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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Feb 08. 2020

주말부부 3년 차

정현종 시인의  시집, 고통의 축제

속옷을 한 번 사보려고 인터넷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면서 아이들 밥을 챙겨 먹이고 씻기고 일기예보 확인해가면서 옷 입히고 싸우는 걸 말리고 겨우 둘을 차에 태워 큰 애는 초등학교에 둘째는 유치원에 아직 온기가 돌지 않는 빈 교실에 들여보내 놓고 출근시간 겨우 맞춰 사무실에 앉아 하루 종일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사담을 나누는 일도 없이 업무를 마무리 하면 눈치가 좀 보이긴 하지만 가장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와 둘째 유치원에 가서 아이를 싣고 초등학교에 가서 가장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첫째를 싣고 집으로 돌아와 먼저 씻기고 아이들 노는 동안 식사 준비를 하고 밥 먹이고 배가 불러 좀 여유로워진 아이들이 그럭저럭 놀고 있을 때 화장을 지우고 밀린 빨래를 돌리고 마른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아직도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줘야 하는 아이들 둘을 양 옆에 눕히고 한 시간 책을 읽어주다 잠들어버리는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동안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고
말없이 누워서 살이라도 부비적거릴 이 없고
하루하루 하루가 덧입혀지다가

어쩌다 마주친, 그렇게 기다리다 마주친,
잘 알지는 못하는 그 사람 앞에서 벗어도 부끄럽지 않을 속옷 세트를 하나 사려고 인터넷 쇼핑 사이트를 살피다가

 지금 모르는 남자 앞에서 벗어도 부끄럽지 않을 속옷을 사려고 해,
라고 남편에게 말하고 싶어 졌다.

그래도 농으로 알고 변화가 없을 일상의 그림자가 무거워
그러면 정말로 요란스럽지 않고 정숙한, 속옷 한 벌 사다가
절대 고요의 어느 방 하얀 시트 위에 정숙하게, 누워
잘 알지 못하는 그 사람과 가만한 인사를 나누게 될까 봐

장바구니에 담긴 그것들을 조용히 비우고
정현종 시인이 30대쯤에 노골적인 언어들을 뱉어놓은
시집 고통의 축제를 담고
정말의 고통의 축제를 보내보려

어느 도시 네온사인 뒤
어둑한 관공서 주차장에서의 입맞춤은 지워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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