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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랖겪처 Aug 28. 2023

카오폴리스의 1년을 돌아보며

스플래툰 3, 2022

    <스플래툰 3>의 발매가 어느덧 1년을 바라보고 있다. 발매일인 22년 9월 9일을 시작으로, 카오폴리스에서 보낸 시간도 어느덧 900시간에 육박한다. 1년 동안 못해도 매일 두 시간 반은 스플래툰을 하면서 보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살면서 단기간에 이렇게 게임을, 그것도 실시간 대전 TPS를 고강도로 해본 건 스플래툰이 처음이다. 슈팅게임을 좋아하지만 대전 장르가 주는 특유의 피로감 때문에 싱글 캠페인만 플레이해왔던 나에게는 가히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플래툰 시리즈는 평소 대전게임을 즐겨했던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매력을 느끼게 한다. 서구권에서는 공포와 악의 상징인 두족류를 주인공을 내세운 것은 의아함을 자아내며, 자이로에 기반한 섬세한 무빙, 다양한 무기만큼이나 깊게 세분화된 기믹과 운영방식은 전자의 유저들에게 어필한다. 직관적인 룰과 3~5분의 짧은 플레이타임, 카운터 컬처를 기조로 한 캐주얼하면서도 감각적인 아트, 튜토리얼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그 자체로 훌륭한 싱글 캠페인이 되는 히어로 모드는 대전게임에 익숙지 않은 유저들을 단박에 카오폴리스로 끌어들인다.


히어로 모드의 한 장면


    후자에 해당하는 게이머로서, <스플래툰 3>에 이 정도로 빠져들 수 있었던 것에는 히어로 모드의 공이 컸다. 플레이어는 New! 오징어입 부대의 대원 3호가 되어 도시의 주에너지원인 거대 전지메기를 되찾는다는 목표 아래 다양한 미션을 클리어해나가는 것이 해당 모드의 주된 골자이다. 시리즈의 시작부터 아무도 모르게 두족류 세계의 평화를 지켜온 부대의 전신, ‘오징어입 부대’의 기존 대원들도 만나볼 수 있는데, <스플래툰>부터 게임을 즐겨온 유저라면 당시의 주인공 잉클링이던 대원 3호가 사령관이 되어 후배를 맞는 모습을 보고 적잖은 감동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호칭을 또다시 이번작의 플레이어가 물려받아 다시 한번 주인공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 또한 팬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지 않나.


가차없는 얼터너의 미션


    히어로 모드는 작중 등장하는 무기의 기본형과 서브 및 스페셜 웨폰을 어떤 식으로든 간에 한 번 이상 사용하도록 하여 자연스레 전투 방식을 익히게 하고, 미션마다 PVP와 PVE에 대비할 수 있는 다양한 기믹을 배치하여 도전욕구를 자극한다. 브루탈리즘, 코모레비 등 크게 네  가지 테마로 나뉜 아름다운 맵 디자인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얼터너 탐사에 몰입하도록 하여 삽시간에 탈출 시퀀스에 다다르게 만든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드리워진 이상기후, 자명한 식량위기, 기어코 방류되어버린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게임과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 같지만, 히어로모드를 진실에 다다른 ‘대원 3호’라면 누구나 지금 여기의 우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류라는 기존의 정체성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잉클링과 옥토링, 더 나아가서는 우주 그 자체의 시선에서 우리를 돌아보게 될 테니까. 얼터너의 잔해들은 픽션의 요소임과 동시에 자기실현적 예언이기도 하다. 때문에 엔딩에 도달하고 나면 전지메기실종 사건의 범인 같은 건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진범’은 해수면 상승과 사념만을 남긴 채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니까. 때문에 개발진이 전작 시점에서 두족류들과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을 거라 단언했던 연어가 대원 3호의 동료이자 조력자로 활약하게 된 것은 의미가 크다. 이 모든 갈등의 시발점으로 거슬러 가본다면 말이다.


영역배틀에서는 0.1%p의 차이로 승패가 갈리기도 한다 


    스플래툰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상대팀보다 잉크를 더 많이 쏘고 칠한다’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규칙을 통해 전개된다. 이는 시리즈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영역배틀(레귤레 매치)의 바탕이며 타 슈팅장르 게임과 차별되는 스플래툰만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때문에 PVP에 익숙하지 않은 플레이어일지라도 바닥을 칠해나감으로써 팀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게임’을 고집해 온 닌텐도의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칠만 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전선에 서는 데에 자신 있다면 ‘킬’함으로써 ‘칠’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공격적인 플레이로 상대팀의 이목을 쏠리게 하여 다른 팀원들이 칠 하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은 덤이다.


    레귤러 매치에 익숙해졌다면 보다 다양한 룰로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는 카오폴리스 매치에 도전할 수 있다. 맵 전체를 무대로 하는 영역배틀과 달리 룰에 따라 승리에 직결되는 오브젝트에 집중하여 플레이해야 하기 때문에, 보다 전략적인 판단과 무기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탄환 대신 잉크를 사용하여 공격하는 만큼 자신이 사용하는 주무기의 사거리, 곡사, 탄 퍼짐(잉크가 새는 정도) 등을 파악해놓아야 한다. 여기에 <스플래툰 3>에 와서 추가된 징어롤, 징어클라임 등의 기술까지 활용한다면 상대방의 에임을 흔드는 현란한 플레이가 가능하다. 영역배틀의 지극히 단순한 규칙을 단조롭게 느낄 틈이 없게 변주하고자 한 점이 인상 깊다.


    새먼런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작인 스플래툰 2에서 새로이 추가된 PVE 콘텐츠를 ‘새먼런 NEXT WAVE’라는 명칭으로 계승한 것인데, 이번작의 무대인 카오폴리스의 설정에 맞춘 신규맵과 두목연어, 대규모 공습 이벤트인 ‘빅 런’을 포함한다.


새먼런은 4인 협동 플레이로 진행된다


    협동모드라 하면 PVP의 피로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화합의 장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새먼런은 전용작업복의 투박하다 못해 허름한 외형에서 유추할 수 있듯 녹록지 않다. 스플래툰을 처음 접한 플레이어라면 일반 등급을 벗어나자마자 급격히 올라간 난이도와 납품량, 매뉴얼에는 안내되어있지 않은 특수 웨이브에 당황하여 정신을 놓게 되는 경우가 분명 있을 것이다. 불합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들을 연속으로 겪고 나면, 뱃노동을 한 것처럼 곧잘 피로해지곤 한다. 이 콘텐츠의 콘셉트에 더없이 부합하는 후유증이 아닐 수 없다. 확실히 난이도 조정에는 실패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새먼런의 재미임을 부정할 수 없기도 하다.


    스플래툰은 이미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한 시리즈이지만, 본작은 시리즈가 론칭된 지 7년 만에 처음으로 정식 한글화 발매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닌텐도 측에서도 이를 의식한 것인지 ‘Seoyoung’, ‘Jihoon’ 등의 이름을 가진 NPC들이 광장 곳곳을 활보하고 있다.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난다. 뉴스 스킵 기능이라든지, 매칭된 플레이어들을 로비의 프로젝션 기능으로 보여준다든지, 동물의 숲을 맡았던 프로듀서의 센스가 느껴지는 네임 플레이트와 로커 꾸미기까지. 전작에서 아쉬움을 샀던 요소들을 대폭 보완하고 신선함을 더했다. 하지만 서비스 개시 1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다시 평하자면, 그래도 부족하다. 많이 안정되기는 했지만 통신오류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으며, 핑 문제로 의문사를 당하는 것은 이제 일상이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유저들이 입을 모아 원성을 터뜨리는 일자식 맵 구조이다. 신규 유저를 의식했다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아 시즌마다 이루어지는 신규 맵 추가와 전작 맵 복각으로는 한참 부족하게 느껴진다. 맵의 획일성은 가장 큰 이벤트라 할 수 있는 페스티벌에까지 이어진다. 페스티벌 전야의 준비 과정이라든가, 삼합파의 가마와 공연 등 카오폴리스 광장을 한껏 활용한 볼거리는 분명 흥겹다. 하지만 배틀에서는 이 흥분이 오래가지 못한다. 트리컬러 매치라는 새로운 모드가 추가되기는 했어도 결국 평소의 배틀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젤다의 전설 콜라보 페스티벌 전야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스플래툰 2의 페스티벌이 훨씬 다채로웠음은 과거의 기록 몇 개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주제에 맞춰 한껏 단장한 오더폴리스 스퀘어의 모습, 페스티벌에만 사용되는 특수한 잉크, 매번 등장하는 미스터리 존까지. 전작에서 이미 했던 것을 지금 와서 하지 못할 리는 없을 테고, 콘텐츠가 너무 빠르게 소모되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 일부러 미루고 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때가 왔다. 더 나아지지는 못할 망정 전작보다도 못한 운영을 계속해나가면 안 된다. 오는 9차 페스티벌은 분기점으로 삼을 더없는 기회이다. 오징어연구소가 이를 제대로 붙잡아 카오폴리스에서의 남은 1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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