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겨울, 스며드는 감정의 온기
차가 생기고 나니, 갑자기 7번 국도를 달려보고 싶어. 아무 생각 없이 또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는 그걸 또 주워 담는다. 우린 그래서 7번 국도로 떠났다. 가을에 차를 사고 벌써 일곱 번째 운전 연수다. 일단 목적지는 고래불해수욕장이다. 사실 어디라도 상관없다. 단지, 우리에게는 내비게이션에 입력할 곳이 필요했을 뿐. 첫 간이 휴게소가 나올 때까지는 그가 운전대를 잡기로 했다. 아직은 내게 시내 운전을 맡기지 않는 것에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안전 운전이 최우선이기에 어쩔 수 없다. 자리를 옮겨 운전을 하다 보니 어느새 7번 국도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도저히 풍경을 감상할 수가 없다. 그런 내 모습이 그저 웃긴 모양이다.
7번 국도, 7번 국도, 노래를 하더니 왜 감상을 못하니. 나는 민망함에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매번 운전을 한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바다 풍경을 선물할게. 내 몫까지 즐겨줘.
고래불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날이 좋아서 우리는 차를 세우고 잠시 바닷가를 걷기로 한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에 비친 햇살의 반짝임, 그리고 겨울의 차가운 공기마저 좋다. 잔잔한 물결이 이루는 파동을 구경하며 걷고 또 걷는다. 맑고 투명한 바다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인적 드문 겨울 바다는 기분 좋은 휴식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조금 더 여유를 즐기다 모래사장 위에 발자국을 남겨 놓고 다시 차에 올랐다. 이대로 울진까지 가보기로 했다.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 하지만 그는 절대 칭찬하는 법이 없다. 그저 말없이 지켜보다 아니다 싶으면 확실히 이야기를 해줬을 뿐. 그래서 서운하기도 하지만 운전을 배우면서 싸우지 않아서 좋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울진 구산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두어 시간 쉬어 가기로 했다. 책을 꺼내 차 트렁크를 열고 걸터앉았다. 언제가 차가 생긴다면 아무 때나 떠나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다가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아쉬운 것은 하나 있다. 맥주나 와인을 마실 수 없다는 것. 그의 차를 타고 다닐 때는 음주를 즐겼지만,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는 이상 술은 입에도 댈 수 없다. 난 분명히 애주가지만 음주운전은 극혐 한다.
우리에게 시간은 너그러웠다. 시간이 허락한 만큼 제대로 일몰을 감상하기 위해 뒷 좌석을 모두 눕혀 자리를 잡는다. 조금 춥기는 했지만, 날이 풀리면 이렇게 바닷가에서 차박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점차 하늘이 붉게 물들어간다. 가져온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재즈를 들으며 우리는 그 여유와 행복을 조금 더 즐겼다. 돌아갈 시간은 충분했으나 운전도 오래 했고, 바다도 본 마당에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우리는 울진에서 조금 더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특별한 계획이 없이 그저 7번 국도를 바라고 온 터라 숙소도 정하지 않았지만, 근처 숙박업소를 찾아 어둑해지는 길을 나서본다. 간단하게 치킨을 포장하여 맥주 한 캔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도 좋겠다.
주객전도라더니 운전 연수는 뒷전이고 어쩌다 보니 여행길이 되고 있다. 울진까지 온 김에 죽변의 하트해변을 찾았다. 기분까지 청량해지는 물빛이다. 촤르륵 촤르륵, 돌멩이에 스치는 바다가 음악을 만들더니 넘실대며 춤까지 춘다. 사이렌의 유혹이 이 같을까? 더 있다가는 나의 눈과 귀가 멀 것만 같아 다시 영덕으로 향했다.
영해까지 왔을 무렵, 그는 내게 조용하고 아름다운 숨은 숲길이 있으니 가보자 했다. 나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는 특히 경상도의 숨겨진 비경을 많이 알고 있다. 어떻게 그런 곳들을 찾아내는지 그 재주가 신기할 정도다. 그 덕에 내가 호강한다. 뒤늦게 매체에 소개되거나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추억을 되새김질하기에도 좋다. 이곳 역시 추후 연애 프로그램의 촬영 장소로 나왔더랬다.
벌거벗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지만 길게 뻗은 겨울나무가 전혀 추워 보이지 않는다. 나무 사이사이로 빛이 스며들며 근사한 풍경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꾸며지지는 않았지만, 잘 가꿔진 숲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기교 없는 담백함이 멋스럽고 고급스러울 때가 있다. 관광지의 화려함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유지가 이토록 감동을 준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해맞이공원 고갯길을 연습 코스로 삼아 다시 출발했다. 내가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힘들지 않았다.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내게 레이서 기질이 보인다고 했다. 해맞이공원에는 사람이 많아 그냥 지나가는 대신 대게 거리로 향했다. 여기 한 번 통과하고 나면, 운전 실력이 조금 더 늘 거야. 그 말을 하면서 어디 한 번 잘해보라는 듯 묘한 미소를 짓는 그가 얄미웠지만 승부욕이 발동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게들, 좁은 길, 차와 사람이 서로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다니는 거리는 운전하기가 꽤 까다로웠다.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친 우리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의 운전은 위험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일몰을 마주하자 눈이 부시며 앞이 보이지 않아 내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 평정심을 잃은 나를 잡아준 것은 그였다. 너 지금 굉장히 위험해. 안 되겠어. 운전석 바꾸자. 지는 해에 내가 져버렸다. 조금 분한 나머지 씩씩거렸지만 어쩔 수 없다. 나의 출퇴근은 이렇게 어두운 시간이라 해봐야 한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그는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다시 자리를 바꿔준다. 지금은 해볼 만할 거야. 차라리 어두운 쪽이 해가 질 무렵보다 편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했던 것은 내 기우였다. 우리의 7번 국도 드라이브는 이렇게 끝이 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