것이지요.


동네 아이 버즈의 드론 촬영으로 부감되고 핸디캠으로 치밀하게 추적되는 몽페르메유의 생태계는 폭력에 의한 폭력 그 자체입니다. 지역 내 상권을 주무르는 시장(그는 자신을 시장이라고 칭합니다)과 무슬림 세력들, 집시들, 마약 밀매꾼들과 경찰들의 세력 다툼이 그렇습니다. 경찰과 시장은 필요에 따라 서로의 편의를 봐주지만 상대의 약점을 잡아 협박할 요량으로 혈안이지요. 이곳의 아이들은 콘크리트 더미를 놀이터 삼아 말썽을 일삼고 학대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지옥에 던져진 작은 인간들의 증오심이 가장 뜨겁게 들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레 미제라블'의 1부는 몽페르메유에 짙게 깔린 프랑스 사회의 이민자, 종교, 인종 문제를 직설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지난 수십 년 전부터 프랑스 사회에 도사리고 있던 어두운 현실로 소요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했지요. "증오 세대"라고 불리는 방리유의 이민 2·3세대들은 프랑스 사회의 꺼지지 않는 불씨입니다. 


삶에 대한 전방위적인 폭력이 일상이 된 몽페르메유는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불붙기 전 폭탄처럼 위협적입니다. 집시들이 운영하는 서커스단의 새끼 사자 "조니"가 실종된 사건이 그렇습니다. 집시들은 확성기를 통해 조니를 돌려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며 온 거리를 헤집고 시장의 아파트로 찾아가 그의 무리와 충돌합니다. "조니"의 신원을 둘러싼 이들의 말다툼은 웃음을 자아낼 만큼 한심하지요. 하지만 험악한 분위기는 유혈사태로 이어지기 직전입니다. 이처럼 몽페르메유의 가장 큰 문제는 기꺼이 불을 붙일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는 것입니다. 


경찰들이 조니를 훔친 이사를 추적하는 장면의 영화언어는 절박하기까지 합니다. 경찰들은 이사를 찾기 위해 동네 축구장으로 가 아이를 거칠게 제압합니다. 이사를 비롯한 아이들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경찰들을 위협합니다. 핸드 헬드 쇼트로 어떤 편집 없이 중개되는 이 장면은 이사를 짐승의 먹잇감으로 보이게끔 합니다. 그 난데없는 살육은 공포를 유발하지요. 아수라장 틈에 이사가 도망가고 그 뒤를 스테판과 크리스가 쫓습니다. 부감 쇼트와 스테디캠, 핸드헬드 쇼트로 위에서 추적되고 땅에서 쫓아가는 이 장면은 사냥 다큐를 연상시켜 피사체에 대한 안타까움과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크리스가 이사를 제압했을 때 클로즈업되는 이사의 얼굴은 공포 그 자체이지요. 그와다가 아이들의 반항에 격분해 또 한 번 달아나는 이사를 향해 고무탄을 쏘면서 일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집니다. 이 사냥 장면은 겁먹은 버즈가 드론으로 현장을 촬영하는 부감 쇼트로 마무리됩니다. 경찰의 과잉진압 행태를 담은 이 시퀀스는 모든 앵글에 들러붙은 카메라로 고발됩니다. 그러니 이건 "증오 세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주목하라는 레쥬 리 감독의 절박한 호소입니다.


경찰의 총에 맞은 아이와 그 현장을 담은 영상으로 이제 도화선에 불이 붙은 듯합니다. 경찰은 필사적으로 버즈를 추적하고 시장 무리 역시 영상을 먼저 찾아 경찰을 협박하려고 합니다. 버즈는 이들을 피해 무슬림 형제들의 지주, 살라를 찾아가 영상을 넘기지요. 그는 한때 갱단이었지만 종교에 귀의하여 평화를 찾는 인물입니다. 이제 모든 세력이 살라의 케밥집으로 모입니다.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크리스는 살라에게 영상을 넘기지 않으면 테러 혐의로 그를 체포하겠다고 협박하며 "내가 바로 법이다"라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법의 실제적 의미가 이곳에서 얼마나 무의미하던가요. 그 사나운 외침은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프랑스가 버린 이 땅 위에 법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살라 역시 영상을 스테판에게 넘깁니다. 2005년 소요 사태 이후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이 곳이 불탈 것이라는 스테판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들의 분노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살라의 말 역시 과거의 소요사태로 증명된 필연적인 결말이 아니던가요. 


경찰은 영상을 입수했고, 조니를 집시들에게 찾아줬으며, 이사를 협박해 입단속까지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스테판이 그와다를 불러내 고무총은 실수로 발사할 수 없는 총이라며 왜 그랬냐고 묻지요. 그와다는 그저 이성을 잃은 것뿐이라고 변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스테판의 말대로 이사에게 사과하지 않았지요. 사실 이들 중 누구도 아이들에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항상 옳으니까 절대 사과하지 말라는 크리스의 말처럼 공권력은 주민들에게서 공포 의한 존중을 받아왔던 셈입니다. 그러니 영상을 그와다에게 넘기며 네가 할 일을 해라는 스테판의 말은 언뜻 정의로워 보이지만 사실 허망하기까지 합니다. 시종 클로즈업되던 스테판의 얼굴은 그의 죄책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지만 그는 양심의 중개인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통스러워만 하는 이 인물은 프랑스 사회의 민낯이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몽페르메유의 외부인이자 관객인 그가 끝낼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레 미제라블'의 클라이맥스는 2019년 개봉작 중 가장 압도적이고 문제적입니다. 엔딩까지 10분 동안 펼쳐지는 이 지옥도는 가히 전쟁 영화를 보는 듯 처참하고 잔혹하지요. 스테판과 동료들이 다시 거리 순찰을 나온 날 복면을 쓴 아이들이 경찰차를 향해 폭죽을 쏘고 경찰들을 낡은 아파트로 유도합니다. 포박당한 경찰들은 사방이 막힌 계단에 갇혀 무차별적인 폭격을 당하지요. 그러나 아이들의 반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시장의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그를 집단 폭행하고 마약 밀매자들의 차도 폭파시킵니다. 그러니까 이건 이곳에 폭력을 낳고 방조한 전체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인 반격입니다. 스테판이 제발 도와달라고 두드리는 문 안에 버즈가 있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이 소년은 언제나 목격자였고 동시에 고발자이지요. 하지만 이제 영화는 어떤 해답도 주지 않습니다. 이사가 화염병을 들고 경찰들을 바라보고 스테판이 아이에게 총을 겨눕니다. 문이 열릴지, 화염병이 던져질지, 총성이 울리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레 미제라블'은 이사의 공허한 얼굴을 페이드 아웃하며 끝납니다. 이 충격적인 엔딩 시퀀스는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논쟁이 이 사태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는 감독의 의도처럼 말입니다.


'레 미제라블'은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와 많은 부분에서 겹칩니다. 두 작품은 각각 1986년과 2005년의 소요사태에서 영감을 받았지요방리유에 드리운 짙은 폭력과 차별의 음영과 시한폭탄 같은 방리유 청년들의 분노를 다룬다는 것도 공통적입니다. 다만 '레 미제라블'과는 달리 <증오>의 주체는 방리유의 세 청년들입니다. 이들은 경찰의 폭력에 친구를 잃은 후 주운 총을 들고 다니면서 경찰을 죽여버리겠다고 분노를 표출하지요. 하지만 그 마음을 접은 순간 한 친구가 경찰의 오발탄에 목숨을 잃습니다. 결국 경찰과 한 청년이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게 됩니다. 그 순간 암전 된 화면 위로 총성이 울리고 <증오>의 막이 내립니다. '레 미제라블'과 '증오' 모두 곧 폭발할 것 같은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레 미제라블'에서는 총성이 울리지 않지만 그 의미의 연속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증오>가 10년 후 2005년의 소요사태를 그대로 예견했듯이 말입니다. 그때 이후로 변한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이민자 사회는 소외받고 과잉진압으로 청년들이 죽어가고 있지요. 그렇게 나온 작품이 '레 미제라블' 입니다. 레쥬 리 감독의 말처럼 지금 당장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20년 후 또 다른 '레 미제라블'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사태는 프랑스의 병든 시스템을 향한 것인 동시에 자기 파괴적인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분노의 대상이 지극히 개인적이며 자학적이라는 것은 제발 이곳을 봐달라는 절박한 호소입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이곳은 폭력의 악순환이 집단정신이 된 공간이 아니던가요. 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이 말했던 것처럼 영혼 없는 거리에서 태어나 회색빛 삶을 사는 젊은이들이 주류 사회를 보면서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몽페르메유에서 악인을 찾는 이들에게 레쥬 리 감독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인용한 엔딩 크레딧으로 일갈합니다. 


“여러분, 이걸 잘 기억해 두시오. 세상에는 나쁜 식물도 나쁜 사람도 없소. 다만 나쁜 농부가 있을 뿐이오."




파도처럼 밀려오는 이민자와 난민 물결은 비단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심각한 빈부격차와 소외는 이민자뿐만 아니라 모든 소외계층들을 방리유로 내몰지요. 그러니 이 영화는 프랑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소외지역의 비참한 삶과 분노를 고발하는 보편적인 영화입니다. '레 미제라블'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뒤 마크롱 대통령은 엘리제 궁에서 영화 상영회를 하자며 레쥬 리 감독을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번에 대통령이 몽페르메유로 와 주민들과 함께 '레 미제라블'을 관람하자고 요청했지요. 결국 이 양극단의 두 인물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분명한 건, 이 영화 '레 미제라블'은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선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붙은 도화선은 우리의 발 끝에 있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변화에 대한 요구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지요. 어떤 영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소멸입니다. 그 자기 파괴적인 결단은 결국 더 나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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