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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Feb 08. 2020

배우 유재명


이라고 불러야 한다기에
호칭이 쑥스러워 부르지 못한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당신이 너무 잘 생겨서 그런 거였어요

어젯밤에 지금의 내가 이십 대 중반의 당신을 만나
호리 한 그 몸 허리춤을 착 감아 안고서는
발그레한 얼굴로 오빠 오빠 그렇게 부르고 있었네요

싱글 웃으며 눈 마주치는 얼굴에
입 맞추고 싶어 안달이 나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달라붙어
어디론가 함께 걷는 게 전부였는데
아침이 되어도 그렇게 기분이 좋고
당신 웃는 얼굴 내 팔에 감기던 당신 몸
그렇게 붙어 있을 때의 체온 매끈한 피부
하나하나 생각이 나 한참 기분이 좋았어요

이십여 년 전에 딱 한 번, 눈 마주쳐본 게 전부인데
말도 섞어본 적 없을 텐데
그때의 그 눈빛과 낮고 고운 음성으로 ㅇㅇ야- 이름 불러줬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해
지금 이런 꿈도 꿨나 봅니다


99년 여름 동해의 어느 해수욕장
백사장을 걸어오던 당신 모습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아침해를 뒤로
큰 키에 굽슬한 머리카락을 넘기며 뿔테 안경을 쓰고
백팩을 메고 여름 샌들은 손가락에 끼운 채
걷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있는데
당신은 정말 영화에 나오는 사람이 되어 있어요

지독히도 고독했던 이십 대를 보내며
이렇게 서른을 맞이할 수 없다고
가엽고 가여운 내 스물을 위해
스스로 꼭 하나의 선물을 하자고 마음먹고
나는 포털 검색창에 당신의 이름을 쓰고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 겨울,

부산의 소극에서 작품을 하고 계셨기에
시외버스에 올랐어요
왜 하필 기형도 시인의 시집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 당시에 읽고 있던 시집이어서인지
인상적인 시가 있어서
당신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어요

기형도 시인의 <입속의 검은 >이었지요.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시집의 내지 가득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99년 여름 해변에서의 인상을 기록했을 것이고
응원한다는 정도의 글이 아닐까 싶

작은 극장이어서 무대 위에서 내가 보이지 않을까 생각되었지만 아마 얼굴을 보고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요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서 간 것이었는데
쉽지 않은 작품이어서 혼신을 다해 연기하는 당신으로 인해 연극에 집중해버렸어요 나는 당신만 보고 싶었는데

연극이 끝나고 너무 빨리 나가면 다른 관객이 책을 가지고 갈까 봐
가장 늦게 객석을 빠져나왔어요
용기도 없는 나는 내 이름 석자도 편지에 남기지 못하고
얼굴 보고 직접 전하지도 못하고
빈 객석 내가 앉았던 의자 위에 시집 한 권 놓고 나왔지요
당신에게 전해질 거라 믿으며

그 겨울,
시외버스를 타고 갈 때의 마음의 일렁임과
명륜 지하철역에서 내려 육교를 건널 때 그 밤의 추위와 떨림을 기억합니다

다움이 뭔지도 모르는,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 청춘에 바치는
단 하루의 나다운, 내게 솔직한 시간이었지요

나는 아마 당신이 그리웠던가 봅니다
나는 아마 당신이 좋았던가 봅니다
그런데 숙명이라던가 운명이라던가
존재라던가 삶의 무게라던가
그 무엇들에 짓눌려 압사 직전의 내가
뒤를 돌아 한 번의 용기를 낸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였을 때 가장 아쉽고 후회되는 시간이 떠올랐어요


그 시절, 99년에 자신감이라 부를 만큼의 거창한 무엇이 아니어도, 무모함이라도 있었다면 당신을 좀 더 가까이서 많이 보았을 텐데 말입니다.
어른처럼 살아야 하는 나이 서른을 앞두고
최고의 용기를 낸 것이
당신 모르게 소극장에 찾아가 무대 위의 당신을 보고
내 앉은자리 위에 시집 한 권 몰래 놓고 오는 것이었다니

나는 참 가엽게 살았습니다
나는 참 많이도 헤매었습니다


시집을 꼭 한 권 내고 싶어 졌습니다
책 한 권 써서 당신에게 보내고 싶어 졌습니다
그것 말고는 내가 당신을 만날 일도 없고
당신에게 나의 존재를 알릴 일도 없을 만큼
시간은 흘렀고
당신은 유명해졌고
나는 무명으로 살고 있네요

형, 선배, 오빠, 님,
이제는 더더욱 뭐라고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부를 말이 없으니 만날 일이 없는 것이 다행인가요


옛날 그 눈빛과 음성을 그대로 품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적은 없지만
잠시 스침으로도 잊히지 않을 만큼의 강렬한 매력은 그때부터 있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단지 잘생겨서일 거예요

나중에, 나중에,
유명한 시인이 쓴 시집 말고
무명의 내가 쓴 시집 한 권 몰래 보내고 싶습니다

구구절절한 사연 말끔히 다듬어 한 페이지 넣고
제목은 유재명으로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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