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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한국에 들어왔다고 빨리 만나자며 제니가 톡을 올렸다. 제니는 수능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캐나다로 들어가서 순이와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심지어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빠르게 가 버렸다. 원래는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경험해 보고 어학 실력도 조금 더 쌓다가 캐나다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려는 계획이었는데 집안끼리 친한 캐나다에 사는 지인이 제니가 참여하기에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며 연락이 왔고 이왕 들어가는 거 한국 대학은 가지 않고 이번에 들어가서 캐나다에서 계속 공부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고 했다. 그래서 갑자기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미리 얘기를 하지 못했다고. 급하게 들어가는 거라 여름에 바로 나올 거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며 씩씩한 표정으로 한국을 떠났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순이는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고등학교 친구들 단톡방이 갑자기 시끌시끌해졌다. 반갑다고 분위기를 맞추며 언제 만날지, 어디서 만날지, 뭘 하면 좋을지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하면서 한동안 카톡을 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순이는 후,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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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공부를 했다. 더불어 엄마도 오랫동안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엄마는 일하고, 아버지는 공부했다. 아버지는 대학원 공부가 마무리될 무렵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고, 엄마는 이번에도 아버지를 지지했다. 사랑이 뭐길래. 순이 엄마와 아버지는 대학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말을 잘하거나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묵묵하게 자신의 공부에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활발하여 사람을 잘 사귀고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하나 덜렁거리는 면이 많아 허당이라는 소리를 왕왕 듣는 엄마는 자신과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부러워하곤 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엄마가 아버지 있는 곳에 다가가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머지않아 엄마가 아버지에게 고백을 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우리 이제 연인이 되자고. 그렇게 사랑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사랑에 서툴렀고 엄마도 마찬가지였지만 엄마가 아니면 아버지는 사랑 자체를 포기해 버릴 것만 같아서 엄마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이 사랑을 이끌어 갔다. 주변머리가 없고 융통성이 없어 다소 답답한 아버지 곁에서 엄마는 아버지의 주변머리가 되었고 융통성 있게 행동하며 아버지의 숨통이 트이게 도와주었다. 순이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꽉 막히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러지 않았다. 엄마의 숨통은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안정이었다.
아버지는 무엇하나 뛰어나게 잘하며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부 말고는 다른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디서든 들리는 흔한 서사처럼 아들만 바라보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 서사의 다행인 점은 홀어머니가 고생을 그리 많이 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아버지의 아버지, 즉 순이의 친조부께서 돌아가실 때는 가족이 살고 있던 집이 있었고 아버지가 대학에서 4년 동안 공부하고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차릴 정도의 딱 그만큼의 유산이 남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하게 취업하고 엄마와 결혼해서 누구나처럼의 삶을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취업 대신 대학원에 입학해서 자신이 꾸준히 할 수 있는 공부를 이어서 했다. 아들만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자주 그렇듯 할머니는 아버지가 큰 성공을 이루고 학자가 되어 할머니를 등에 업고 다닐 거라 생각했다. 그 당시의 남자들은 성인이 되어 두어 번 등에 누군가를 업게 되는데, 그 처음은 결혼식 후 폐백에서 신부를 업고 폐백실을 한 바퀴 도는 것이고, 그다음은 아이가 생기면 우는 아이를 달래거나 아이와 놀아주려고 아이를 등에 업는 경우다. 아버지는 어느 누구도 등에 업지 않았다.
순이는 아버지 등에서 느껴지는 감촉을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옆모습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엉금엉금 기어서 아버지의 책상 가까이 다가가면 아버지의 옆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코가 오뚝했고 안경을 끼고 있었고 골똘한 입술에 책만을 쳐다보며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순이가 다가가는 걸 아버지는 늘상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다고 차가운 아버지는 아니었다. 순이가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흔들면 아버지는 순이를 내려다보며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잠깐만 순이야,라고 말했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집중했는데 그 잠깐만은 영영 끝나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 기어서 아버지에게 다가갔던 순이는 곧 걸음마를 했고, 또 뒤뚱거리며 뛸 수도 있게 되었다.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이후로도 종종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서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아버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머물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때의 아버지를 떠올려 보면 빛이 들어오는 창가나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갈색 책상 같은 확실하지 않은 장면까지도 더불어 상상이 되어 아버지가 멋있어 보인다. 엄마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반했을 게 분명하다고 순이는 짐작한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유학을 반대했다. 자기만 버려놓고 금쪽같은 아들이 쓸모없는 며느리와 외국에서 기약 없이 몇 년 동안이나 살아야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공부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냐고 아버지를 잡으려고 했으나 아버지는 할머니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쓸모없는 며느리이자 금쪽같은 아들이 한국을 떠나게 만든 몹쓸 며느리가 된 엄마도 할머니를 굳이 위로하거나 죄송해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 외에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국을 떠나서 생활하는 건 엄마도 아버지도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예상보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높은 물가에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버지가 공부를 쉬지 않고 하기 위해서 엄마는 돈을 벌어야 했다. 아버지가 공부를 쉬고 돈을 번다고 해도 그만큼 학위 따는 일정이 늦어지는 거여서 한국에서처럼 엄마가 일을 하고 아버지는 계속 공부하는 걸로 합의를 봤다. 엄마는 아버지가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걸 상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회사에 다닌 몇 년의 경력도 그곳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엄마는 급한 대로 한인 마트와 한인 식당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구할 수 있었고 틈틈이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소통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하우스키퍼로 일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일하며 돈을 버는 건 좋았지만 엄마는 그들 사이에서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은 잠시 머물다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사람이라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어떤 거리감이 그들과의 사이에 드리워져 있었는데 엄마가 만든 건지 그들이 치고 있던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육체노동을 처음 하는 엄마는 당연하게도 몸이 자주 아프고 힘들었는데 그보다 조금씩 억세지고 무덤덤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게 너무 씁쓸했다. 무엇보다 외로웠다.
아버지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육체노동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 보지 않아 엄마의 고충을 알지 못했다. 마음이 모진 사람은 되지 못해 자신을 돌보는 아내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면서도 노동의 힘듬은 이해하는 척만 했다.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식당이나 마트,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을 하는 아내를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순이는 아버지의 유학이 끝나기 전에 태어났다. 순이가 태어나서 아버지의 공부 기간이 더 늘어나기도 했다. 아버지는 출산과 육아 중인 엄마 대신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나의 연구를 더 시작했고, 작은 강의도 받아서 했다. 덕분에 순이는 미국 시민권자다. 이중 국적자는 만 22세를 기점으로 한국이나 미국, 하나의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이제 조금씩 국적을 결정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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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이 득실거리는 학교에서도 제니는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외모가 그리 뛰어난 건 아니었는데 순이가 제니를 봤을 때 제니는 무언가 달라 보였다. 빛이 나는 것도 아니고 웃음이 화사하지도 않았지만 순이의 눈에 제니가 자꾸만 들어왔다.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서로 알지 못한다. 특별한 계기가 작용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어쩌다, 의 순간이 있는 법이다. 순이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최상위권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상위권 언저리에 늘 머물렀다. 제니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거에 비해 중상위권은 유지하는 아이였다. 학교에서 활발히 놀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집에서는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공부를 했는데, 대부분의 과목에 과외 선생님이 있었다, 넉넉한 집안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아쉬움 없이 자란 아이였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구석이 있는데도 거짓이 없고 나쁜 마음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미움받거나 외면받지는 않았다. 순이는 제니의 그런 티 없는 넉넉함에 끌리기도 했고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제니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순이 자신의 속 얘기는 잘하지 않았다. 특히 가족 얘기는 되도록 평범하게만 하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제니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순이는 자신의 어디까지 드러내도 괜찮을지 재면서 머리를 굴렸다. 누군가의 눈에는 순이의 이런 행동이 피곤하고 지난한 우정의 표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순이는 제니를 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제니는 새로운 화장품이 나오면 하나씩 가지고 와서 친구들에게 보여줬고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 수 있을지 함께 연구했다. 아무리 관심 없는 척을 해도 기본 화장은 다 하고 다니는 나이가 고등학생이다. 다양한 색의 틴트를 가지고 다니며 친구들 입술에 어울리는 색을 발라주는 제니의 주위에는 친구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꾸며서 더 화사하게 보이는 아이들과 제니는 잘 어울렸고, 더불어 순이도 그 무리 안에 머무르게 되었다. 순이는 제니가 해 주는 대로 했다. 관심이 있어도 없는 척, 없어도 있는 척, 평범한 여학생 역할을 유능하게 해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