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남자 시인 한 명과 혜화 로타리에서 술을 마셨다
내 글 한 번 보일 요량으로
고개 들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앉아 기회를 엿보았지만
시인은 나를 보지 않았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잘 어울리는 어느 낭송가만 바라보았다
이 남자 예쁜 여자에게는 말 걸지 못하는 병이 있을 거라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유명한 칼국수집 옆 무명의 칼국수집으로 자리를 옮길 때는
그의 옆자리에 바싹 붙어 앉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노골적으로
내게서 등을 돌리고 그 여인과 이야기를 나눌 뿐
이쪽에는 관심도 없어
이 남자 저 이를 흠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이번에도 내 마음대로 생각했다
그 남자 시인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
괜히 밉고 야속한 마음만 가지고 헤어지려는
겨울, 그 밤 칼국수집 앞
한쪽 어깨에 백팩을 메고 비스듬히 서서
바바리에 담배 문 모습을 보니
짜리 몽당 하고 덥수룩해 보이지만
영락없는 시인이라
그것도 사랑에 빠진 마음 단도리하며 섰는 한 남자라
저 담뱃불 꺼질 때까지만이라도 곁에 있고 싶다 속으로 말했다
심야버스 타고 한 밤을 달려 바닷가 마을 내려와
일기장 훔쳐보듯
그 남자 시인 10년도 더 전에 펴낸 시집 읽으니
시어 하나 어미 하나 쉼표 하나
속속들이 남자가 느껴져
그래, 시인들이 마흔 즈음에 쓴 시들을 찾아 읽자고
엉뚱한 결론을 맺는다
숨겨지지 않는 벌건 욕망이
불쑥불쑥 솟아 있더라
그것들만 톡톡 따다가
얄랑얄랑한 연애하듯이
답신을 써보면 어떨까
또, 엉뚱한 결론을 맺는다
주고받을 수 없어 갇힌 마음이
일제히 들고일어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