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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Feb 10. 2020

혜화 로타리

겨울밤 남자 시인 한 명과 혜화 로타리에서 술을 마셨다

내 글 한 번 보일 요량으로

고개 들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앉아 기회를 엿보았지만

시인은 나를  보지 않았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잘 어울리는 어느 낭송가 바라보았다

이 남자 예쁜 여자에게는 말 걸지 못하는 병이 있을 거라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유명한 칼국수집 옆 무명의 칼국수집으로 자리를 옮길 때는

그의 옆자리에 바싹 붙어 앉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노골적으로

내게서 등을 돌리고 그 여인과 이야기를 나눌 뿐

이쪽에는 관심도 없어

이 남자 저 를 흠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이번에도 내 마음대로 생각했다


그 남자 시인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

괜히 밉고 야속한 마음만 가지고 헤어지려는

겨울, 그 밤 칼국수집 앞

한쪽 어깨에 백팩을 메고 비스듬히 서서

바바리에 담배 문 모습을 보니

짜리 몽당 하고 덥수룩해 보이지만

영락없는 시인이라

그것도 사랑에 빠진 마음 단도리하며 섰는 한 남자

저 담뱃불 꺼질 때까지만이라 곁에 있고 싶다 속으로 말했다


심야버스 타고 한 밤을 달려 바닷가 마을 내려와

일기장 훔쳐보듯

그 남자 시인 10년도 더 전에 펴낸 시집 읽으니

시어 하나 어미 하나 쉼표 하나

속속들이 남자가 느껴져


그래, 시인들이 마흔 즈음에 쓴 시들을 찾아 읽자고

엉뚱한 결론을 맺는다

숨겨지지 않는 벌건 욕망이

불쑥불쑥 솟아 있더라


그것들만 톡톡 따다가

얄랑얄랑한 연애하듯이

답신을 써보면 어떨까

또, 엉뚱한 결론을 맺는다

주고받을 수 없어 갇힌 마음이

일제히 들고일어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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