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성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질서

by GLEC글렉

2024년 초, 유럽연합이 발표한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정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물류와 운송업계에서 탄소배출량 측정을 전문으로 하는 일을 하며 느꼈던 그 묘한 설렘과 긴장감. 마치 오래된 게임의 룰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CSRD라는 네 글자 약자 뒤에 숨어있는 변화의 물결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단순히 또 하나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 아니라, 기업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였다. 물류업계에 몸담고 있는 나에게는 특히나 더 실감나는 변화였다.


투명성이라는 이름의 혁명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 줄여서 CSRD는 기존의 비재무정보 공시 지침을 대체하며 훨씬 더 강화된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2024년 1월 5일부터 시행된 이 정책은 유럽연합 내의 대기업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비유럽 기업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 파괴력이 남달랐다.


이 지침의 핵심은 유럽 지속가능성 보고 기준을 바탕으로 한 표준화된 보고였다. 기업들은 환경, 사회, 거버넌스 관련 정보를 정량적이고 정성적으로 공개해야 하며, 이는 재무제표와 동일한 수준의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재무 정보만큼이나 지속가능성 정보가 중요해진 시대, 그 전환점을 우리는 지금 지나고 있는 것이다.


적용 대상은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2024년에는 이미 기존 지침 적용 대상이었던 약 11,700개 대기업이 먼저 시작했다. 2025년에는 대기업 기준을 충족하는 모든 유럽연합 기업 약 49,000개사가, 2026년에는 상장된 중소기업 약 4,000개사가, 그리고 2028년에는 비유럽 기업 중 유럽연합 내 순매출 1억 5천만 유로 이상 기업들이 대상에 포함된다.


물류와 운송 기업들에게는 특히 Scope 3 배출량 보고가 중요한 도전과제로 떠올랐다. 이는 공급망 전반의 탄소발자국을 측정하고 관리해야 함을 의미했다. 트럭 한 대가 도로를 달리며 남기는 발자국이 단순히 그 차량의 것만이 아니라 전체 공급망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이중의 짐을 진 물류업계

물류와 운송 산업이 CSRD 적용에 있어 갖는 특별한 위치를 깨달았을 때, 나는 이 업계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업계는 다른 산업의 공급망 파트너로서 이중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류기업 자체가 CSRD 보고 의무를 가질 수 있고, 동시에 고객 기업들의 Scope 3 배출량 보고를 위한 데이터 제공자 역할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류기업들이 CSRD 하에서 보고해야 하는 주요 지표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세밀하고 복잡한 작업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직접 온실가스 배출량인 Scope 1에는 차량 연료 사용량과 창고 운영 배출량이 포함되고, 간접 온실가스 배출량인 Scope 2에는 구매 전력 사용량이, 그리고 기타 간접 배출량인 Scope 3에는 협력업체와 하청업체의 배출량까지 포함된다. 여기에 에너지 소비량과 재생에너지 비율, 폐기물 발생량과 재활용율, 물 사용량과 오염물질 배출량까지.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디지털 전환이 필수적이라는 점이었다. 수동적인 데이터 수집으로는 CSRD가 요구하는 정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실시간 모니터링 시스템, IoT 센서, AI 기반 분석 도구 등을 통해 배출량 데이터를 자동으로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는 체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고객사들의 변화도 눈에 띄었다. 물류 서비스 선택 시 탄소배출량 정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이는 물류업계의 경쟁력 평가 기준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변화의 물결을 헤쳐나가는 방법

CSRD 대응은 단순한 보고서 작성을 넘어서는 전사적 변화 관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 거대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성공적인 대응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거버넌스 체계 구축이 우선되어야 했다. CSRD 대응을 위한 전담 조직을 구성하고, 이사회 차원에서 지속가능성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업무 분담이 아니라 조직 문화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했다. CEO와 임원진의 강력한 리더십 없이는 조직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것도 명확했다.


데이터 관리 시스템 고도화도 필수적이었다. 현재 많은 물류기업들이 Excel 기반의 수동 관리에 의존하고 있지만, CSRD가 요구하는 수준의 정확성과 추적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탄소배출량 측정 솔루션이 필요했다. 이는 단순한 도구의 변화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의 근본적 혁신을 의미했다.


효과적인 시스템 구축을 위한 단계별 접근법을 생각해보면, 첫 번째 단계는 현재 배출량 현황 파악과 기준선 설정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자동화된 데이터 수집 체계 구축, 세 번째 단계는 실시간 모니터링과 분석 기능 도입, 그리고 네 번째 단계는 예측 모델링과 시나리오 분석 기능 추가였다.


공급망 파트너십 강화도 중요했다. Scope 3 배출량 관리를 위해서는 협력업체들과의 긴밀한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파트너사들의 ESG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상호 윈윈할 수 있는 협력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은 경쟁에서 협력으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지속적인 개선 문화 조성이 필요했다. CSRD는 일회성 보고서 작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과 개선을 요구했다. 직원들의 ESG 역량 강화 교육, 인센티브 체계 개선, 혁신적인 아이디어 발굴 등을 통해 조직 문화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물류를 꿈꾸며

물류와 운송 산업에서 CSRD 대응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규제 준수를 넘어서, 미래 경쟁력 확보와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전략적 투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한다. 지속가능한 물류가 곧 미래 물류의 표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체계적인 탄소배출량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여 CSRD 시대를 성공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단순히 규제에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가 꿈꾸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트럭 한 대가 도로를 달리며 남기는 발자국이 지구 전체의 이야기가 되는 시대, 우리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변화는 언제나 불편함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 너머에는 분명 더 나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CSRD라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단순한 적응이 아니라, 진정한 혁신이다. 그리고 그 혁신의 시작점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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