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하드 SF
테드 창이라는 작가 겸 테크니컬 라이터가 쓴 SF 소설 중단편 모음집이다. SF 중에서도 '하드 SF'로 분류된다고 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B%93%9C_SF
SF에 큰 관심이 없었던 터라 하드 SF란 용어도 생소했다. 아래 독서록을 읽으며 하드 SF란 장르를 처음 알게 됐는데 이 책도 이 독서록을 쓰신 분이 추천해 주셨다. 이후 다른 분께 또 이 작가를 추천받아서 책을 구입하게 됐다.
https://brunch.co.kr/@lyingdragon/22
SF라는 장르가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무엇이 하드 SF이고 무엇이 그냥(소프트?) SF인지의 경계도 모호하다. 보통 SF 중에서 과학적 사실에 좀 더 무게를 둔 SF를 하드 SF라고 한다는데 '작가가 창조한 세계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논리적이고 일관적인가'라는 것은 아무래도 콘텐츠를 접하는 독자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유치한 콘텐츠가 누군가에게는 하드 SF 콘텐츠가 될 것이고,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어서 지루하고 따분해지는 콘텐츠가 누군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하드 SF 콘텐츠가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슈퍼 하드 SF 콘텐츠였다. 각 작품 안에서 작가가 설정한 과학적 세계는 적어도 내 수준에서는 훌륭하게 닫혀있었다. 이런 게 하드 SF의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의 서사를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서 하나씩 베일을 벗어나가는 과학적 사실들이 이끌어 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조각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잘 엮여 있어서 가장 바깥에 배치된 허구를 제외하면 그 안에서는 논리적으로 빈틈을 찾기가 어려웠다.
작가가 작품 속 배경을 이 정도 수준으로 설계하기 위해 동원한 배경지식의 수준이 엄청나서 읽다 보면 자연스레 감탄이 흘러나온다. 작가는 특히 수학과 언어(특히 문자)에 관심이 많은 듯한데 그 관심의 수준이 매우 깊어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도 있었다. 변분법이나 페르마의 정리 같은 게 나오는 부분에서는 읽는 것을 멈추고 관련 내용을 조금 찾아본 뒤 다시 읽어야 했다.
또한 전체적으로 묘사가 아주 세밀해서 마치 극사실주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이 끝난 영역을 다른 방식으로 상상해서 묘사하는 게 이 정도로 그럴듯하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설을 읽으며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 가정에 기반해 글을 써 내려가는데 그 말도 안 되는 배경 안에서 과학적 논리를 세밀한 묘사로 워낙 탄탄하게 쌓아나가기 때문에 거미에게 물리거나 방사능을 뒤집어쓰고 초인이 된다는 상상만큼이나(실제로 초인이 되는 이야기도 있다!) 말이 안 되는 가정인데도 읽으면서 흥미가 떨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가정이 소설 후반부에 그럴듯한 반전으로 나타날 때는 작가의 설계에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하나 꼽아 보자면 등장인물들에게 감정 이입이 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캐릭터가 작가가 창조한 세상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수단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떤 작품에서는 생동감 없이 그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여러 개의 톱니바퀴 중 하나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감정을 이입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지옥은 신의 부재'라는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이 시종일관 진지했다. 마션과 비교하자면 위트가 부족하다는 느낌. 어쩌면 위트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와 같은 코드가 필요한 듯.
그럼에도 정말 어렵게 마련한 몇 시간의 자유 시간을 아무 고민 없이 태웠고 후회하지 않았다.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단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요즘 내 취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조금 더 명확히 깨닫기는 했다. 요즘의 난 하드 SF보다는 조금 더 현실에 닿아있는 작품에 손길이 가는 것 같다. 또한 극사실주의 그림보다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나 청신 작가의 정물화같이 이성보다는 감성에 방점을 둔 콘텐츠에 더 꽂히는 것 같다.
https://blog.naver.com/gallery_mac/222918587154
이 작가의 책으로 이 책 이후에 출판된 '숨'이라는 책도 있다. 재밌을 것 같아서 숨까지는 읽어볼 계획이다...라고 말하기엔 이 작가의 책은 이 두 권밖에 없다. 작품을 많이 쓰지 않아서 1990년 이후 발표한 소설이 15편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작품 수가 적어 보이지만 세계적인 IT 기업에서 근무하면서 남는 시간에 이 정도 작품을 썼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괴물 같은 작품을 직장 생활하면서 무려 15편이나 쓴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난 한 달에 독서록 한 편 남기는 것도 힘든데 말이지…).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824800
하드 SF 소설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면 고민할 것 없이 이 책을 선택하면 된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