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이 나는대로 켄터키 루이빌로 가는 항공권을 급하게 샀다. 나는 버번을 원채 싫어했다. 너무 달고 쓸모 없는 맛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특유의 라이 향이 나는 거북했다. 항상 양주를 마신다면 10번에 8은 스카치요 1번은 블랜드로 1 번은 어쩔 수 없이 버번 이었다. 그래도 자의적으로 버번을 10번에 한 번 꼴로 마신 이유는 어떤 공평한 기회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버번자체가 나의 취향이 아닌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딘가엔 나에게도 맛있는 버번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기회를 붙잡고 싶었다. California에 머무는 동안 틈날 때 버번을 시켜 마셨다. 못 들어본 이름의 버번을 매번 시켰지만서도 다 들어봄직한 버번 브랜드의 아류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슬슬 포기하고 있었다. Santa Cruz에 작은 술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안주와 함께 또 한 번 두 잔의 다른 버번을 주문했다. 하나는 그럭저럭 마실만한 버번 이었고 다른 한 잔은 놀라운 맛이었다. 내가 싫어하던 특유의 라이 향이 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것이 버번의 참 맛은 아닐거다.) 나는 브랜드이름을 구글에 검색했고 익스트림하게 흥미로운 몇가지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들이 나의 사업과도 참 잘 맞는 이야기 같았다. 너무 궁금했다. 루이빌을 가기로 했다.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코로나와 날씨로 인해 두 번이나 항공권이 취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양조장에 방문하기로 약속을 해 두었고 첫 만남 부터 괜시리 시간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강행하더라도 꼭 시간에 맞춰 루이빌에 가겠다고 만든 내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화요일 오후에 Monterey에서 자전거를 8시간 타고 수요일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서 2번의 경유를 통해 12시간 만에 루이빌에 도착한 뒤 목요일 아침에 양조장에 들린 후 금요일 오전에 다시 CA로 돌아오는 것. 덕분에 수요일은 비행기를 타느라 하루종일 쫄쫄 굶었다. 목요일에는 뭐라도 좀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목요일 오전에 양조장에 도착하였다. 갑자기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교외에 있는 그 양조장에서 4시간동안 갇혀있었다. 그 동안 양조장 스텝들과 친한 친구가 되었다. 아마도 일이 잘 풀리려나... 4시간을 양조장에 있던터라 스텝들이 주는 버번을 빈속에 들입다 부어버렸고, 나는 취해갔다. 내가 마시면 마실수록 친절한 스텝들은 더 권했다. 더 취해갔다. 배는 고프고.
프라이빗 한 투어를 위해 마련된 공간
발리를 발효시키고 있다.
드디어 양조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루이빌은 거대한 건물들이 눈에 덥혀있었고 거리에 사람들은 전무했다. 휑한 도시. 마치 재난영화 투모로우의 한 장면 같았다. 한 식당에 들어가 주린배를 채웠다. 물론 루이빌의 시그니쳐 칵테일 올드패션을 한 잔 시켰다. 너무 달았다. 다시 버번을 한 잔 시켰다. 스테이크와 궁합이 잘 맞았다. 마지막으로 루이빌의 또 다른 자랑거리 칵테일 민트쥴렙을 시켰다. 마무리로 버번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렇게 만취했다.
루이빌의 썰렁한 거리
루이빌에는 대표적인 음식이 하나 있다. '핫브라운' 이라고 불리우는 음식이다. 기원은 다음과 같다. 루이빌 도심에 위치한 브라운 호텔에 버번에 쪄든 작자들이 아침에 숙취가득한 표정으로 조식을 먹으로 기어들어왔단다. 하도 술을 처먹는 손님들이 퍼석퍼석한 조식을 먹지 못하자 주방장 슈미트가 해장용 조식을 만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핫브라운 이다. 브라운 호텔의 뜨거움? 아무튼, 브라운 호텔로 부터 시작된 핫 브라운을 나 또한 숙취를 머금고 기어가서 먹어 보았다. 눈이 확 떠지는 맛,, 해장이 되는 맛, 뭐랄까,,,, 한 접시의 핫브라운 위에는 모성애가 보이는 기분이었달까. 어제의 내가 취할만 했다고 위로해준다던지,,, 오늘은 더이상 고생하지 말라는 격려라던지,,,, 훌쩍.
브라운호텔의 핫브라운
아침 7시에 핫브라운을 먹으니 해장이 되었고 속은 든든하고 비행기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루이빌 여행을 계횔 할 때 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루이빌 공동묘지로 발을 향했다. 그 곳에는 무하마드 알리와 KFC 할아버지인 코넬 샌드슨이 잠들어 있다.
폭설로 인해 굳게 닫힌 공동묘지 정문
젠장! 전날의 폭설로 인해 공동묘지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 대체 되는게 하나도 없네 라는 생각으로 억울해 하며 홀로 투덜투덜 난간 사이로 보이는 묘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훔쳐봤다. 인도에 쌓인 눈엔 발자국 하나 있지 않았다. 고은의 짧은시 '하얀 눈이 내립니다. 모두가 무죄에요' 가 생각났다.
하도 내 표정이 억울했는지 저 안쪽 경비실에서 한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여긴 오늘 문 닫았으니 내일 오세요." 나는 대답했다. "저 무하마드 알리의 광팬인데요(거짓말) 무하마드를 성묘하기 위해 한국에서 부터 날아왔어요(거짓말) 어떻게 좀 볼 수 없을까요?" 할아버지는 "내일 오세요. 안됩니다." 다시 나는 "제 비행기는 3시간 후에 출발해요. 저는 이걸 보지 못하면 여기서 부터 한국 까지 울면서 갈 거에요(거짓말) 딱 30분 안에 나올게요" 할아버지는 혀를 쯧쯧 차더니 잠시 기다려 보라며 경비실로 들어간다.
위의 묘사는 짧지만 이 실랑이는 정말 오래 진행 되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꼭 봐야만 했다. 안되는걸 되게 하는게 또 여행의 묘미 아닐까. 도대체가 순응만 하고 살면, 하다못해 죽은사람을 애도하는 것 조차 못한다면 나는 왜사나. 이걸 보지 못하면 그냥 내가 저기 누워 죽는게 낫겠지 하는 유머가 내 머릿속에 피어올랐고.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엄청 대들었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신 할아버지는 다시 나오더니 조금 기다려 보란다. 갑자기 눈치우는 제설용 작은 트럭이 앞에 달린 넉가래를 떼고 입구에 나타났다. 운전하는 사람은 조금 젊었다. 수염이 더부룩한 묘지 직원 중 하나 였다. 이름은 브라이언.
나는 그 차에 타서 이 공동묘지를 전세내듯 가이드를 받으며 돌아다녔다. 그 공동묘지에는 티파니앤코에서만 제작되는 분홍색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도 있었고, 양조회사 짐빔의 3세손이 묻어져 있기도 했다.
무하마드 알리의 묘 앞에 도착했다. 모든것이 눈에 덥혀있었기에 난 하마터면 알리의 묘를 발로 밟을 뻔 했다. 브라이언이 차에서 내렸고 장갑낀 손으로 바닥을 슥슥 훑었다. 무하마드 알리의 이름이 바닥의 돌에서 나왔다. 여기 누워 계신다고 한다. 그 뒤로 있는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Service to others is the rent you pay for your room in heaven' 나는 예전에 헌금이 천국의 집값을 내는 줄 알았는데, 현생에서 남을 섬기는 것이 천국의 집값이었구나.
무하마드 알리는 무슬림이었고 무슬림의 전통인지는 모르겠으나 무튼 그 이유로 인해 시체가 동쪽을 바라봐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알리는 묻힐 때 동쪽을 바라보고 누워서 묻혔다고 한다. 혹시나 부패가 진행되면서 근육이 썩고 자세가 흐트러 질 수도 있어 브라이언은 얼마전 무덤을 파내 자세를 확인 했다고 한다. 아주 잘~ 동쪽을 보고 있다고 한다.
묘비명과 삶을 돌아다보면 내 마음 속 한구석에 사랑이라는것이 너무 작게 위치한건 아닐까 걱정이된다.
다시 제설차에 탔고 브라이언에게 혹시 KFC 할아보지도 보면 안되냐고 물었다. 브라이언이 웃으며 "너가 왜 그 얘기 안하나 했다. 가자." 라고 했다. 괜히 정문에서 경비할아버지께 거짓말 한 것이 부끄러워 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았나!? 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이 아름다운 사색을 즐길 수가 없었는데!?
KFC 할아버지의 묘앞에 도착했고 역시나 묫자리가 눈에 덥혀있어 브라이언이 손으로 눈을 털었다. 눈속에서 발견된 것은 KFC 케쳡 소스. 나도 했던 생각인데- 사람들이 많이들 그 묘앞에서 KFC 치킨을 먹는다고 한다. 아마도 누군가가 먹고 남은 켓쳡을 헌화가 아닌 헌켓챱을 했나보다. 할아버지의 얼굴 조각상이 있었고 아내와 함께 묻혀 있었다. 사람들은 KFC 치킨을 그의 묘앞에서 먹었고 켓챱을 두고 간다. 할아버지는 상징적인 의상 흰 양복을 그대로 입고 묻히셨다고 한다. 켓챱이 흰 양복에 묻을까봐 짜증을 내시진 않을까 생각했다. 아마도 이 묘 앞에서 나는 부러움을 느꼈다. 나의 죽음또한 상징과 의미와 유머와 애도와 기억속에서 살아있는 죽음이길 바랐다.
돌아가는 길에는 전사한 미군들의 묘들을 보았다. 하얀색 묘비로 이뤄진, 죽은 자리 조차도 어떤 군대의 모습과 같았다. 어떤 묘들은 아주 작고 아무 글도 써져 있지 않았다. 역시나 이름모를 전사자들의 무덤이다.
미군 전사자들의 묘
여행을 다니며 난 묘지를 참 많이 다녔다. 유명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의 묘는 꼭 보고 싶다. 묘지여행 책도 몇권 읽었다. 모두 같은 감상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의 생애를 존경해서가 아닌, 그 사람의 죽음 이후를 축하해주는 기분이랄까. 어차피 같은 사람인데 뭐 얼마나 다르게 살았으려나. 그 사람이 다른건 아주 작은 것이었을 텐데, 그 작은 삶의 한 행동과 생각 혹은 조각들이 후대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되는 것. 그 시작점이 그 사람의 죽음이었을 것이고, 그 사람을 천국과 현생 사이 어딘가에 애매하게 두고선 계속해서 소통하는 방식이 묘지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도 내 나름의 묘지여행 기행문을 잘 남기고 싶었다.
요즘 내 마음속에서 자꾸 역시 인생은 혼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우울감 때문인지 나치의 만행 때문인지 회의감에 휩싸여 자살을 할 때 남긴 유언을 알게 되었다.
"나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원컨대 친구 여러분은 이 어두운 밤을 지나 마침내 뜨는 아침해를 보십시오. 하지만 참을성 없는 저는 먼저 갑니다."
이 말을 남긴 츠바이크는 아내와 둘이 손을 잡고 자살했다. 그 둘의 죽음은 구글에 치면 사진으로 볼 수 있다. 괴의한 느낌이 들려고 노력하는 르포성 짙은 분위기에 비해 둘의 자세는 한결 편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는 츠바이크가 되어야 할까 그의 친구들 처럼 아침해를 보아야 할까. 참을성이 있다고 버틴 것이 그의 친구들일까, 그러면 못참고 죽은 츠바이크는 정말 참을성이 없을까. 슬픈 기분이다.
어디서 읽은 구절인지 모르겠다.
"무결하고 결백한 사랑의 종착을 위해 무한한 집착을, 듣고 보는 세상의 상처들은 나의 부족함과 잘못이 아님을. 응답없는 사랑또한 사랑이 아닌 것이 아닌 요행없는 영원한 기다림일 뿐." 대충 이런 내용이었는데,,, 기억이 맞는지도 모르니,,, 이정도 되면 내 머리가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요행없는 기다림과 참을성이 요구되는 세상인가.
그래도 누군가는 죽어서 동쪽을 바라보고 누웠다. 누구는 평생입던 흰양복을 입고 죽었다. 남을위해 살라는 묘비명과 남을 위해 살다 죽은 미군들의 묘를 보았다. 삶이 뭐라고 이렇게 삶에대해 생각해줘야 할까.
좋은 술을 마시며 취한 다음날에 핫브라운을 먹어 위안을 받고 죽고싶은건지 살고싶은건지 모를 상태로 거짓말을 하여 구경한 무덤들에 대한 감상은 이것으로 마무리. 아무쪼록,,,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을까... 죽음을 피하려면?
세상땜에 죽고 남땜에 죽고 슬퍼서 죽고싶지 않다. 누군가 나 덕에 살고 나 덕에 웃고 나 덕에 위로받고 사랑받고 살았으면 좋겠다.
묻고 더블로 갈 때 내가 무얼 묻었는지 생각했다. 힘들고 괴로운게 있어도 참자. 츠바이크의 친구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