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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추자 Jan 19. 2024

비염 걸린 나라

틀어 막지 마라

알레르기성 비염을 앓고 있다 보니 자주 코가 막힌다. 어느 날은 오른쪽 또 어느 날은 왼쪽 또 다른 어느 날에는 양쪽 콧구멍 모두가 막힌다. 생명유지를 위해서는 일정량의 산소를 마셔야 되지 않는가. 콧구멍이 수시로 막혀대니 입을 벌려 숨을 쉬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잘 때도 무시로 입 벌려 자다 보니 매일 아침 목구멍과 입안이 뻑뻑하게 말라 괴롭다.


초딩때였다. 친구가 포경 수술을 하고 왔는데 또래의 사내 녀석들에게는 이는 빅뉴스였다. 빅뉴스임과 동시에 당사자에게는 큰 비밀이기도 했다. 친한 녀석 몇몇이 나누는 비밀이긴 했지만 비밀의 속성이 뭔가. 까발려졌을 때의 쾌감이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 사정없이 까발렸다. 학급회의 시간 반장이었던 나는 회의 진행 도중 “오늘 ㅇㅇㅇ 친구가 아프다. 그러니 모두 잘 보살펴 줘라”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어디가 아픈 거냐는 질문이 나왔고 거기에 답을 하려는 순간 녀석이 걸상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녀석은 순식간에 달려들어 내 입을 틀어 막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입을 틀어막은 손을 떼어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싸움이 난 거라 생각했는지 남녀 학생 할 것 없이 말리기 정신없었는데 그 와중에도 내 눈은 웃고 있었다는 것이 그 상황을 기억하는 친구들의 전언이다. 실랑이가 이어지는 동안 입이 틀어 막혀 있던 나는 “ㅇㅇ가 포경수술을 했어”라는 비밀 폭로의 의지도 있었지만 숨이 막혀 참을 수가 없었다. 수 십 초 또는 수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비밀폭로고 나발이고 숨이 막혀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그때부터는 몸부림을 쳤다. 장난스런 몸짓에서 생존의 몸부림으로 바뀐 것이다. 팔다리를 팔딱거리며 버둥대는 나를 녀석은 힘차게도 누르고 있었고 입을 막고 있던 손은 끝내 치워주지 않았다.


눈을 뜨니 누군가의 등에 업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양호실에 도착할 때쯤 “뭐하노?” 라고 내가 말을 하니 업고 가던 선생님이 멈춰 섰고 나를 이리저리 살피셨다. “이 노무 쉐키!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식겁했네. 괘안나?” 비몽사몽 괜찮다고 한 뒤 직살나게 혼났다. 짧은 시간 졸도를 했었나 보다.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본 졸도였다.

이렇듯 콧구멍이 무시로 막히는 비염 환자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으면 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바, 어제 뉴스에서 본 장면은 심히 걱정스럽다. 아니 참담하다.


대통령이 참석한 한 행사장에서 현역 국회의원이 대통령 경호처 직원들에 의해 입이 틀어 막히고 사지가 들려 퇴장당했다. 대통령 앞에서 국정기조를 바꾸지 않으면 국민이 힘들어진다는 취지의 말을 했을 뿐이라는 국회의원을 무슨 테러범 대하듯 끌고(들고) 나간 것이다. 수많은 카메라가 있던 행사장인지라 다양한 영상과 사진이 있어 돌려 보다 보니 누군가는 그 국회의원에게 당수를 내리치는 장면도 있더라.


대통령실은 대통령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어 경호상 필요한 조치라고 대응하고 있지만 말했듯 수많은 카메라가 그 상황을 찍었고 영상과 소리들이 녹음돼 있다. 많은 국민이 상황 파악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양이니 국민들이 판단할 것이라 생각된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저리 대하다니 대통령실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국민의 대표를 아니 유권자를, 국민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 것 같다.


등산용 칼을 사 갈고 갈아 급소인 목덜미를 노린 것도 아니고 그저 말 한마디였다. 현역 의원에게 처해진 일이 이 정도라니 만약 다른 이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참담하고 서글프다. 어쩌다 이런 일이 대명천지 벌어지는 나라가 되어 버렸나 싶어 밤새 뒤척였다.


정치권에서야 이 일을 두고 이리 비판하고 저리 비판하고 이리 방어하고 저리 변명할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언론은? 뭘 이리 중계만 해대는가. 그마저도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제목들만 가득하다.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다’ 정도로 기사만 내보내고 말 일인가. 몇몇 비판하는 기사들도 보이지만 대다수의 기사가 어찌나 건조하고 푸석한지 후 불면 날아갈 정도다.


대통령 경호원들이 틀어막은 것이 단지 국회의원 한 명의 입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VIP가 불편하니 듣기 싫은 말 하지 말라’는 시그널이 정확히 포착된다. 그러니 언론들이 저 모양일 터 서글플 따름이다.


각종 경제 지표나 외교 행보, 국민과의 소통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곳곳이 막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라가 알레르기 비염에 걸린 것인가. 구석구석이 잘도 막혀 있다. 어찌어찌 입 호흡으로라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가 용할 따름이다. 불편하지만 힘겹게 이어가는 국민들의 입 호흡을 그 거대한 권력으로 틀어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고 각성하기 바란다.


앞서 말했듯 입 호흡을 틀어막은 그 손이 우리를 졸도시킬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졸도하고 싶지 않다. 알레르기 인자를 걷어내 비염 치료의 방법을 알려주고 속 시원히 코로 숨 쉬는 기쁨을 선사해 주지는 못할망정 불편하게나마 이어가고 있는 입 호흡을 막지 마라. 졸도하기 싫다. 숨 쉬고 싶다. 그렇게 숨 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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