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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연말 회고

by 서희수

꽤 오랜만에 작성하는 연말 회고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는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연말 회고를 작성하지 않은 지 좀 되었다. 그만큼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기만 바빴지,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별로 못 가졌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 사업을 시작했는데 역설적이게도 주체적인 생각을 할 시간은 더 부족해졌다.


올해 있었던 일

제대로 팀을 꾸려 창업한지 이제 1년이 조금 넘었다. 이전에도 계속 사업을 하긴 했지만 사실상 내가 혼자서 다 기획하고 개발하고 운영하는 1인 기업이었고, 코파운더를 모아서 투자를 받고 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전에 운영하던 사업에서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었다. 팀원을 10명씩 데리고 하는 경쟁자들이 있음에도 시장에서 1위 매출을 찍었다. 경쟁자들은 이걸 어떻게 혼자서 다 만들고 운영하는지 신기해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솔직히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좀 있었다.


처음에 시도했던 아이템은 QA 자동화를 AI로 도와주는 SaaS였고, 6개월 만에 피봇을 결정했다. 시작할 때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고, 왜 피봇을 결정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 날 때 따로 글로 정리해 보려 한다. 그다음에는 다양한 아이템을 리서치하고 시도해 봤다. 지금은 내가 그동안 업무에 AI를 활용하면서, AI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형태의 인터페이스는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또 새로운 프로덕트를 만들고 있는데, 이것도 별도의 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한참 피봇을 하던 중에 AI를 활용한 게임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게 갑자기 최근에 유튜버들 사이에서 바이럴이 되면서 사용자가 일주일 만에 만 명 넘게 들어왔다. AI SaaS를 만들다가 갑자기 게임을 만든 게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살아온 과정을 보면 그렇게 뜬금없는 건 아니긴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는 소설을 쓰기도 했고(5회차까지만 연재하다가 공부한다고 중단했는데 그래도 나름 구독자가 100명 정도는 있었다), 한때는 영화감독을 꿈꾸기도 했다. 마인크래프트 같은 오픈월드 게임도 정말 좋아했고, 거의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던 적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림 그려주는 AI나 ChatGPT 같은 LLM이 처음 나왔을 때, 내가 그동안 상상하던 것들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재밌었다. 이제 AI를 잘만 활용하면 진짜 꿈에 그리던 오픈월드 게임이 나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꿈꾸던 것의 가장 단순화된 버전을 만들어본 것이 그 게임이었다.


사실 게임을 만드는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다. 나도 게임을 만들어본 경험이 별로 없기도 했고, 팀원들도 모두 그랬기 때문에 방향성을 공감하기 어려워했다. SaaS 만들자고 팀원들 데려와 놓고 게임을 만들자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결국 게임을 만드는 것은 그만하고 다시 SaaS를 만들기로 했다. 팀이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좋은 성과가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가 만든 게임을 재밌게 플레이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기쁘긴 하다.


나의 올해는 잘 보낸 한 해였나?

올해 내가 세웠던 목표는 다음과 같다.

지적 게으름 경계하기

항상 본질을 보려 하기

모든 것에 진정성을 갖고 임하기


지적 게으름 경계하기

내가 정의하는 지적 게으름이란 쉽게 단정 짓는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게으른 동물이다. 그래서 어떠한 현상을 보고도 쉽게 원인을 단정 짓고, 권위자가 하는 말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한 번 가진 생각을 좀처럼 쉽게 바꾸지 않는다. 게으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본능을 거스르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헬스장에서 힘들더라도 꾸준히 근력운동을 하듯이 말이다.


올 한 해도 지적으로 게을렀던 순간들이 있다. 첫 아이템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낀 것은 사실 올해 초였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과감하게 접자고 얘기하진 못했다. 믿고 투자해 준 투자자들한테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팀원들한테도 어떻게 납득가게 설명할 수 있을지 난감했다. 얼마 해보지도 않고서 그만두자고 얘기하면, 내가 쉽게 포기하는 대표처럼 보일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한 두려움에 나는 게으름을 택했다. 그래서 사업을 질질 끌고 갔다. 내가 더 빠르게 용기를 내 결정을 내렸다면 시간이 더 단축되었을 텐데.


그 외에도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택하기도 했다. 정작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고 그것을 대면해서 풀었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피곤하기 때문에 그냥 미뤄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이건 팀원들과의 의견이나 생각 차이로 인한 문제에 대해 더 그랬다. 그런 문제를 마주하는 것은 감정적인 소모도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내가 진짜로 풀었어야 하는 문제였다. 그게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할 일이 많다는 것은 핑계가 되지 못한다.


항상 본질을 보려 하기

지적 게으름을 경계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항상 본질을 보려 노력하는 것은 내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다. 본질은 굉장히 미묘하고 명문화되기 힘든 것이기에 놓치기 쉽다. 본질은 단순한 형태를 띠는 법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순한 정답을 선호한다. 잘나가는 식당의 레시피 비법만 알아내면 쉽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것만 따라 하면 당신도 월 1000만원 벌 수 있습니다” 같은 강의가 잘 팔리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일 것이다.


본질을 제대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여정이라 생각한다. 올 한 해는 솔직히 당장 닥치는 일 처리하는 데만 급급해 본질을 탐구하는 시간을 많이 못 가진 것 같다. 고민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자주 있었다. 내년에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 말고도 좀 더 큰 그림을 보는 시간을 더 가져야겠다.


모든 것에 진정성을 갖고 임하기

이건 내가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살다 보면 선택을 해야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리고 내 선택이 작든 크든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작게는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 어떤 회사를 만들 것인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일할 것인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모든 것이 다 선택이다. 내 선택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남의 이익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선택일 수도 있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선택일 수도 있다. 매 순간 그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내 선택이 의도치 않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있고. 그 사이에서 내가 갖고 있는 기준은 진정성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어도, 내가 선택을 내리는 모든 순간에 진정성을 갖고 임할 수는 있다. 내가 맞는 선택을 했다고 스스로 믿는지는 나 자신이 제일 잘 안다. 적어도 그것을 속이지는 말자.


그래서 나는 사업을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가치를 제공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구매하고 나서 속았다고 느낄 제품을 만들어서 팔고 싶지는 않다. 사업을 실제보다 더 부풀려서 투자자들을 현혹시켜 투자 받고 싶지도 않다. 내가 진짜로 믿는 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 고객에게 팔고, 투자를 받고, 팀원을 구할 것이다. 이건 올해도 잘 지켰다고 생각한다.


내년의 나에게

올 한 해 가장 생각이 많이 바뀐 부분이 있다면, 팀워크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사실 제대로 팀을 이끌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커뮤니케이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중요했다. 누군가의 밑에서 일해본 적은 있어도, 직접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게 생각보다 정말 어려웠다.


내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대표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팀원들이 같은 목표를 바라볼 수 있게 내가 생각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하기인 것 같다. 혼자서 일할 때는 어차피 내 머릿속에 다 들어있으니까 문제없었는데, 같이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내 생각이 명확히 전달이 안 되었을 때 생기는 문제들이 있었다. 팀원들이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업무를 진행해 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다시 조정하는데 시간과 감정이 소모되는 경우도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왜 내 생각을 몰라줄까 싶어 아쉽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그것을 명확하게 전달한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충분히 전달했었다고 생각했는데, 팀원들과 원온원 미팅을 하면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자주 명확하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사실 솔직함의 문제도 있었다. 내 마음속 깊이 솔직한 생각이 있음에도 그것이 잘못 전달될까 봐, 팀원들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나만 생각하던 것들도 있었다. 그게 별로 안 좋았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거장 테리 길리엄에게 “당신은 비전이 있어요. 구체적인 비전들이 감독님 각 작품에 다 들어가 있죠. 어떻게 하신 거에요?”라고 물어봤을 때, 자신의 인생 최고의 조언을 들었다며 언급한 말이 있다.


쿠엔틴, 네가 할 일은 “비전”을 구체화하는 게 아니야. 네가 해야 하는 일은 너의 “비전”이 무엇인지 아는 거야.
그리고 정말 재능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거야. 그리고 그들의 일은 너의 비전을 만들어내는 거야.
너는 조명 스탠드를 들고 조명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돼. 이 패브릭이 저 벽과 어울리는지 라던가 그런 거 몰라도 돼.
넌 그냥 너의 “비전”을 이해하고 분명하고 명확하게 표현할 줄 알면 돼.
너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그들에게 설명해.
네가 명확하게 설명할 줄 알고, 그들이 재능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너의 “비전”을 만들어 줄 거야.


회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비전을 스스로 이해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것. 2025년에 나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인 것 같다.


밸런스

좋은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은 항상 어렵다. 요즘은 더더욱 밸런스를 잘 유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생기는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다 보니, 깊은 고민을 할 시간도 부족했고, 마음의 여유도 부족했다. 지금도 당장 연말 회고를 작성하면서도 ‘아… 오늘 저 일도 끝내야 되는데 연말 회고 언제까지 쓰지’ 하는 생각이 앞섰다. 계속 이렇게 지속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팀원들에게 내 비전을 명확히 전달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나도 그것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2025년은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책도 좀 읽고, 더 중요한 고민을 하는 시간을 확보해야겠다.


마무리하며

오랜만에 작성하는 연말 회고였는데, 그래도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보니 좋았다. 스스로 칭찬할 것은 칭찬해 주고, 더 발전할 수 있는 부분도 찾고. 글로 정리하다 보면 그것들이 더 명확해진다. 이런 시간을 종종 가져야겠다. 비록 첫 아이템은 잘 안되고 피봇을 하고 있지만, 운이 좋은 한 해이기도 했다. 나를 믿어주고 계속 따라와 준 팀원들에게도, 믿고 투자해 준 투자자들에게도, 나를 응원해 주는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도 한없이 감사하다. 내년에는 사업이 너무 잘돼서 새로운 고민거리들이 마구 생겨나길 바라며, 올 한 해를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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