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 닥쳤을 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계속 머릿속에서만 생각이 맴돈다면
일단 눕는다.
그럼 잠이 온다.
외부상황과 상관없이 침대에 누우면 잠이 잘 드는 편이다.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나면 이전 상황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생각할 수 있게 돼 머리가 조금은 가볍다.
이런 이유로 상황이 버거울 때는 일부러 잠을 자려고 노력한 적도 많았다.
고등학교 3학년, 매미가 쨍하게 울고 뜨거운 햇볕이 무섭게 내리쬐는 8월 한낮의 어느 교실에서 나는 선풍기 하나 의지한 채로 책상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명색이 고3 수험생인데 집에서는 마음 편히 누워있을 수 없었다.
몇 개월 뒤면 수능이 코앞인데 나는 참 무기력했다.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던 고3시절.
아버지가 하필이면 사업하는 친구의 연대보증을 서 우리 집이 망했던 그 시절.
낯선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고 부모님은 매일 같이 싸우고 울고...
맨 정신으로는 집에 들어가기 힘들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보기 싫은 것들을 피해버리기 위해 눈을 감고 암흑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수능을 앞두고 친구들이 그동안 공부한 것들을 최종 정리하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을 때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자려고 노력했고 노력이 실패하면 운동장에 나와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처럼 홀로 앉아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무기력감에 젖어있었고 집에서는 어떤 집중도 되지 않았기에 방학중에 학교에 나와 형식적으로 문제집을 책상에 올려놓고 자고 있었다.
꿈에서 자꾸 차가운 무언가가 내 말초신경을 건드렸다. 그 차가움은 선풍기의 덜덜거리는 바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등줄기를 서늘하게 하는 차가움이었다. 원했던 시원함이 손끝에서 느껴지니 더욱 꿈인 줄 알았다.
곧이어 또 다른 진동이 나를 흔들어 결국엔 잠에서 깨고 말았다.
음악선생님이었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나를 우연히 보게 된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아이스크림 하나를 가져와 내 손끝에 놓았는데 그 차가운 감촉에도 내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내 손을 흔들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아무런 질문도, 아무런 타박도 하지 않고 아이스크림만 주고 먹고 잠 깨라며 그 자리를 떠났다.
고3시절 무기력하고 몽롱했던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시절,
음악선생님이 주고 간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그 순간만큼은 그 차가운 감촉, 더웠던 교실의 온도까지도 선명하고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기록적인 열대야를 매일같이 경신하고 있는 올여름, 유난히 길고 긴 더위 속에서 깰 수 없었던 내 지독했던 여름잠을 깨워준 음악선생님의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