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ursuit of Homo Sapiens's HappYness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쓴 책으로 2011년에 히브리어로 출판된 뒤 2015년에 한국어로 번역됐다. 책은 현생 인류이자 지구의 지배종인 바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특성과 역사를 다룬다.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꺼운 책이지만 저자의 신선한 시각과 날카로운 통찰력,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에 특유의 비꼬는 유머가 더해져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소설이 아닌 책을 읽으며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쉬웠던 게 얼마만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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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크게 인지 혁명과 농업 혁명, 인류의 통합, 과학 혁명의 4부로 나뉜다. 인류의 역사에 문외한인 내 입장에서는 학창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산업 혁명이 빠져 있는 게 의외였는데 산업 혁명은 과학 혁명 챕터 안에서 다루고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특성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호모 사피엔스는 허구를 만들어 공유할 수 있다.’가 될 것 같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서로 의사소통하거나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거나 조직적으로 사회를 구성해 살아가는 종은 호모 사피엔스 외에도 여럿 있지만 실존하지 않는 것을 상상해서 서로 공유하는 종은 아직 호모 사피엔스 외에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사람이나 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 원숭이를 설득해 지금 우리에게 바나나 한 개를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 천국에서 무한히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끔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포인트는 호모 사피엔스의 허구에 화폐나 국가, 종교, 이데올로기와 같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애써 의식하지 않으면 허구라고 인식하기 힘든 개념들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와 같은 허구를 만들어 공유하는 방법으로 서로 알지 못하는 개체끼리도 성공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능력을 이용해 지구의 다른 모든 종은 물론 유골 분석 결과 호모 사피엔스보다 체격도 좋고 뇌 용량도 컸던 네안데르탈인까지 제치고 지구의 지배종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성경의 창세기, 호주 원주민의 드림타임 신화, 현대 국가의 민족주의 신화와 같은 공통의 신화들을 짜낼 수 있다. 그런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 친밀하게 지내는 소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과 매우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다.
책에서는 이를 인지 혁명이라고 부른다.
전설, 신화, 신, 종교는 인지혁명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 이전의 많은 동물과 인간 종이 “조심해! 사자야!”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인지혁명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자는 우리 종족의 수호령이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인지혁명으로 호모 사피엔스는 부족 정신, 국가, 유한 회사, 인권 등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을 얻었고, 이를 통해 대단히 많은 낯선 사람과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인지 혁명을 거치고 난 뒤의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자기 종족 외에 다른 적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 이후로 이어지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호모 사피엔스끼리 뭉치고 싸우고 지배하고 투쟁한 역사다.
250만 년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는 농업 혁명을 거쳐 농부로 변신했다. 책에서 이 극적인 삶의 변화를 설명한 부분 중 인상적이었던 세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농업 혁명이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는 번영을 선물했지만 호모 사피엔스 각 개체에게는 오히려 더 고된 삶을 선물했다는 것.
두 번째는 농부로 변신한 호모 사피엔스가 열심히 농사를 지은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 사회에 잉여 인력과 잉여 식량이 발생했고, 이 잉여 자원이 정치, 전쟁, 종교, 예술, 철학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 즉 잉여 자원은 열심히 땀 흘려 농사를 지은 호모 사피엔스들의 손이 아니라 식량 생산보다는 허구 생산에 관심이 많았던 지도자 호모 사피엔스들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
세 번째는 농업 혁명과 같은 혁명은 어느 한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이 구상해서 방향을 잡아 실행할 수 있는 게 아니며, 같은 이유로 한 번 시작되면 어느 한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이 절대 멈출 수 없다는 것.
은연중에 혁명이라는 단어에 어떤 로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현재 사회 구조에 너무 만족해서 여기가 바로 천국이라며 매일 행복에 취해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미래에 어떤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 자신의 삶이 극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아마도 다들 한 번쯤은 상상해 봤을 테니 말이다.
농업 혁명은 호모 사피엔스 종의 관점에서는 그런 로망을 실현해 준 혁명이었다. 종의 관점에서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호모 사피엔스 개체 수가 늘어나면 성공이라고 볼 수 있으며, 농업 혁명은 호모 사피엔스의 개체 수를 급격히 불려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된다. 한 회사의 경제적 성공은 직원들의 행복이 아니라 오직 은행잔고의 액수로만 측정된다. 마찬가지로 한 종의 진화적 성공은 그 DNA의 복사본 개수로 측정된다. 만일 더 이상의 DNA 복사본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종은 멸종한 것이다. 돈이 없는 회사가 파산한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한 종이 많은 DNA 복사본을 뽐낸다면 그것은 성공이며 그 종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천 벌의 복사본은 언제나 1백 벌보다 좋다.
다만 종의 성공이 종에 속한 각 호모 사피엔스 개체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책에 따르면 농업 혁명 이후 각 개체 삶의 질은 오히려 후퇴했고, 그 후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렵채집인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은 지역마다 계절마다 크게 달랐지만, 대체로 이들은 그 후손인 농부, 양치기, 노동자, 사무원 대부분에 비해서 훨씬 더 안락하고 보람 있는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풍요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평균 40~45시간 일하며 개발도상국에선 평균 60시간, 심지어 80시간씩 일한다. 이에 비해, 지구상의 가장 척박한 곳에서 살아가는 수렵채집인, 예컨대 칼라하리 사막 사람들은 주 평균 35~45시간밖에 일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흘에 한 번밖에 사냥에 나서지 않으며 채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하루 3~6시간에 불과하다. 평상시에는 이 정도 일해도 무리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칼라하리보다 더욱 풍요로운 지역에 살았던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식량과 원자재를 획득하는 데 이보다 더 적은 시간을 썼을 것이다. 이에 더해 이들에게는 가사노동의 부담이 적었다. 접시를 씻고 진공청소기로 카펫을 밀고 마루를 닦고 기저귀를 갈고 청구서를 납부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수렵채집 경제는 농업이나 산업 시대보다 사람들에게 더욱 흥미로운 삶을 제공했다. 오늘날 중국의 직공은 아침 7시경에 집에서 나와 오염된 거리를 지나 노동착취 공장에 도착한다. 그가 똑같은 기계를 똑같은 방식으로 장장 열 시간 동안 멍하게 돌리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저녁 7시다. 이때부터 접시를 닦고 빨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돌아가지 못할까? 왜 보다 여유로웠던 수렵채집인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 그렇다면 왜 계획이 빗나갔을 때 농경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작은 변화가 축적돼 사회를 바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 때문에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쟁기질을 도입함으로써 마을의 인구가 1백 명에서 110명으로 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중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이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열 명이 있었겠는가? 돌아갈 길은 없었다. 덫에 딱 걸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문득 인공 지능과 같은 IT 기술의 발달이 두려워질 수 있다. 이 또한 농업 혁명이나 산업 혁명과 같은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지도자급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대다수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또 한 번 삶의 질이 후퇴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저자 역시 책의 후반부에서 그런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만약 이것이 혁명이라면 이를 멈추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메일 계정 만들기를 거부하는 신기술 반대론자도 드문드문 있기는 하다. 마치 수천 년 전 농경을 받아들이기 거부하고 사치품 함정을 비켜갔던 일부 인간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농업혁명은 해당 지역의 모든 무리의 동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동이나 중미 어느 지역에서든 일단 한 무리가 정착해서 경작을 시작하면 농업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농경이 급속한 인구성장의 조건을 만들어준 덕분에, 농부들은 순수한 머릿수의 힘만으로 언제나 수렵채집인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수렵채집인은 자신들의 사냥터를 들판과 목초지로 내주고 도망치거나 스스로 쟁기를 잡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어느 쪽이든 과거의 삶의 방식은 끝난 것이었다.
사치품의 함정 이야기에는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다. 인류가 좀 더 편한 생활을 추구한 결과 막강한 변화의 힘이 생겼고 이것이 아무도 예상하거나 희망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일부러 농업혁명을 구상하거나 인간을 곡물 재배에 의존하게 만들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월든 호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이 똑똑하고 심지가 굳은 호모 사피엔스도 그저 자기 한 몸 잠시 그 물결에서 벗어나 있었을 뿐 각 개체의 삶을 이전보다 피폐하게 만들었던 산업 혁명을 멈추거나 되돌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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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농업 혁명을 통해 발생한 잉여 자원이 허구 생산에 투입되면서 호모 사피엔스는 더욱 탄탄하고 강력한 허구 개념들을 만들어 더욱 많은 개체가 효율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책은 문화와 돈, 제국, 종교, 이데올로기와 같은 강력한 허구 개념들의 특성을 설명하고 호모 사피엔스 통합에 어떤 식으로 기여했는지 살펴본다.
먼저 저자는 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신화와 허구는 사람들을 거의 출생 직후부터 길들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기준에 맞게 처신하며, 특정한 것을 원하고, 특정한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공적 본능을 창조했다. 이런 인공적 본능의 네트워크가 바로 ‘문화’다.
또한 저자는 문화는 인간이 만든 질서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아서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 변화를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작고 단순한 문화들이 뭉쳐서 더 크고 복잡한 문명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모순이 없는 물리법칙과 달리, 인간이 만든 모든 질서는 내적 모순을 지닌다. 문화는 이런 모순을 중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런 과정이 변화에 불을 지핀다. … 프랑스혁명 이래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은 점차 평등과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모순된다.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 없다. 모든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필연적으로 평등에 금이 간다.
저자는 문화에 이어서 가장 획기적이고 보편적이며 효율적인 상호 신뢰 시스템인 돈을 다룬다.
서로의 신앙에 동의할 수 없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돈에 대한 믿음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종교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반면에, 돈은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믿는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언가는 수천 년에 걸쳐 돈을 흉보면서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매도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한편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돈은 언어나 국법, 문화코드, 종교 신앙, 사회적 관습보다 더욱 마음이 열려 있다.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기도 하다. 돈 덕분에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처음에는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금이나 은 같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물건을 화폐로 사용하다가, 이후 직접 들고 다니기 힘든 금이나 은 대신 이것들로 바꿀 수 있는 권리를 증명하는 종이를 사용했고, 이후 아예 종이와 금과의 연결 고리까지 끊어버렸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이제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는 아예 종이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저장돼 있는 0과 1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저자는 돈의 긍정적인 의미뿐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도 살펴본다.
돈은 지역 전통, 친밀한 관계, 인간의 가치를 부식시키고 이를 수요와 공급의 냉정한 법칙으로 대체한다. … 돈이 서로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편적인 신뢰를 쌓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신뢰는 인간이나 공동체, 혹은 신성한 가치가 아니라 돈 그 자체 그리고 돈을 뒷받침하는 비인간적인 시스템에 투자된다. 우리는 이방인이나 이웃집 사람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지닌 주화를 신뢰할 뿐이다. 그들에게서 주화가 떨어지면 우리의 신뢰도 사라진다. 돈이 공동체, 신앙, 국가라는 댐을 무너뜨리면, 세상은 하나의 크고 비정한 시장이 될 위험이 있다.
얼마 전에 읽은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칼 마르크스가 했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다. 저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지닌 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제사는 미묘한 춤과 같다. 사람들은 이방인과의 수월한 협력을 위해서 돈에 의존하지만, 그것이 인간적 가치와 친밀한 관계를 손상시킬까 봐 두려워한다. 한편으로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돈과 상업의 이동을 막아온 공동체라는 댐을 기꺼이 파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와 종교와 환경이 시장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막아줄 댐을 건설한다.
인류의 통합에 크게 일조한 다음 개념으로 제국이 등장한다. 저자는 대표적인 예시로 로마와 영국 제국을 살펴보는데 각 제국이 취한 방법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로마와 영국이 인류 통합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챕터에서는 일본 제국에 점령당한 가슴 아픈 역사가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할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이 직접 예시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많은 한국 독자들이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상황에 대입해 볼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설령 우리가 더 이전에 존재했던 진정한 문화를 재건하고 지키려는 희망에서 잔인한 제국의 유산을 모조리 거부하더라도, 보나 마나 그때 우리가 지키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고 덜 야만적인 제국의 유산에 불과할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배로 인해 인도 문화가 불구가 되었다고 분개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굴 제국의 유산과 그들의 델리 점령을 신성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외래 무슬림 제국의 영향에서 ‘진정한 인도 문화’를 구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굽타 제국, 쿠샨 제국, 마우리아 제국의 유산을 신성시하는 셈이다. 만일 어떤 극단적 힌두 민족주의자가 있어서 뭄바이 기차역을 비롯해 영국 정복자가 남긴 모든 건물을 파괴한다면, 인도의 무슬림 정복자들이 남긴 타지마할 같은 구조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문화적 유산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정말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 첫걸음은 이 딜레마가 복잡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선인과 악당으로 나누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가 보통 악당들의 뒤를 따른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려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다음으로 종교가 등장하고, 종교와 함께 이데올로기가 등장한다. 이 책에서 접한 가장 신선한 발상 중 하나가 이데올로기를 종교의 한 갈래로 본 저자의 시각이었다.
먼저 저자가 생각하는 종교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다. 모든 사회 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모두 취약하게 마련이다. 사회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이처럼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종교는 우리의 법은 인간의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절대적인 최고 권위자가 정해놓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러면 최소한 몇몇 근본적인 법만큼은 도전받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사회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1. 종교는 고립된 관습이나 신념이 아니라 규범과 가치의 체계다. 행운을 얻겠다고 나무토막을 두드리는 건 종교가 아니다. 환생에 대한 믿음까지도 특정한 행동 기준을 세우지 못한다면 종교라고 할 수 없다.
2. 종교라고 인정되려면 해당 종교의 규범과 가치체계가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초인간적 법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프로 축구는 종교가 아니다. 수많은 규칙과 의식과 이따금 기묘한 의례가 있지만, 모두가 잘 알듯이 축구는 인간이 발명한 것이다. 국제축구연맹은 언제라도 골문의 크기를 늘리거나 오프사이드 규칙을 폐기할 수 있다.
첫째, 언제 어디서나 진리인 보편적이고 초인적인 질서를 설파해야 한다. 둘째, 이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달리 말해, 종교는 보편적이면서 선교적이어야 한다.
이 정의에 기반해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던 몇 가지 종교의 역사를 훑는다. 종교에 대한 저자의 시각 중 가장 흥미롭고 신선했던 몇 부분을 발췌해 왔다.
다신교의 통찰은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낳기 쉽다. 다신교도들은 한편으로는 하나의 최고 권력, 완벽하게 무심한 권력을 믿고 다른 한편으로는 편견을 지닌 수많은 권력을 믿기 때문에, 하나의 신에 헌신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신들의 존재와 효험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다. 다신교는 본질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으며 ‘이단’이나 ‘이교도’를 처형하는 일이 드물다. … 다신교도는 심지어 거대한 제국을 정복했을 때도 피정복민을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 아즈텍 제국에서 피정복민들은 우이칠로포치틀리 신전을 지어야 했지만, 기존의 지역 신전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그 옆에 세웠다. 많은 경우 제국의 엘리트 자체가 피정복민의 종교와 의례를 받아들였다. 로마인들은 아시아의 키벨레 여신을, 이집트인들은 이시스를 그들의 만신전에 기꺼이 추가했다. … 다신교를 믿는 로마 황제가 기독교인을 박해한 사건은 네 차례를 넘지 않았다. 지역의 행정관과 총독이 자기들 나름으로 반기독교적 폭력을 일부 일으켰을 뿐이다. 3세기에 걸친 모든 박해의 희생자를 다 합친다 해도,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은 사랑과 관용의 종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
16-17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 전쟁은 특히 악명 높다. … 둘 사이의 신학 논쟁은 16-17세기에 매우 격렬해져서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는 수십만 명이나 서로 살해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을 기념해 조르조 바사리를 시켜 바티칸의 방 하나를 프레스코로 장식했다. 이 하루 동안 기독교인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다신교를 믿는 로마 제국이 제국의 존속 기간을 통틀어 살해한 기독교인의 숫자보다 많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신교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계속해서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었고, 우주의 최고 권력이 자신들의 세속적 욕구에 비해 너무 멀고 낯설다는 시각을 견지했다. 일신교들은 요란한 팡파르를 울리면서 대문으로 잡신들을 내쫓고서는 창문을 통해 이들을 다시 끌어들였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성자들로 구성된 나름의 만신전을 발달시켰는데, 이것은 다신교의 만신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 기독교의 수많은 성인들, 가령 기독교 전래 이전 켈트 섬의 최고 여신은 브리지드였다. 이 섬이 기독교화하자 브리지드도 세례를 받았다. 이제 성 브리지드가 된 그녀는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에서 오늘날까지도 가장 큰 추앙을 받는 성인이 되었다.
다신교는 일신교만 낳은 것이 아니라 이신교도 낳았다. 이신교는 서로 반대되는 두 힘의 존재를, 즉 선과 악을 믿는다. 일신교와 달리 이신교에서 악은 독립적인 힘이다.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그 신에 종속된 것도 아니다. 이신교는 온 세상을 이들 두 힘의 전쟁터로 본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싸움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신교는 이른바 악의 문제에 간명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인 세계관이다. … 하지만 이것은 직관에 반하는 답으로서, 즉각 수많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 일신론자가 어떻게 그런 이신론적 신념을 품을 수 있을까(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것은 구약에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 하지만 인간에게는 모순을 믿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 역시 그 기원은 이신론에 있었다. 구약에는 이런 믿음의 흔적조차 없다. 사람들의 영혼이 육체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 산다는 주장 또한 전혀 나오지 않는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다른 종교보다 불교의 교리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역사학자로서 당연히 그랬을 수도 있지만) 꽤나 깊이 불교의 교리를 공부한 것처럼 느껴지며 이 챕터에서 뿐 아니라 이후 챕터에서도 불교의 교리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설명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불교 등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종교를 살펴보고 난 뒤에는 일반적으로 종교로 분류되지 않지만 저자가 보기에는 종교인 이데올로기를 훑어본다.
지난 3백 년은 흔히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가 점차 중요성을 잃어가며 세속화가 진행된 시기로 묘사된다. 유신론적 종교에 대해서라면 대체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자연법칙 종교를 고려한다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근대는 강력한 종교적 열정의 시대, 전대미문의 포교 노력과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의 시대였다. 수많은 자연법칙 종교가 근대에 새로이 등장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국가사회주의가 그런 예다. 이들은 종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이데올로기라고 칭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용어상의 문제일 뿐이다. 만일 종교를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인간의 규범과 가치 시스템이라고 정의한다면, 공산주의는 이슬람교에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종교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인본주의 등 이데올로기 역시 종교의 한 갈래로 보는 게 맞다는 저자의 관점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챕터 마지막에서 저자는 다시 한번 문화를 다루는데 상당히 독특한 관점에서 문화를 다룬다.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문화를 일종의 정신적 감염이나 기생충처럼 보고 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새 숙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 성공적인 문화란 그 숙주가 되는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 데 뛰어난 문화다.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읽고 싶어졌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76524
과학 혁명은 학창 시절에 많이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아서 조금 생소했다(졸았나?). 저자가 말하는 과학 혁명의 핵심은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의 자원을 이미 존재하는 능력이 아니라 새로운 능력을 얻는 데 투자하기 시작했다’이지 않을까 싶다. 수많은 경험이 쌓이면서 과학 지식을 연구하는 것이 스스로의 능력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호모 사피엔스가 과학 연구에 자원을 투자하기 시작한 것이 과학 혁명이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현대 과학과 전통 지식의 차이점을 설명한 아래 문단이 과학 혁명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현대 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고 가정하며,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면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 이론도 신성하지 않으며 도전을 벗어난 대상이 아니다.
-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무지를 인정한 현대 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삼는다. 그 수단은 관찰을 수집한 뒤, 수학적 도구로 그 관찰들을 연결해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새 힘의 획득. 현대 과학은 이론을 창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론을 사용해서 새 힘을 획득하고자 하며, 특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한다.
고대의 전통 지식은 오로지 두 종류의 무지만을 인정했다.
첫째, 한 개인이 뭔가 중요한 것에 대해 무지할 수는 있었다. 그가 필요한 지식을 얻으려면, 자신보다 현명한 누군가에게 묻기만 하면 되었다.
둘째, 하나의 전통 자체가 뭔가 중요치 않은 것에 대해 무지할 수는 있었다. 위대한 신들이나 과거의 현자들이 우리에게 애써 말해주지 않은 것은 그게 무엇이든 정의상 중요치 않은 것이었다.
저자가 설명한 과학 혁명의 특성도 꼭 한 번 읽어볼 만하다.
과학 혁명은 되먹임 고리다. 과학이 진보하려면 연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과학과 정치와 경제의 상호 강화에 의존한다. 자원을 제공하는 정치 경제적 제도가 없으면 과학 연구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대신 과학 연구는 새로운 힘을 제공하는데, 이 힘은 새로운 자원을 획득하는데도 쓰인다. 새 자원의 일부는 연구에 재투자된다.
바로 이 과학 혁명의 특성이 왜 과학 혁명이 서구에서 시작됐는지 말해준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그거라면 공짜로 베끼거나 사들일 수도 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 방식이 달랐던 탓에 그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과학이 제국에게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제공했다는 관점도 신선했다.
근대 유럽인들은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은 언제나 선이라고 믿게 되었다. 제국에서 새로운 지식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덕분에, 제국에는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사업이란 이미지가 붙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지리학, 고고학, 식물학 같은 과학의 역사는 적어도 간접적으로라도 유럽 제국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식물학의 역사에는 호주 원주민의 고통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지만 제임스 쿡이나 조지프 뱅크스에 대한 호의적인 말은 몇 마디 있는 게 보통이다.
사명감에 가득 찬 얼굴로 배에 오르는 제임스 쿡 선장이 떠올랐다. 참고로 제임스 쿡은 캡틴 쿡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책과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시계 브랜드 Rado에서 판매하는 캡틴 쿡이라는 시계를 알 것이다. 방수 능력이 뛰어난 다이버용 시계인데 캡틴 쿡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https://www.rado.com/ko_kr/collections/captain-cook.html
물론 저자는 유럽 제국의 과오도 분명히 언급한다.
1764년 영국은 인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벵골 지방을 정복했다. 새 지배자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부유해지는 데만 쏠려 있었다. 이들은 파멸을 초래하는 경제정책을 채택했고, 이 정책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벵골 대기근을 낳았다. 기근은 1769년 시작되었으며 이듬해 파국적인 수준에 도달해 177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재앙으로 벵골 주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천만 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
캡틴 쿡 역시 검색해 보면 선원들이 뉴질랜드에서 원주민을 학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본인 역시 원주민과의 분쟁으로 하와이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제국은 너무나 많은 곳에 너무나 많은 영향을 끼쳐서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사실은 압제와 착취의 이야기도, 백인의 짐 이야기도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유럽 제국들은 너무나 큰 규모로 다양하고 수많은 일들을 했기 때문에, 무슨 주장에 대해서든 그에 맞는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제국과 과학의 관계를 설명한 저자는 그 두 허구가 호모 사피엔스 사회에서 성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으며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자본주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과학과 제국의 일약 성공 뒤에는 특히 중요한 힘 하나가 숨어 있었다. 자본주의다. 만일 돈을 벌려는 사업가들이 없었더라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고, 제임스 쿡은 호주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며,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그 작은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특성과 그 특성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은 꼭 한 번 읽어볼 만하다.
근대 경제사를 알기 위해서 정말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 ‘성장’이란 단어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단순한 ‘부’와 구별한다. 자본이란 생산에 투자되는 돈과 재화와 자원을 말한다. 반면에 부는 땅에 묻혀 있거나 비생산적 활동에 낭비된다. 비생산적인 피라미드에 자원을 쏟아붓는 파라오는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스페인의 보물선단에서 약탈한 금화를 상자에 담아 카리브해의 어느 섬에 묻어둔 해적은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수입의 일부를 주식시장에 투자한 공장 노동자는 자본주의자다.
자본주의에는 하나의 윤리가 포함돼 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심지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까지 일러주는 가르침들이다. 그중 가장 핵심 신조는 경제성장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 최소한 그 대용품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와 자유, 심지어 행복까지도 경제성장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자에게 짐바브웨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 정의와 정치적 자유를 도입할 방법을 물어보라. 경제적 풍요와 번영하는 중산층이 안정적 민주제도에 얼마나 핵심적인지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프가니스탄 부족민들에게 자유 기업과 검약과 자립의 가치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말도 듣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종교는 현대 과학의 발달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과학 연구자금은 정부나 민간기업에서 조달하는 것이 보통인데, 자본주의 정부와 기업이 특정 과학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은 보통 “이 프로젝트는 우리의 생산량과 수익을 늘려줄 것인가? 경제성장을 만들어낼 것인가?”이다. 이 장애물을 못 넘는 프로젝트는 후원자를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근대 과학의 역사에서 자본주의를 관련시키지 않을 길은 없다.
반대로, 자본주의의 역사는 과학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다. 영원히 계속되는 경제성장에 대한 자본주의자의 믿음은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지식에 위배된다. 양의 공급이 무한정 확대될 수 있다고 믿는 늑대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멍청이들의 사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의 경제는 근현대 기간 내내 어찌해서든지 계속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 왔는데, 이것은 오로지 과학자들이 몇 년마다 한 번씩 새로운 발견이나 장치를 들고 나온 덕분이었다. 예를 들면 아메리카 대륙, 내연기관, 유전자 복제 양 같은 것을. 은행과 정부는 돈을 찍어내지만 궁극적으로 그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과학자들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이윤이 공정한 방식으로 얻어지거나 공정한 방식으로 분배되도록 보장하지 못한다. 그렇기는커녕, 이윤과 생산량을 늘리려는 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성장이 최고의 선이 되고 다른 윤리적 고려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을 때, 그 성장은 쉽사리 파국으로 치닫는다.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자만이 운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던 유일하게 진지한 시도는 공산주의였으나, 그것은 거의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빴기 대문에 다시 시도해 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원전 8500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만 한다. 상어가 계속 헤엄치지 않으면 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누군가 제품을 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조업자와 투자자는 함께 파산할 것이다. 이런 파국을 막으면서 업계에서 생산하는 신제품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항상 구매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윤리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비지상주의다.
소비지상주의는 대중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에게 탐닉은 당신에게 좋은 것이며 검약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설득하려 무진장 애썼다.
설득은 먹혔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훌륭한 소비자다. 우리는 실제로 필요하지 않은 상품들을 무수히 사들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것들을 말이다. 제조업자들은 일부러 수명이 짧은 상품들을 고안하고, 이미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제품을 불필요하게 갱신하는 새 모델을 발명한다. 이것은 유행을 따르려면 반드시 사야 하는 물건이다. 쇼핑은 인기 있는 소일거리가 되었으며, 소비재는 가족, 배우자, 친구 관계의 핵심 매개물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종교 휴일은 쇼핑 축제가 되었다. 미국의 경우 심지어 현충일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의 특성을 얘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산업 혁명 이야기가 나온다. 최근에는 액세서리 역할이 더 강조되는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그 본질은 시간을 측정하는 기계인 손목시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산업 혁명이 어떻게 시계와 시간표의 발전을 촉진한 것인지에 관한 다음 얘기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전통 농업은 자연의 시간과 유기적 성장의 주기에 의존했다. 대부분의 사회들은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능력이 없었으며 그런 측정을 하는 데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다. 시계와 시간표 없이도 세상은 탈 없이 굴러갔으며, 이를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태양의 움직임과 식물의 성장주기뿐이었다. … 중세 농부나 구두공과 달리 현대 산업은 태양이나 계절을 거의 상관하지 않는다. 대신 정밀성과 획일성을 신성시한다. 중세 공방에서는 구두공 각자가 밑창에서 버클에 이르는 신발 전체를 만들었다. 한 명의 출근이 늦는다 해도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일이 늦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구두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노동자들은 각자 한 대씩 기계를 담당하는데, 기계들은 구두의 극히 일부분만을 만들어 그 제품을 다음 기계로 넘긴다. 만일 5번 기계를 조작하는 노동자가 늦잠을 자면 다른 모든 기계의 작동이 멈춘다.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정확한 시간표를 준수해야 한다.
또한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깊이 감명을 받으며 위로받은 사람이자, 그 누구보다도 최근 한국 사회의 분위기(특히 회사 사무실의 업무 분위기)가 각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반가워하는 사람으로서 다음 문단을 발췌하지 않을 수 없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779409
산업혁명은 불과 2세기 남짓 만에 가족과 공동체라는 단위들을 산산이 깨부쉈다. 가족과 공동체가 수행하던 전통적 기능은 대부분 국가와 시장에게 넘어갔다.
국가와 시장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말했다. “개인이 되어라. 누가 되었든 네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라. 부모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네게 맞는 직업을 택하라. 그 때문에 공동체의 연장자가 눈살을 찌푸리더라도. 어디가 되었든 네가 원하는 곳에서 살아라. 그 때문에 가족 만찬에 매주 참석할 수 없게 되더라도. 당신은 더 이상 가족이나 공동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 즉 국가와 시장이 당신을 돌볼 것이다. 식량과 주거, 교육과 의료, 복지와 직업을 제공할 것이다. 연금과 보험을 제공하고 당신을 보호해 줄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더 개인적인 것은 정말 나의 천성인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보다 국가와 시장의 제안이나 산업 혁명의 영향에 취약해서, 혹은 그와 같은 자극에 예민해서 그런 성향이 만들어진 것일까?
산업 혁명을 지나온 저자는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이 시작된 근본적인 질문인 것 같은 현대 호모 사피엔스의 행복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굳이 자료를 조사할 필요도 없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무서운 속도로 개체 수를 늘려가며 지구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각 호모 사피엔스 개체는 별로 행복한 것 같지 않다.
2000년에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31만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이와 별도로 52만 명이었다. … 거시적 시각에서 보면, 이 83만 명은 2000년의 총 사망자 5,600만 명에서 1.5퍼센트를 차지할 뿐이다. 그해에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26만 명, 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81만 5천 명이었다. 2002년의 수치는 더욱 놀랍다. 총 사망자 5,700만 명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17만 2천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56만 9천 명에 불과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살자는 87만 3천 명에 이르렀다.
저자는 물질적인 면에서는 과거의 호모 사피엔스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가진 현대 사회의 호모 사피엔스가 왜 행복 지수는 오히려 떨어졌는지 살펴본다. 과거에 비해 가족과 공동체의 힘이 약해진 측면을 살펴보기도 하고, 행복이란 것이 그와 같은 객관적 조건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기대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살펴보기도 한다. 이어서 유전적인 측면과 생명 공학, 뇌 과학 측면도 살펴보기도 하고, 앞서 종교 챕터에서 잠시 언급했던 불교의 교리를 탐구하기도 한다. 아직 불교의 교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저자가 설명하는 불교의 교리가 꽤나 흥미로워서 발췌해 왔다.
불교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불교는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 …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 방식은 생물학적 접근 방식과 기본적 통찰의 측면에서 일치한다. 즉, 행복은 외부 세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이런저런 측면을 살펴보지만 결국 저자도 확실한 결론에 이르지는 못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고 한다.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초기 가설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연구방법을 찾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확고한 결론을 채택하고 논의를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논의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접근법을 되도록 많이 알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연구가 어떤 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궁금하다. 기회가 닿는다면 이런 연구에 참여해 보고 싶지만 지금까지의 내 커리어와 너무 거리가 먼 분야라서 현실적으로 기회가 닿을 수 있을까 싶다.
현대 호모 사피엔스의 행복을 훑어본 저자는 마지막으로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를 짐작해 본다. 과학 혁명의 시대답게 세 가지 과학적 측면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첫 번째는 유전 공학의 측면이다. 저자는 과거 강력한 종교의 그늘 아래 오랜 기간 지적 설계론을 믿다가 과학의 발전으로 진화론으로 넘어왔던 우리가, 유전 공학의 발달로 다시 지적 설계론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생겼다고 말한다. 이미 우리는 부분적으로나마 지적 설계가 도입된 생물들을 많이 접하고 있다. 저자가 예시로 든 형광 토끼 알바의 사례도 있을 것이고 GMO 식품도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로 저자는 사이보그를 살펴본다. 호모 사피엔스의 신체에 기술을 접목해 호모 사피엔스의 능력을 향상하는 쪽으로 인류가 진화해 나갈 수 있다는 관점이다. 저자가 제시한 흥미로운 예시를 발췌해 왔다.
만일 뇌가 집단적인 기억은행에 직접 접속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기억, 의식, 정체성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런 상황이 되면 가령 한 사이보그가 다른 사이보그의 기억을 검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마치 자신의 것인 듯 기억하게 된다. 이것은 남의 기억을 듣거나 자서전을 통해 읽거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마음이 집단으로 연결되면 자아나 성정체성 같은 개념은 어떻게 될까? 어떻게 스스로를 알고 자신의 꿈을 좇을까? 그 꿈이 자신의 마음속이 아니라 모종의 집단 꿈저장소에 존재한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야기한다. 최근 여러 유수 IT 회사에서 경쟁적으로 내놓은 생성형 AI 상품을 살펴보면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살아 있는 피조물의 정의를 조만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수도 있겠다.
스스로 진화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수천 개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주식시장에 투자를 하고, 각기 다른 전략을 쓰면서 일부 프로그램은 파산하고 일부는 또 억만장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류는 경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기술을 발전시킬 것이다. 마치 사피엔스가 침팬지에게 월스트리트를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컴퓨터 역시 사피엔스에게 투자 전략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중 다수는 결국 그런 프로그램들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돈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특정 직업에 누구를 고용할 것인가, 누구에게 주택 융자를 해줄 것인가, 누구를 감옥에 보낼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이것들은 살아 있는 피조물일까? 그 답은 살아 있는 피조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렸다. 이 컴퓨터 프로그램이 유기체 진화의 법칙과 한계와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진화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발전을 바라보는 네안데르탈인의 심정이 지금 내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 역시 그런 감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대부분의 사피엔스를 극단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는 미래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빠른 우주선을 타고 이 행성에서 저 행성으로 여행하리라고 믿고 싶다.
미래에는 우리와 동일한 감정과 정체성을 지닌 존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자리는 우리보다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난 외계 생명체가 차지할 것이란 가능성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과학자들이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힘든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미래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우리보다 진실로 우월한 존재를,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을 바라보듯이 우리를 무시하면서 바라볼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호모 사피엔스를 검색해 보면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인류’라고 나온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B%AA%A8_%EC%82%AC%ED%94%BC%EC%97%94%EC%8A%A4
이 정의를 이 책의 내용에 맞게 수정하면 ‘허구를 만들어 공유하는 방법으로 서로 알지 못하는 수많은 개체가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생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인류’가 될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이 하나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줄곧 강조해 온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이 허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인데 최근 거짓 정보를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말하는 존재로 화제가 된 무언가가 생각나지 않는가?
https://news.einfomax.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69783
다음은 ChatGPT가 약수에 관해 허구를 말하는 장면이다.
다음은 ChatGPT가 역사에 관해 허구를 말하는 장면이다. 아래 스크린 숏에서 가린 것은 내 이름이다.
Google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 보면 중국 후한 말의 동명이인이 한 명 나올 뿐 서구권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사실 지극히 한자 문화권의 이름이라 서구에서 나오기 어려운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동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키예프 루서스' 혹은 '루시아'라는 나라나 '바리안 산', '바리안 부족' 같은 것도 검색 결과에서 찾을 수 없었다. 즉, ChatGPT는 얼핏 호모 사피엔스의 신화와 비슷한 아주 그럴듯한 허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아직 호모 사피엔스가 만드는 허구에 비할 바가 되지는 못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역시 최초에는 이 정도 수준의 허구로 시작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원리를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면 호모 사피엔스가 허구를 만들어 낸 과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과정을 거쳐 생산된 허구라는 결론이 내려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단 결과만 놓고 보면 호모 사피엔스 외에 허구를 생산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저자는 위와 같이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는 미래에 제대로 대비하려면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만일 사피엔스의 역사가 정말 막을 내릴 참이라면, 우리는 그 마지막 세대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질문에 답하는 데 남은 시간의 일부를 바쳐야 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인간 강화’ 문제라고도 불리는 이 질문에 비하면 오늘날 정치인이나 철학자, 학자, 보통 사람들이 몰두하고 있는 논쟁은 사소한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종교, 이데올로기, 국가,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과 함께 사라질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후손들의 의식이 작동하는 차원이 정말로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면, 그들이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관심을 갖는다거나, 사회 조직이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라거나, 성별이 남성과 여성으로 갈린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역사상의 위대한 논쟁들은 중요하다. 적어도 이 신들의 첫 세대만큼은 인간 설계자들의 문화적 아이디어에 따라 그 모습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이미지에 따라 창조될까? 자본주의? 이슬람? 페미니즘?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그들이 가는 길은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이대로 브레이크를 밟고 호모 사피엔스를 다른 종류의 존재로 업그레이드하는 과학 프로젝트들을 중단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착각이다.
이런 프로젝트들은 불멸을 향한 탐구 - 길가메시 프로젝트- 와 떼려야 뗄 수 없이 깊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길가메시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을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이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나는 저자가 던진 마지막 질문인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가 아직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 고민의 깊이가 얕은 것인지 저자의 질문이 적절하지 않은 것인지는 조금 더 고민해 보면 알게 되겠지.
그나저나 책을 읽으면서 불교를 한 번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는데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번뇌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면서 완전한 평정을 얻는다’는 게 도대체 어떤 느낌인지 한 번 경험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