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성이 춤추는 파리 현대미술관
파리 현대미술관 안에서 큰 벽에 그려진 앙리 마티스의 ‘Le Danse’ 실물을 보고 있다. 춤을 소재로 한 글과 그림에는 한 줌 더 애정이 간다.
그가 그린 엉덩이의 곡선과 팔 선이 만들어내는 흥겨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춤을 추는 인간의 몸짓이 얼마나 야성적이고 아름다운지. 아치 형태로 그림을 감싸고 도는 캔버스는 그림에 역동감을 더한다. 몸을 이루는 곡선이 직선처럼 보이는 배경과 맞물려 동작을 더욱 매끄럽게 보여준다.
지나치게 간소화된 가슴은 단순한 동그라미다. 이걸 가슴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나의 학습된 편견인가 의심을 품어본다. 이미 이 선과 면과 도형으로 그려진 몸의 형태에서 인간이 가진 원시성을 발견해버렸다.
등을 가르는 빼어난 능선은 앞모습 뿐 아니라 뒷모습의 아름다움까지 간직하고 있다. 춤을 추는 인간 본연의 관능을 따라 미끄럼틀을 타고 싶다.
결국 옷을 벗으면 다 같은 사람이다. 서로의 지위고하를 나누는 것은 옷이다. 맨 몸으로 쫓겨난 조상들과 함께 지체 없이 옷을 벗어 던지고 춤을 춘다. 이카루스의 날개를 벗고 훨훨 날아오른다.
언젠가 아무도 모르는 나라에서 누드모델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한다. 본연의 날 것과 겹쳐지는 뱃살의 나른함이 공존하는 울퉁불퉁한 몸뚱아리. 많은 작품에 축 처진 인간의 맨살들이 등장한다.
모두가 옷을 벗고 춤을 춘다면 앙리 마티스가 그린 것처럼 탱글탱글한 몸매를 가질 수 있을텐데, 감추고 구부리는 순간들 속에 우리의 위선은 켜켜이 쌓여 내장지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