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특이점이 온다

[리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AI의 예술도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을까

by 글쓰는 몽상가 LEE


* 해당 논문은 KCI에서 열람이 가능한 학술 논문으로 KCI에서 전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 매거진에서는 해당 내용이 흥미로웠던 이유를 중심으로 간략히 요약하고자 합니다.






INTRO


AI가 그린 그림이 미술관에 걸리고 AI가 작곡한 음악이 연주회 무대에 오른다. 기술의 발전 속도만 놓고 보면 인공지능은 이미 예술의 현장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 그럼에도 예술은 오랫동안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이해되어 왔고 특히 창의성과 감정, 이 두 가지는 '대체 불가능한 인간의 능력'으로 꼽힌다.


특히 감정은 예술의 본질과 깊이 얽혀 있다. 우리는 슬픔이 담긴 음악, 분노가 스며든 회화, 기쁨이 번지는 춤을 떠올리며 예술을 설명해 왔다. 그렇다면 감정을 체험하지 못하는 인공지능의 예술은 애초에 자격이 없는 것일까?

maxim-berg-pEb1rA-fElU-unsplash.jpg 출처: unsplash






REVIEW


리뷰할 논문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출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공지능의 예술도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을까?


* 저자: 정혜윤
* 발행기관: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 학술지명: 철학·사상·문화(PHILOSOPHY·THOUGHT·CULTURE), Vol.- No.41 [2023], p. 149-170


오늘 소개할 논문은 인공지능의 예술도 인간의 예술처럼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감정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공지능의 예술적 교감 전략, 예술과 감정에 대한 직관, 감정의 표현이나 전시가 중요하지 않은 예술들에 대해 살펴본다.




01. 주요 내용


논문은 먼저 예술이 아닌 '감정 노동' 혹은 정서적 교감의 영역에서 인공지능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가 사교로봇이다. 아이보는 단순한 전자제품이 아니라 '반려 로봇'으로 사용자들은 아이보와 대화하고 옷을 입히고 여행을 함께 다녔다. 수명을 다한 아이보를 위해 합동 장례식이 열리고 편지를 쓰며 눈물을 흘린 사례는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단순한 기계 사용을 넘어선 정서적 유대의 형성이다.


페퍼와 지보 역시 마찬가지다. 이 로봇들의 1차 목표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교감'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들이 실제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감정을 수학적 모델로 처리하고 인간의 표정과 음성, 몸짓을 모방하여 감정 표현을 구성한다. 감정의 체험이 아니라 감정의 연산과 표현이 이루어질 뿐이다.


그럼에도 교감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감정의 실제 체험 여부가 정서적 상호작용의 필수 조건이 아닐 수 있음을 의미한다. 논문은 이 사례를 통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곧바로 관계 형성의 실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 분야의 인공지능 역시 감상자와의 교감을 위해 다양한 전략을 취한다. 작곡 프로그램 에밀리 하웰(Emily Howell)은 특정 작곡가의 스타일을 학습해 새로운 곡을 만들어낸다. 이름부터가 인간 작곡가처럼 들리도록 설정되어 있다. 국내 사례인 이봄 역시 마찬가지다. 프로그램의 기술적 기반은 진화 알고리즘이지만 '이봄'이라는 이름은 마치 사람처럼 인식된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보여준다. 동일한 인공지능 미술 작품을 두 집단에 제시하되 한 집단에는 'AI가 만든 작품'이라는 정보를 제공하고 다른 집단에는 제공하지 않았다. 그 결과 AI 작품임을 인지한 집단의 평가가 전반적으로 더 낮았다고 한다. 호감도와 감정이입, 작품 가치 평가에서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의인화 전략이 일정 부분 친밀감을 형성할 수는 있지만 예술적 정당성을 자동으로 확보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창작의 주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여기서 예술과 감정의 관계를 둘러싼 두 가지 관점이 나오는데 첫째는 표현론적 직관이다.

예술은 예술가가 실제로 체험한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라는 생각이다. 예술 작품이란 예술가의 내면이 외화된 결과물인 것이다. 따라서 감상자는 작품을 통해 예술가의 감정을 공유하고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감정을 체험할 수 없는 인공지능은 본질적으로 예술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둘째는 예술의 본질을 감정에서 찾지 않는 입장이다. 한슬리크(Eduard Hanslick)는 음악의 본질을 감정이 아니라 '형식'에서 찾았다. 음악은 '음으로 울리는 형식'일 뿐이며 감정은 부차적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키비(Peter Kivy)의 윤곽선 이론은 음악이 슬프게 들리는 이유를 작곡가의 감정 체험이 아니라 구조적 특징에서 찾는다. 늘어진 선율과 느린 템포, 하행 진행 등은 슬픔에 빠진 인간의 외형적 특징과 유사하기 때문에 '슬프다'고 묘사될 뿐 실제로 누가 슬픔을 느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입장을 따르면 감정의 체험은 예술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감정적 특성을 드러내는 구조를 생성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예술적 표현은 가능하다.


감정의 표현이나 전시가 핵심이 아닌 예술 사례가 있는데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는 연주자가 아무 음도 연주하지 않는 작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우연히 발생하는 소리'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존 케이지 '4분 33초'



마르쉘 뒤샹(Marcel Duchamp)의 [샘]은 일상의 기성품을 예술로 제시함으로써 예술 제도의 경계를 질문했다. 이 작품에서 감정 표현은 핵심이 아니다.


제목 없음.jpg 출처: 위키백과 [마르쉘 뒤샹의 샘]



Heather Dewey-Hagborg의 [스트레인저 비전스]는 DNA 데이터를 통해 얼굴을 재현하며 감시 사회와 개인정보 문제를 환기한다. 이 작업 역시 감정보다는 개념과 문제 제기가 중심이다.


제목 없음asdasd.jpg 출처: 네이버블로그

(*이미지 출처: Stranger Visions : 네이버 블로그)


이처럼 감정이 예술의 본질이 아닌 경우도 이미 충분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감정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결정적인 결격 사유가 될 수 없다.




02. 논문의 메시지


논문의 결론은 명확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예술의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하는 본질적 이유가 아니다. 감정이 중요한 예술에서도 감정이 핵심이 아닌 예술에서도 실제 감정 체험 여부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가 예술에서 기대하는 '인간적인 가치'다. 우리는 작품에 투여된 시간과 노력 및 창작자의 고통과 체험 그리고 예술가와의 소통감을 높이 평가한다. AI 작품임을 알게 되는 순간 감동이 식어버리는 현상은 감정의 부재 때문이라기보다 인간적 가치의 부재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논문은 낭만주의적 전제를 내려놓을 때 인공지능 예술 고유의 가치 역시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인간 예술을 대체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예술 개념의 경계를 보다 유연하게 보자는 제안에 가깝다.






COMMENT


논문에서는 단순히 'AI도 충분히 잘 만든다'거나 '기술이 발전하면 해결될 문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예술에 대해 무엇을 당연하게 전제해왔는지를 되짚는다. 문제의 핵심을 기술이 아니라 ‘직관’으로 이동시키는 태도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우리는 흔히 예술을 이야기할 때 감정을 강조한다. 슬픔이 담긴 음악과 고통이 스며든 시, 환희가 폭발하는 회화.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형식적 완성도와 구조적 긴장, 개념적 전복을 이야기한다. 감정은 예술의 본질이라고 말하면서도 감정이 거의 개입하지 않는 작품들도 예술로 인정해왔다. 이 모순은 오랫동안 큰 문제 없이 공존해왔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등장하자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창작자가 인간이 아닐 때 우리는 갑자기 감정을 절대적 기준으로 끌어올린다. 마치 그 선을 넘지 못하면 예술의 문턱에도 설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감동의 변화'에 대한 분석이다. 어떤 음악에 깊이 감동했다가 그것이 인공지능에 의해 작곡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감동이 식어버리는 경험.


이는 작품의 구조나 음향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변한 것은 창작 주체에 대한 정보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한 감동은 순수하게 지각적인 것이었을까, 아니면 창작자와의 관계 맺음이 함께 작동한 결과였을까?


나와 같은 생물학적 존재인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과의 연결감이 감상의 깊이를 더하기 때문에 인공지능 예술에서 이 연결감은 약해지거나 사라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감정의 유무라기보다 '인간적인 가치'를 어디까지 예술의 본질로 간주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인간과의 공감, 연대감, 창작자의 삶에 대한 서사적 상상 등. 이것들은 분명 소중하다. 그러나 그것이 예술의 정의 그 자체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논문은 낭만주의적 패러다임, 즉 예술은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숭고한 행위라는 관점을 잠시 내려놓자고 제안한다. 그럴 때 인공지능 예술이 가진 고유한 특성과 방대한 데이터 처리 능력, 인간이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조합, 비인격적 생성 방식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OUTRO


AI는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은 반드시 감정을 느끼는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일까.

논문은 적어도 그 이유만으로 AI를 배제할 수는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감정의 체험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이미 존재해온 수많은 예술을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어쩌면 인공지능 예술의 등장은 예술의 위기가 아니라 기회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예술에서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적인 가치란 무엇인지 다시 묻는 계기가 된다. 예술의 문은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기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열리고 닫힌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