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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감옥과 세뇌에 갇힌 일상

내 직관으로 돌아오는 여정

by Choi

치료에 방해가 되었다. 한 편을 쓰고 나면 탈진한 몸처럼 마음도 무기력해졌고, 우울의 밀물과 기복의 파도가 반복되었다.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한참을 헤매다 지친 끝에, 결국 의사 선생님과 상의 후 멈추기로 결정했다. 쓰더라고 가볍게 쓰기로 했지만, 난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대신 달리고, 그림을 그리고, 운전을 했다. 2달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기에 하루에 기본 3~4시간 대한민국 올림픽대로, 영동대로, 잠실대로 등등 여러 고가 도로와 도산대로를 오가며 극성스러운 엄마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했고 현재도 수행 중이다.


병원을 다니고 가족들이 많이 편안해졌다. 나 역시도 이전보다 한결 가벼운 얼굴로 거울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남아 있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히 알지 못한 채, 다만 오늘 하루를 무사히 지나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노력한다. 매일매일 일어나기 위해, 살기 위해 남들은, 아니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평범한 노력을 한다.


가끔 문득, 엄마와 아빠가 그립다. 딸이라서 항상 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야 했던 난, 그들의 맹목적인 사랑이 무척 그립기도 하다. 그저 내가 존재하는 이유만으로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상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입이 앞으로 삐죽 나와있는 나 자신을 자주 본다. 길을 걷다 다정하게 웃으며 대화 나누는 엄마와 딸을 보면 저 여자는 딸이라는 이유로 사랑받는구나,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부러움이 밀려오고, 그 부러움은 곧 서러움으로 번진다. 좋은 약품을 보거나, 물건을 보면 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엄마가 있다면, 전화해서 일상을 나누고 함께 다니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가도 늘 나를 비교하고, 깎아내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 주던 엄마. 그녀의 냉정함과 냉철함, 차가움과 잔인함은 아직도 내게는 공포의 얼굴로 남아 있다. 괜찮아지고 있다가도 문득,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온몸이 굳고, 목으로 침 하나 삼키기 어려울 만큼 깊은 통증이 찾아온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그저 ‘필요에 의한 존재’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스러운 딸로 여겨졌다면 어땠을까...

아들과 똑같이 사랑받고, 같은 눈높이에서 존중받는 자식이었다면 지금처럼 아프지 않았을까?...


그 질문에는 여전히 답이 없지만, 나는 이제 그 서러움과 서글픔조차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리고 놀랍게도, 가족과 연락을 끊은 이후 나를 괴롭히던 편두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치료 중이지만, 의사 선생님은 내게 알아차림이 빠르고 회복력이 강하다고 말해주셨다.
그 말 한마디가 마음 한쪽을 따뜻하게 비췄고, “이제 그만 참아도 된다”는 짧은 말에서 나는 오래된 체념을 내려놓을 힘을 얻었다. 병원을 다녀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어느 순간에는 문득,
‘이 세상이 살만하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아주 짧고 조용한 변화지만, 50년을 살아오며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본 적 없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인생을 조금씩 살아내고 있다. 그 기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아니, 꽤 괜찮다. 특히 달릴 때면,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살만 하다는 생각...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

꽤 괜찮은 기분이다.


숨 쉴만하다...



너무 많은 서울의 대로와 고가차도를 오가며 달려서였을까. 20년 넘게 단 한 번의 사고도 없던 내가, 결국 사고를 당했다. 하… 대한민국의 교통법, 아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미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나니 더는 정을 붙이기 어려울 것 같다.


대로에서 내려와 좌외전 신호를 받아 직진하던 순간, 사방에서 무법자처럼 끼어드는 우회전 차량들이 있었고, 나는 그 틈을 조심스럽게 피해 좌회전을 감행했다. 미리 위험을 감지한 나는 최대한 1차선에 바짝 붙었고, 안전하게 차선을 확보했지만, 앞에 보이던 제네시스 차량이 깜빡이도 없이 우회전을 시도하는 게 보이자 나는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진입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제네시스는 1차로 돌진했다. 내 차를 그대로 들이박았다. 운전자는 노인이었고, 우회전이 아니라 거의 횡단보도를 걷는 것처럼 대각선이 아닌 직선으로 내 차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신호도, 예의도 없이 내 차를 파고들었다. 그다음은 더 황당했다. 차에서 내려 창문을 내리고 나에게 소리부터 지르더니, 순식간에 차를 빼버려서 나는 사고 현장 사진조차 찍지 못했다.


그때였다.
반대편 차선, 중앙선을 두고 멈춰 있던 차 한 대에서 문신이 가득한 팔을 가진 한 젊은 남성이 창문을 내리며 소리쳤다.


“아줌마! 차 움직이지 마요. 빨리 사진 찍고 동영상 찍고, 보험사에 바로 연락해요.
레커차 부르면 절대 보내지 말고요.”

그는 창문 너머로 조목조목 사고 처리 절차를 설명해 주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유유히 떠나갔다.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릴 정도로, 그는 내게 작은 영웅 같았다.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로는 모자라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다.


한편, 사고를 낸 노인은 자신의 차량을 한참 멀리 빼놓고는 내게 차를 빼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보험사에 전화를 걸고, 트렁크를 열어 차를 그 자리에 세워둔 채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 침 치료를 받고, 부항을 뜨며 다시 병원을 다닌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움직일 때마다 숨이 찬다.


그런데 보험사에서 날아온 말은 더 기가 막혔다.
“10% 과실이 귀하에게도 있습니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는 방어운전을 했고, 규정 속도를 지켰으며, 신호도, 차선도, 모든 법을 따랐다. 그런데 내게도 과실이 있다는 말에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경찰서에 직접 조사 의뢰를 했다. 경찰관의 설명은 이랬다.

“우리나라는 온정의 나라입니다. 잘못이 없어도 100:0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고령자이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10% 과실을 귀하에게 줍니다.”

…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이게 법인가? 이게 공정인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예측했고, 감지했고, 피했고, 규칙을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는 ‘그래도 조금은 네 책임’이라는 말이 합법처럼 작동된다면, 도대체 누굴 위한 법이고, 누구를 위한 규칙인가. 이대로라면 앞으로 교통법규는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다 지켰고, 오히려 더 조심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과실 10%를 받는다면, 대체 법을 왜 지키는가? 법을 지킨 자만 손해를 보는 나라라면, 법은 단지 권위의 가면에 불과한 셈이다.


미국, 하와이, 유럽에서는 이런 사고에서 우회전 차량이 100% 과실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좌회전 차량도 '주의를 더 했어야 했다'는 이유로 과실 비율을 가져간다.


나는 주의했다. 속도까지 줄였고, 그 덕분에 차량은 찌그러졌지만 생명은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대한민국 법을 ‘존중’ 하지 않고, 속도를 더 냈다면, 그 제네시스 차량이 뒷문을 박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 사람에게 100% 과실이 인정되었을 거라고 한다. 결국, ‘사고를 피하지 말고 당해야’ 법은 제대로 작동하는 셈이다.


우와, 대한민국 만세다.

예의범절?
인내심?
노인 공경?

그 모든 말들이 내게는 비현실적인 단어처럼 들린다. 사고를 낸 그 노인은 소리를 지르고 차를 멀찍이 빼버렸다. 그러더니 보험사 직원이 도착했을 땐 태도가 돌변했다. 덜컥 문을 열며, 미안하다고, 병원에 꼭 가보라고 말한다.…아.

교통 경찰관은 “그냥 온정으로 10% 받아주세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새 차를 사고차로 만들었고, 보험료는 오를 것이며, 중고차는 똥값이 되고, 없는 시간 쪼개 병원을 다니는 중이다. 이런 나라에서, 이런 상황에서, 내가 온정을 베풀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사고가 났던 바로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나의 생각이었다.


‘내가 절에 가지 않아서 이런 사고가 난 걸까?’
‘엄마한테 연락을 안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어릴 때부터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불손하면 우리 집에 나쁜 일이 생긴다는식의 지속적인 세뇌 속에서, 무조건 엄마 말을 따라야 하고, 복종해야 하고, 엄마에게 ‘잘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30년 넘게 내 삶을 지배해 왔다. 사고 직후 나는 호흡이 가빠졌고, 정신은 멍해졌으며, 몸은 부들부들 떨려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남편에게 나의 생각이 지금 이런데 어쩌지라고 물었다.


“나 지금,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데… 어떡하지?”

그때 남편은 단호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아니야, 잘못된 생각이야.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어. 절에 안 갔다고 사고가 나는 것도 아니고, 엄마한테 연락 안 했다고 벌 받는 것도 아니야. 지금은 그런 거랑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그냥 사고야. 그뿐이야.”


나는 내 안의 오래된 ‘습관적 사고’와 이제 막 회복 중인 ‘현실적 사고’가 충돌하는 걸 느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선택했다.


절에 가는 대신, 달리기로 했다.

절 대신, 그림을 그리고, 집안일을 하고, 내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나는 나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씩 확신이 올라왔다. 절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확신.

내가 언제부터 잘못된 길에 들어섰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절에 가지 않으면 온전한 하루를 시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절은 내 불안을 달래주는 곳이 아니라, 내 하루를 삼켜버리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치료를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극심한 불안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고, 엄마에게 반복적으로 주입받은 ‘절에 가야만 삶이 잘 풀린다’는 믿음이 결국 내 삶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절에 다녀오면 하루 반나절이 사라졌다. 절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이게 내 삶인가’ 싶어 수천 번도 넘게 ‘차라리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나도 평범한 하루를 살고 싶었다. 가볍게 취미를 즐기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상을 허락받지 못했다. 절에 가지 않으면, 내 인생은 망할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메아리쳤고, 50이 다 되어가는 나에게도 엄마는 여전히, “절에 자주 가야 네 삶이 평탄해질 거야”라며 그 믿음을 반복해서 주입했다.


세뇌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집요하고 강하다. 나는 지금도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가며, 내 아이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말수를 줄이는 쪽을 택한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 그녀의 모습이, 엄마의 그림자가 내 안에 깊은 나무뿌리처럼 박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아이와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내가 괜히 잘해보겠다고 다가가다 또 상처를 줄 바에야, 차라리 멀찍이 지켜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렇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니 아이와의 관계가 조금씩 편안해졌다.


나는 많이 부족한 엄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적어도 ‘절에 가지 않으면 불안에 질려 살던 엄마’보다는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아이 앞에 서 있으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이를 지켜보고, 믿고, 내 삶을 조금 더 성실히 살아내는 것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리고 아마 내일도

나는 달린다.

서울의 대로를 휘젓듯 고등학생 엄마로서의 나를 묵묵히 살아낸다.
땀 흘리며, 바람맞으며,
나에게 집중한다.


구름에 걸린 석양 (달리다 찰칵)

그러니..

괜찮아요.. 저와 같은 상황이라면 저를 보고 힘을 내세요. 저는 오늘 이 단 하루도 살아 내기 위해 이렇게 용을 쓰고 있어요..



by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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