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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제니는 미미와 순이가 도착한 다음 날에 혼자 학교에 갔다. 아직 끝나지 않은 프로젝트가 있다고 했다. 수업도 들어야 하고 프로젝트 진행도 해야 한다고 했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집에서 편안하게 쉬면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으라고 얘기하고 나갔다. 일찍 들어오겠다면서. 오랜 비행에 지쳐 더 자고 싶었던 미미와 순이는 제니 침대에서 뒹굴뒹굴 거리며 반나절을 보냈고, 전날 얼굴도 보지 못했던 다른 방 친구들 – 친구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낯선 이들이라 친구라는 호칭이 어색했다. 사람들이라고 부르기에도 뭔가 미안했다. 님들이라고 해야 할까. - 이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쑥덕거리며 제니의 방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고민만 했다. 미미는 책을 읽다가 다시 잠이 들었고 순이는 쉴 새 없이 떠들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둘째 날도 첫째 날처럼 집에서 오믈렛을 만들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제니에게 주기 위해서 한국에서 준비해 온 햇반과 통조림 반찬들은 나중을 위해서 선반 안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셋째 날에는 제니가 학교에 같이 가자고 했다. 자신은 강의도 듣고 프로젝트도 준비해야 하지만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캠퍼스 구경을 하면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 한국과 크게 다를 거 없는 대학이겠지만 은근히 구석구석 흥미로운 게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거라고. 1시에는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제니는 우선 미미와 순이를 학교 용품들을 파는 샵으로 데리고 갔다. 샵에는 기본적인 문구용품 외에도 학교 이름이 새겨진 노트, 연필, 볼펜, 파일, 필통 등의 학용품이나 반팔티나 후드티, 혹은 집업 티 등 다양한 상품들이 있었다. 대학별로 각 학교를 나타내는 그런 물품들이 많다고 했다.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모습에 미미는 왠지 모를 부러움이 일었다. 수업 시간이 되어 매점과 도서관,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공간 등을 알려주고 제니는 떠났다. 제니가 알려준 장소들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학교와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학교 이름이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니는 학생들도 자주 보였다. 미미는 캠퍼스 안에 돌아다니는 대학생들의 자유로움을 느끼며 아르바이트와 수업과 작업에 치여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을 떠올렸다. 공부를 위한 유학이 우선이겠지만 넓은 세계에서 다양하게 경험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도 중요하겠지만 공부와 경험을 쌓는 데 지금은 더 집중하는 게 좋겠다는 선배의 말이 맞았다. 밴쿠버 대학에서 보낸 찰나의 몇 시간에 불과했지만 시야가 조금 더 확장되고 있음을 미미는 느낀다.
길을 물어보거나, 물건을 사거나 주문을 할 때 영어를 써야 하는 상황이 간간이 생겼다. 순이는 영어를 잘했지만 별로 쓸 생각을 하지 않았고 왠지 모르게 시큰둥했다. 미미는 학교 다닐 때 영어 시험에서 점수가 나쁘지 않았지만 캐나다에서 원어민들과의 대화는 점수와 다르게 실전이었다. 역시 한국식 영어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전전긍긍했다. 아마도 지필로 대화를 나누었다면 어느 정도는 통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툭 하고 뱉어내는 순이의 영어 실력에 깜짝 놀라며 미미는 한국에 돌아가면 회화 위주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운 타운에 몇 번 나가고 제니 학교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니 일주일이 지나갔다.
집에서 제니를 기다리는 동안 미미는 동네 주민처럼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산책했다. 12월이라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어 주택들이 아름다웠다. 해가 지면 온 동네가 반짝였다. 아니, 제니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제외한 거기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주거 단지들이 모두 반짝였고, 산타할아버지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작 동네에서 아이들을 많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버스 정거장이 있던 그 반대쪽에 있는 학교로 보이는 건물 근처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 건물 근처에는 놀이터도 있었고, 체육관도 있었다. 공간은 넓었고 건물들은 문이 열려 있었다. 높은 담으로 막혀 있지도 않았고 감시하는 사람도 없어 보여서 미미는 슬그머니 학교에 들어가 보았다. 혹시 누군가에게 들키지는 않을지,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어쩌나 내심 긴장하고 있었지만 미미의 발은 자꾸 미미를 안으로 이끌었다. 이곳저곳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돌아다녔다. 수업이 끝났는지 아니면 쉬는 시간인지 갑자기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미미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외국인이라고 이상하게 쳐다보기보다는, 헬로,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하고 지나가서 미미도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다음 날에도 그 학교에 찾아갔다.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돌아다녔으면 감히 들어가지 못했겠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각 교실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고, 미미는 순간 겁이 나서 살짝만 살펴보고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큰일을 해낸 양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밴쿠버에 머무는 동안에 미미는 범위를 조금씩 확장하며 동네를 탐방했고, 공원이나 놀이터 같은 평화로운 곳이 골목골목에 있는 걸 발견하고는 혼자서 기뻐하고 흐뭇해했다.
순이는 제니와 집을 함께 쓰고 있는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제니가 없는 시간에는 그들과 함께 쇼핑을 가기도 하고 카페에 가기도 했다. 미미와 순이는 각자 서로의 시간을 보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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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나가며 미미는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와 페이스톡을 할 때마다 엄마는 오늘은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색다른 걸 먹었는지, 재미있는지 빠짐없이 똑같은 질문을 해댔다. 미미는 말을 얼버무리며 시차가 난다는 이유로 빨리 끊곤 했는데 그건 별로 할 말이 없어서였다. 비싼 돈을 들여서 – 첫 학기 등록금과 뼈 빠지게 아르바이트 한 비용을 탈탈 털어서 – 온 여행인데 동네만 돌아다니며 너무 현지인처럼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괜히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은 자꾸 안 좋은 쪽으로 흘렀다. 평소의 미미 같았으면, 현지인 모드를 즐기며 천천히 골목을 걷고, 풍경을 즐기고, 그곳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며 미미 자신도 모르게 이곳에 흡수되고 있는 지금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여기가 캐나다가 아니라 한국이었다면, 한국의 다른 지방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 졸이지 않았을 거다. 여행을 많이 다녀보진 않았지만 언제나 어디서든 사람 많은 관광 명소나 꼭 가봐야 한다는 유명한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여기는 캐나다이고, 미미는 거금을 들여서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왔다. 친구 집의 방문이 목적이지만 그 목적 안에는 밴쿠버를 둘러보고 이곳에 대해 알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 포함되는 거다.
제니는 그냥 이게 다라고, 밴쿠버에는 볼 게 없다고 말했다. 조금 유명한 데를 가려면 차가 있어야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편한데, 자기는 아직 차도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너무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도 다른 친구들 덕분에 제니가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에는 근교에 있는 큰 공원으로 피크닉을 가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순이와 미미는 나머지 일주일 동안에 어디라도 가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다. 둘이 돌아다니기에는 여행 경험이 부족했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서 돈이 조금 더 들더라도 현지에서 관광 스폿을 데리고 다니며 설명을 해 주는 가이드 투어를 인터넷에서 찾아 하루씩 가보기로 했다.
제니와 같은 집을 사용하는 친구들은 순이와 친해져서 밴쿠버에서 꼭 가봐야 할 장소들을 친절하게 알려주었고, 관광지는 아니지만 현지인들에게 잘 알려진 곳도 안내해 주거나, 같이 가 주었다. 인터넷을 뒤져 보아도 어떤 투어가 좋은지 잘 알 수가 없어서 선택에 고민하고 있을 때에는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 좋은 자료를 찾아서 알려주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갑작스러운 순이의 사교성 덕분에 미미도 덩달아 덕을 보았다. 그 친구들 중에서 거실에서 지내는 한국인 친구가 순이를 많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 친구는 남자 친구가 바뀐 일정보다 일찍 데리러 오게 되었고 크리스마스 시즌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며, 남자 친구와 자신이 같이 잘 알고 지내는 친구들과 함께 파티도 하고 돌아다니기도 할 건데 미미와 순이도 함께 하면 좋겠다고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시애틀에 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파티라니! 시애틀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