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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씨네 Oct 29. 2019

<누들>(Noodle, 2007) 리뷰

강원, 영화학교 영화읽기 워크숍 5주차

영화소개

<누들>(Noodle, 2007)

감독 : 아일레트 메나헤미

러닝타임 : 100분

장르 : 드라마

출연 : 밀리 아비텔(미리 역), 바오치 첸(누들 역), 아낫 왁스만(길라 역) 등



때로는 닿지 않기에 더 위로가 되는, 


2019년 10월 25일 금 오전 3:03     


#기록

분명히 보았던 영화인데, 해피엔딩이었던 것도 기억나고, 그런데 도통 뒷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길라가 함께 베이징에 간다고 하기 전까지는. 보면서 엄청 울었던 것도 뒤늦게 생각났다. 기억은 이렇게나 불완전해서, 기록을 해두어야 한다. 기록 자체도 남겠지만,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한 번 되새김질을 하면 기억도 조금 더 공고해지겠지.


#리위_귀여워

리위가 너무나 귀여워서 심쿵.


#대화

감정이 상했을 때 서로 대화하는 모습이 우리나라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쏘아대고 비꼬는 말을 마구 퍼붓는 것. 그러나 아예 단절되거나, 폭력적으로 화가 터져나오는 것보다는 낫다.


#대화2

미리와 리위가 미리의 전 남편들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 말이 통하지 않아 몸짓과 추측으로 이루어진 그 서툰 대화에 미리는 크게 위로받는다. <만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말이 통하지 않는 대화에서 훈의 엉망진창 대답에 위로받는 애나. 그리고 최근에 보았던 ‘매탈남’이라는 유투버의 동영상도 떠오른다. 몇 주 동안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다가, 어느 날 그 길고양이가 낳은 새끼 여섯 마리를 구출하게 된 서툰 중년 남성. 사실 언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거여서, 때때로 통하지 않기에 더 위로가 되는 대화가 있다.


#상실

미리와 리위는 모두 무언가를 잃었다. 미리는 자신의 것을 잃었고 다시는 찾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리위가 자신의 것을 영영 잃지 않도록 애쓰는 게 아닐까?


#이스라엘_피해자_코스프레?

미리의 슬픔을 이해한다. 하지만 ‘군인 가족을 잃은 이스라엘인의 슬픔’에 마냥 공감하기에는 내가 너무나 프로불편러인지도 모른다. 자꾸만 <천국을 향하여>에서 자살폭탄테러를 하러 가는 팔레스타인 청년이 떠오르는 것이다.


#최소한의_선

리위는 도망치고, 그러다 마구 발버둥을 치며 저를 붙잡으러 온 미리를 때리기도 한다. 하지만 미리는 어른이다. 그래서 뜬금없이 내던져진 이런 상황에서도 어린 리위를 보듬는다. 미리의 언니도, 미리의 조카도, 미리의 형부도, 길라의 친구도, 짜증이 날지언정 리위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고, 리위를 위해 기꺼이 움직여준다.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것은 그들이 공유하는 최소한의 선이다.

문득 얼마 전에 본 게 기억났다. 칠판에 ‘아저씨발냄새나요’라는 낙서를 적은 초등학교 2학년생의 뺨을 두 차례 때린 30대 후반 담임교사가 불구속 입건되었다는 기사에, ‘나라도 뺨을 때렸을 것 같다’고 달렸던 많은 댓글들. 리위가 2019년 한국에서 엄마를 잃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미리가 이 일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다면, 난 거기에 달릴 악플을 종류별로 선명히 예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리위는 물론이고, 리위의 엄마에게도 그렇겠지. 불법체류중인 여성 이주노동자, 심지어 우리말도 못하고, 직장에 아이를 데려와 일을 하고…. 스트레스가 범람하는 탓인지, 개인화된 시대의 문제인지, 나는 가끔 최근 우리나라에 최소한의 선이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미리와 미리의 가족들이 리위를 무사히 엄마에게 돌려주어서, 정말로 고맙다.


#여성과_남성

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다. 주인공도, 주인공의 가족도, 주요 공무원도 모두 여성이다. 남성은 주변인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위로와 갈등을 주는 관계거나, 치정관계로 얽혀 있거나, 보살펴주어야 하는 어린아이거나. 10년 전에 볼 때는 생각도 못했던 것인데, 다시 보니 이 지점도 굉장히 유의미하게 느껴진다.


#십_년_전이어서_가능한_이야기

지금이라면 SNS에 글을 올려 금세 해결될 수 있겠지. 동네 중국집 직원들이 전화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리트윗이나 좋아요를 누르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이 화면을 채웠을 것이다. [만추]가 리메이크되면서 배경이 미국으로 바뀐 것은, 아마 교통의 발달로 우리나라가 너무 좁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기억을 꺼내 맞추고 옷을 들어 흉터를 확인하며 가족을 찾을 일은 없겠지. 참 이상한 일이다. 많은 것이 좋아지지만, 부족하기 때문에 더 컸던 감동들도 사라지고 만다. 옛날의 드라마가 더 좋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낡은 사람이 되어 가는 증거일까?


#꿀잼_허니잼

너무 재밌어서 시간이 후딱 갔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이야기에 소소한 웃음들. 순간순간 어쩜 이렇게 잘 만들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어떤 장면들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해피엔딩인데, 눈물이 난다. 인생은 왜 이토록 양가적인가. 리위도, 미리도 행복하면 좋겠다.


새보미야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닌데도 가끔씩 문득 떠오르는 몇 안 되는 말들이 있다. 사실 완벽하게 구사할 정도로 정확하게 외우진 못한다. 내게 아무리 좋은 말이었다고 해도 이상하게 잘 외워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에게 그런 것들을 외워두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너의 가치를 올릴만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도 했지만 나는 경험과 경청을 통해 얻은 말들을 무의식속에 담아두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그렇게 희미하게 체득된 말들 중에는 경험이라고 하기 뭐한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우연치 않게 연예인육아예능을 보다 알게 된 아프리카 속담이 그런 경우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육아예능 속 아이들은 연예인 부모의 재력에 의해 안전하게 성장하고 매체를 접하는 불특정다수에게 사랑받는다. 마을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영향력 속에 사는 아이들만이 나오는 프로그램에 제작진이 시청자의 몰입과 감상을 위해 얹어 놓은 에피소드 제목이 왜 그리 잘 잊혀지지 않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이 간단하고 완벽한 아프리카 속담이 영화 <누들>을 보는 동안 계속 떠올랐다.      


경찰이나 기관에 떠넘겨 버려도 되었을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달래고, 보살피는 일들이 미리 혼자였으면 가능했을까 싶다. 그리고 그 아이의 말을 듣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전부의 몫이었다. 아이는 이 나라엔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고, 말도 통하지 않는 ‘외계인’ 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에 미리는 주저함 없이 덤벼들었다.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냈고,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그 몫을 나눠주었다. 이런 관계들이 한 아이를 둘러싼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 같았다. 이처럼 보살핌은 아이를 둘러싼 모든 상황, 사람과 연계되어 있다. 만약 <누들>이 보살핌을 여성만의 영역인 것처럼 해석했다면, 아마도 아이가 없는 미리가 모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처럼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들>은 아이를 둘러싼 관계가 아이를 보살필 때 어떤 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었다.      


가족과 같은 연결감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나이와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교감을 가능하게 만드는 과정은 ‘외계인’ 같던 존재를 아이로써 온전할 수 있게 한다. 편한 모습들로 같이 국수를 먹는 장면은 아이의 머리색이나, 다른 언어들을 잊게 만든다. 다른 문화, 다른 언어, 국적의 경계를 흐리는 음식인 ‘누들’ 자체가 아이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면서 우리는 규범적으로 정해진 관계(가족)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연결감을 그들 속에서 보게 된다. 그렇게 아이는 더 이상 외계인이 아닌 어느 곳에서도 당연한 존재인 ‘누들’ 이 된다.  

    

영화 제목인 <누들>이 상징하는 의미들이 정리되면서, 아프리카 속담이 말하는 바가 더 정확하게 와 닿는 것 같다. ‘외계인’(번역가가 마오쩌뚱을 외계인이라고 번역한건 정말 잘한 것 같다)이던 아이가 전 세계인의 음식인 ‘누들’로 불리게 된 것처럼, 아이들의 존재는 어디서든 당연해야 한다. 아이들의 시끄러움이, 무례함이, 변덕이, 짜증이, 울음과 호기심이 어른의 언어로 해석되는 일들은 저출생으로 인구소멸위기를 맞이한 나라에 노키즈존을 존재하게 한다. 어찌 보면 모든 아이들이 ‘누들’과 같은 ‘외계인‘ 일지도 모른다. 낯선 어른들의 세계 속에 던져진, 그래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언어와 표현과 감정이 어른들의 언어로 해석되는 바람에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생의 위협까지 받게 되는 불안한 존재들. <누들>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스쳐지나간 이름 모를 아이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장주희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는 사람


   처음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문화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너무 이질적인 두 인종이 만나서 이야기가 진행될 때부터 영화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화의 중 후반부 쯤에야 가서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왜 그토록 영화를 껄끄러운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남자아이가 너무나도 '중국아이'스러워서 일까? 지금 생각해보니 영화의 의도자체가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들었다. 이 영화는 소통에 대한, 한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영화라는생각이 들게 되기까지, 영화 처음부터 험난한 길을 걸어야했다. 주인공 '미리'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언니와 함께 살고 있는데, 미리는 이미 두 남편과 사별하고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듯 보인다. 어느날 비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난데없이 중국인 가정부가 애를 잠시 맡겨놓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중국인 가정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미리와 가족들이 중국인 아이를잠기 맡게 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스라엘과 중국이라니. 보는 나도 참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미리는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러다가 아이가 가족이 다 잠든 밤에 '누들'을 먹고 잠이 든 것을 발견한다. 그때부터 아이 애칭은 '누들'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미리와 아이를 이어준 매개체는 그 '누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이후부터 미리와 아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물론 미리의 언니, 조카, 형부 등도 아이의 일을 직접적 간접적으로 도와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를 위해 중국어 사전으로 대화를 해보기도 하고,

아이가 말하는 단어에서 단서를 찾아 엄마가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곳의 정보도 알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영화스러운 점은 미리가 아이를 대형 캐리어에 넣어서 베이징으로 데려가는 일이다. 영화를 보며 내내 저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아무리 옛날 영화라지만 보안검색대 통과 할 수 있겠나? 하는 현실적인 걱정부터 시작해서 심란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데, 다행히도 참 영화스럽지만 별탈없이 아이를 엄마에게 무사히 데려다주게 된다. 영화 속에서 기억나는 많은 장면이 있었지만 가장 꼽고 싶은 장면은 아무래도 다함께 국수를 먹으며 즐겁게 대화하던 장면이 많이 떠오른다. 나라 언어를 초월해서 그들이 소통할 수 있게 도와준 '누들'을 함께 먹고 행복해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사람들은 서로가 가족이 아니어도 가족보다 더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주인공 미 리와 아이는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는 존재였다.


솔마




영원한 혼자는 없다

- 영화 <누들>를 보고 -


   예전에 우리가 영화를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하다고 말한 적 있다. 강렬한 장면으로 혹은 기막힌 스토리로 또는 내가 좋아 배우의 리즈 시절의 저장고로. 

   내 기억 속의 영화를 타인에게 소개할 때는 어떤가? 내가 기억하는 것과 타인에게 영화를 기억하게끔 만드는 것은 조금 다르다. 전자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지만, 후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이 동반된다. 설명은 매우 주관적이며 말하는 사람의 관점, 해석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최근에 재미있게 본 영화 있으면 추천해주라.


   그냥 검색해보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굳이 나에게 영화를 추천받으려는 친구의 마음은 뭘까? 객관적인 정보보다는 해당 영화를 내가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듣고 싶어서가 아닐까. 

   아일레트 메나헤미 감독의 <누들>을 봤다. 평소 접하기 힘든 이스라엘 영화를 지인에게 추천할 경우 나는 이 영화의 어떤 점을 어필할 수 있을지 따져보면서 봤던 것 같다. 

   영화의 핵심 키워드를 꼽자면 ‘관계 맺기’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몇 안 되지만, 인물 간에 정말 다양한 관계가 생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 명의 남편을 잃어 (미리 언니의 표현에 따르면) 넋이 나가버린 미리에게 가정 도우미가 갑자기 아들인 리위를 맡겨놓고 사라지면서 미리의 일상은 급격히 변화한다. 주인공이 예상치 못한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인물과 만나면서 그들만의 교류가 형성되는 식의 이야기 구조는 흔하다. 

   이 영화가 특이한 점은 주연 배우 간의 관계만 다루지 않고 조연과 조연의 관계, 주연과 조연 간의 관계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 미리는 모든 관계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새로운 인연인 리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혈연관계인 언니와의 애증 관계, 이혼을 앞둔 언니 남편 즉. 형부와의 관계, 언니가 외도하며 만난 마틴까지의 관계까지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미리가 다른 인물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다양해서 흥미로웠다. 가족이어도 지켜야 할 선을, 가족이니까 선까지 넘어가며 노골적으로 갈등을 겪는 언니에 비해 리위와의 관계는 상징적인 오브제를 활용해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둘의 관계를 드러내는 오브제는 대표적으로 누들과 사진이다. 갑작스럽게 둘만 남겨진 미리와 리위, 둘 다 난감하다.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미리였다. 소파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고 내내 굶고 있는 리위에게 누들을 권하지만 끝내 거부당한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은 하나 리위에는 익숙하지 않은 포크를 건네고 먹을 시간을 정하는 일련의 행위는 모두 미리에게 맞춰져 있다. 관계 맺기 첫 번째, 적절한 타이밍이 중요하다. 상대방이 수신할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 나 혼자서 일방적으로 발신하는 신호는 퉁퉁 불어버려 뚝뚝 끊기는 면과 다르지 않다. 리위의 엄마를 찾겠다는 공동의 목표가 생기면서 둘은 조금씩 서로의 삶을 공유한다. 어느 날 외식하게 된 그들은 또 누들을 먹는다. 국물이 있고 젓가락을 사용하는 국수, 리위에게 더 익숙하다. 이번엔 리위가 미리에게 권하며 먹는 방법까지 알려준다. 미리는 이에 기꺼이 응답한다. 서로를 이어주는 실처럼 좋은 타이밍에 함께 먹는 누들은 맛있다. 

   서로를 향한 문턱이 낮아지자 둘의 관계를 더욱 좁혀나가는 오브제로 사진이 등장한다. 액자 속 사별한 두 남편의 사진은 미리에게 상실감으로 느껴지지만, 리위가 찍힌 단 한 장의 사진은 성취감으로 다가온다. 새롭게 맺어진 소중한 인연이니까.

   우리는 엄마의 뱃속부터 그리고 태어나서는 본격적으로 누군가와 평생 관계를 맺는다. 죽을 때에도, 심지어 사후에도 회자 되면서까지 관계를 이어간다. 영화를 보며 새삼 느낀 점, 우리는 평생 혼자가 될 수 없다.


airbag




<누들>      


엄청나게 귀여운 ‘리우’가 단연 기억에 남는다.

밤새 엄마를 기다리다가 누들을 해치워 먹은 일로 ‘누들’ 이라는 애칭을 얻게된다. 귀엽고도 짠한 별명이다.   

  

영화에서는 누들을 먹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우리 나라에서는 생일날 장수하라는 의미에서 국수를 먹기도 하고, 결혼식 같은 경사날에도 국수를 나눠 먹기도 한다.

먼 나라 이스라엘이 배경인 영화 <누들>에서는 무슨 의미를 안고 있을까?      


리우가 엄마를 밤새 기다리며 혼자 누들을 해치운 장면에서는 본능적으로 살아남으려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미리와 미리네 가족과 함께 나눠 먹는 장면들에서는 가까워지고 서로 끈끈해지는 것을 느꼈고, 후에 엄마를 만나 누들을 먹는 장면에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가족의 질긴 인연을 느꼈다.     


한국의 정서와는 다름이 있겠지만 면발이 길게 이어진 누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함은 아마도 우리가 영화를 보며 느꼈던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엄마가 눈앞에서 사라져 극한의 공포와 불안감을 느끼는 여섯살 꼬마도 누들을 먹어 해치움으로 고픈 배를 채워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말도 안통하고 곁도 안주어 고생하던 미리네 가족들도 리우와 함께 지내며 친해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박스 하나에 엉킨듯 담겨있는 누들과 비슷해보였다. 

못 만날 거 같았던 엄마와도 미리와 미리 주변의 도움으로 극적 재회하는데, 긴 누들처럼 이어진 가족의 연을 보여준 것 같았다.      


그릇에 담아먹는 모습이 익숙한 나에게 박스에 담겨있는 누들을 본 것처럼 영화의 처음은 낯설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그 속에서 덩그러니 있는 중국 꼬마아이도, 모두 어색한 것 투성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음식 속에 담긴 정은 다르지 않았고 어느새 영화속에 몰입하였다. 영화는 엄마를 찾은 리우도, 리우를 통해서 삶을 되찾은 미리도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굶주린 배를 채워주고 온기를 불어넣어 주던 첫 누들의 모습처럼 보는 이를 배신하지 않고 따뜻하게 끝이났다. 영화일뿐인데도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누들 안녕!


우리선희




누들, Life is full of surprises.     


   리위를 중국으로 보내는 일에는 미리, 그리고 미리 말고도 홀리듯 여러 사람이 가담하게 된다. 아마 그 사람들은 리위를 엄마와 만나게 하려는 책임감에서가 아니라, 미리를 사랑해서 그런 선택을 하였을 듯하다. 예상치 못하게 살아있는 누군가를 책임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예상치 못하게 살아있는 누군가를 잃게 된 미리가 리위를 맡는다면, 잠깐은 마음이 채워질지언정 좋지 않은 결말이 나기 십상이니까. 집착이 되거나, 포기해서 또 잃게 되거나.

   어른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데, 리위는 한 가지를 안다. 누구와 헤어졌는지, 누구와 만나야 하는지. 그래서 리위는 미리를 동정하지 않는다. 미리의 헤어짐을 공감한다.     


   미리가 리위와 헤어지기 싫어, 비행기에 타지 않으려고 하는 장면이 있다. ‘누들’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미리는 리위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일하는 것도 벅차고 빨리 그만두고 싶은데, 설사 리위를 책임지더라도 둘은 행복할 수 있을까. 아마 미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렇지만 미리는 리위의 헤어짐을 알기 때문에 결국 중국으로 갔을 거다. 미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미 죽어 다시 만날 수 없지만, 리위가 엄마를 만나러 가는 여정은 함께 할 수 있으니까. 

   여정이 끝나고 베이징에서 리위, 리위 엄마, 미리, 미리 언니, 미리 언니 구남친이 모여 국수를 먹는다. 누구는 방금 다시 만났고, 누구는 이제 곧 헤어진다. 다 같이 웃으면서 국수를 먹는다.    

  

   우리는 헤어짐과 만남을 경험하고 산다. 나는 헤어짐을 만남보다 비교적 더 갑작스럽게 느낀다. 리위가 겪은 것처럼, 미리가 겪은 것처럼. 리위와 미리가 헤어지는 것처럼, 그것이 설사 예견되어 있더라도. 헤어짐은 광폭해서, 되도록 사람들이 너무 억지스럽거나 당혹스러운 헤어짐은 덜 겪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게 어쩔 수 없이 세상에 가득 찬 일이라면, 마리에게 ‘누들’이 리위가 된 것처럼, 두렵더라도 만날 수 있기를. 나도 어쩌면 그들 중 하나니까. 밤에, 배고파서 혼자 쑤셔 넣던 국수를, 식탁위에서 같이 먹으면서 웃을 수 있으니까. 울다 웃는, 그게 기적.  


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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