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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진슬 Aug 11. 2018

엄마가 사다 준 종이컵 속 Cherry

내 아이를 키우며, 아이로서의 나를 다시 살다

연일 40도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요즘.

우리 가족은 그 어느때 와도 격이 다른,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치열하게 고군분투 중이다. 차도 없는 우리 가족은, 순수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야구장도 가고, 과학관도 가고, 22인치 중형 캐리어를 끌고 1박 2일 연천 선사유적지 캠핑도 갔으며, 별자리를 보러 야간에 진행되는 천문과학관 교육 프로그램도 다녀왔다. (흠, 대체 내 눈엔 뵈지도 않아 아무 의미 없는 별 보기를 하러 가야 하다니, 엄마 노릇은 역시 쉽지 않다.^^)


방학 시작 후, 열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지친 나에게, 남편이 시댁 찬스로 아이를 떼어 놓는 휴식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어젯밤, 나는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신나게 책도 보고, 오늘 아침엔 남편에게 미리 준비해 놓은 페이스트리 빵을 들려 회사에 보내고, 무려 11시까지 뒹굴거리는 호사를 누렸다.


느긋하게 브런치로, 어제 남편과 술안주 삼아 만들어 먹고 남은, 차돌박이 오일파스타를 데워 먹고는, 커피를 내리며, 평소와 달리, 뭔가 상큼한 디저트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겠다 싶어, 냉장고를 뒤적였다.




이 때, 내 눈에 띈 호사스런 과일이 있었으니, 바로, 체리다. 7, 8월에만 반짝 맛볼 수 있는 럭셔리하고 맛있으며, 예쁘기까지 한 과일. 아이가 시댁에서 돌아오면 주려고, 반짝 특가 세일하는 걸, 큰 맘 먹고 두 팩 사뒀었다.

이런 건, 사실, 엄마들이 잘 손 대지 못한다. 너무너무 맛있지만, 비싸고 양도 너무 적으니, 나까지 양껏 먹겠다고 들면, 뭐, 누구 코에 붙일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이젠 옛날처럼 어려운 시절도 아닌데 왜 이럴까 싶어 당황스럽기도, 궁상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엄마가 날 키울 때 하시던 궁상을, 30년도 더 지나 풍족하기 그지 없는 시기에 살고 있는 내가 똑같이 떨고 있다니... 물론, 우리 엄마는 네 명의 아이를 키웠으니, 어지간히 풍족한 경제력을 지니고 사는 집이 아니고서는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고작 아이 하나 아닌가? 

그러니, 내가 왜 이러는 건지는 참 불가사의다.

(아! 물론, 궁극적으로는, 생활비를 아껴 쓰고자 하는 것이겠다 싶긴 하다.)

그래. 오늘은 아이도 없는 모처럼의 달콤한 휴가 아니던가?

오늘은, 나도 체리 좀 먹자. 그리하여, 나는 열 두 개의 체리를 과감하게 접시에 담았다.

차돌박이오일파스타에 진한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아이스아메리카노, 체리 12알.

썩 괜찮은 조합이다.

올해 들어서는 처음 먹는 체리.


사실, 나는 체리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씹을 때의 식감은, 포도처럼 너무 물컹거리지도, 수분감 없이 지나치게 퍼석거리지도 않는다.

적당히 단단한 과육을 씹으면, 달콤 새콤한 과즙이 팡 터지는 매력적인 식감. 

맛의 밸런스는 또 어떠한가? 산도와 당도가 이렇게도 절묘하게 조화로운 과일이 또 있을까?


잘 익은 체리의 단맛과 신맛은, 결코, 함께 뒤섞여 애매모호한 맛을 내지도, 서로의 개성을 침해 하지도 않는다.

신맛은 신맛대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단맛은 단맛대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앗쌀하게 달콤하고 앗쌀하게 새콤한 맛이 따로 또 같이 절묘하게 공존한다. 이런 맛은, 우리 땅에서 자라는 과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맛이다.


게다가, 루비같이 광택이 흐르는 예쁜 빛깔은, Sexy하기까지하다. (선도 유지와 먹음직 스런 상품성을 위해 왁싱을 한다는 설이 있지만, 그건 뭐, 개념치 않기로 한다.)


역시, 오랜만에 입에 넣은 체리는, 나에게 늘 같은 커다란 행복감을 선사해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여유로워서였을까?

입 속에 넣은 체리를 온 몸과 온 뇌로 음미하던 나는, 갑자기 아득한 추억 하나에 사로잡혀서, 이 글까지 쓰게 되었다. 체리가 타임머신에 나를 태워 과거로 데려간 것이다.



 12, 13년 전, 우리 나라에도 본격적으로 체리가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동네 과일가게에도 그 고혹적인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에, 나는, 극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인해, 로라제팜, 디아제팜, 레메론에서부터 당시 신약이었던 렉사프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숱한 항우울제와 정신과 약들을 수년 째 내 몸 속에 우겨넣으며, 삶을 연명하던 중이었다. 너무 많은 약들의 부작용으로 인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야밤에 좀비가 되어 무언가를 먹고는, 그 사실을 기억조차 못하여 가족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으며, 단기기억 상실 증세까지 보여,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을 당황시키기까지 하는 지경이었다. 


그 시절, 또 한가지, 나를 지속적으로 힘들게 했던 Side effect 중의 하나는, 극심한 입마름 증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수분감이 많고, 과도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도 쉽게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을 자주 먹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오렌지였다.


사실, 병원에 입원했을 때엔, 워낙 고용량의 약을 투여하고 있던 상태였고, 또한, 병실에는 상대나 나를 해할 가능성이 있는 그 어떤 도구도 들일 수 없었기에, 과도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 덕분에, 나는, 오렌지를 손으로 잘 까 먹는 능력을 체득할 수 있었다.


긴 입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계절이 바뀌면서 사라진 오렌지를 대신해, 나를 입마름 증상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던 아이가 바로 체리였다.


그 때는, 아직, 체리가 대중화 되지는 않았던 터라, 자주 구매할 수도, 많은 양을 구할 수도 없었지만, 엄마는 집 근처 과일가게에 체리가 보일 때면, 체리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작은 종이컵에 담긴 체리를 사다 주곤 하셨다. 그랬다. 정말, 예전엔 운송료도 너무 비쌌고, 선도를 지켜내는 것도 쉽지 않아서였는지, 체리를 작은 종이컵에 담아서 팔았었다.


정말로 한 열 두 알이나 들어갔으려나 모르겠다. 그렇게 깜찍한 양의 체리를 내게 사다 주시고는, 내가 아무리 드셔 보라고 권해도, 엄마는 맛조차 보지 않으셨다.


보석같이 아름답고 고혹적이며 럭셔리하고 이국적인 체리를 한 입 베어 물면, 체리는,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아팠던 나를 어딘가 달콤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세계로 데려다 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서, 나도 엄마가 되어, 내 아이에게 귀한 것, 맛있는 것, 좋은 것을 하나라도 더 주고자, 자주 내 몫을 내려놓는 경험을 하면서, 그 작디 작은 종이컵 속 체리가, 얼마나 크나 큰 사랑이었는지를 깨닫고 있다.


몸이 아프다가, 이젠 마음까지 아파하는  딸을 바라보며, 체리를 사다 주고, 오렌지를 사다 주었던 엄마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얼마나 안타깝고 가슴 아팠을까?


이젠 오랜 시간이 흘러, 그 때의 아픔과 고통을 담담하게 떠올리며 써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굳은살과 내공이 생겼지만, 왜 그 땐 그렇게 아파하며 사랑하는 엄마를 더 아프게 해야만 했는지,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흔히, 아이를 키우면, 아이가 자라는 순간 순간, 부모 역시, 아이였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한 번 더 아이로서의 삶을 산다고 한다.


나 역시, 아이가 6세쯤 되었을 때부터, 정말 그렇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중이다. 아무래도, 그 즈음부터 비교적 많은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이가 여섯 살에 겪는 일들을 보며, 나는 그때 어땠더라 생각한다. 또,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아이가 겪고 있는 일이나 특정한 사건이, 내 어린 그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이나, 아팠던 기억을 건드리면, 나는 여지없이 타임머쉰을 타고  행복해 하는 어린 나도, 슬프고 아파하는 어린 나도 만나야만 했다.

행복해 하는 어린 나를 만나면, 우리 부모님처럼 내 아이에게도 이런 행복을 줄 수 있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파하는 나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울고 있는 어린 나를,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내가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안아주며 위로한다. 그 때, 넌 참 용감하고 멋졌다고, 그렇게 아프고 힘들었고, 어린 아이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경험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잘 견디고 자라 주어서, 한 아이를 키워내는 엄마가 되었으니, 넌 충분히 잘 해낸 거라고, 그러니, 이젠 더 이상 거기서 울고 있지 말라고…


조만간, 한 번 시간을 내어, 맛있는 체리를 잔뜩 사 가지고 엄마한테 가봐야겠다.

루비같이 예쁘고 섹시하며, 달콤 새콤 매력적인 이국의 세계로 날 데려가 줄 것만 같은 마법 같은 체리를 함께 먹으며, 엄마랑 시덥잖은 수다를 떨고 싶다. 그러다가, 은근슬쩍 지나가는 바람처럼 이야기 할 것이다.


마 딸로 살면서너무 많이 엄마를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엄마가 내 엄마라서 다행이라고

엄마가 내 엄마라서 고맙다고

엄마가 내 엄마라서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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