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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혜정 May 15. 2017

환상

리처드 바크의 환상을 읽었던 쪼렙 대학생

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서툴렀다. 그건 대부분 사교성이 없는 내 잘못이기는 했다. 그저 날 어디에도 소속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제로 어딘가 소속되어야 하거나, 아니면 아예 심한 박탈감을 느껴야 하거나 하는 선택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주류는 물론, 비주류의 소위 지식인 운동권들까지 증오하게 되었다. 어느새 난 주류가 되지 못한 인생의 패배자인 동시에, 투쟁에도 참여하지 않는 프리라이더로 정체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억울했다.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라고 변명했다. 나는 어쩌면 서울에 와선 안 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느낀 것은 대학에 와서였다. 딱히 행복하진 않았지만 부끄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난 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압도적인 돈과 압도적인 지식이 부럽고 나 자신이 부끄럽다고 느꼈다. 서울은 시골과는 달리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그 모든 기회가 지옥으로 변했다. 서울은 내게서 박탈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눈 앞에서 보여주는 곳이었다. 또한 내가 무식하다는 것이 죄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서울에는 날고 기는 천재들이 많았고, 나를 친구로 받아줄지 말지 평가하는 듯했다. 내가 대학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정도로는 멈추지 못하고, 내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지경으로 발전했다. 필사적으로 시골을 탈출하려고 했었지만, 어쩌면 난 대학을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는 수많은 아이들 중에 하나였다. 약간 회의적으로 세상을 파악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왜,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긍정적으로 결론을 내렸었고 나름대로 원칙도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선 모든 것이 토대부터 무너졌다. 소위 운동권에라도 들면 앉을자리라도 마련될까 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려봤지만 더 지독한 회의만 느꼈을 뿐이었다. 그들의 대화나 논쟁은 괴상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말꼬리 붙잡고 늘어지기, 상대방의 궁극적인 의도를 자비로운 마음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말실수에 주목하기, 그래서 오해할 만한 말을 스스로 제거해 가면서 말하느라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 그렇게 되다 보면 어느새 처음의 문제는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났고, 뜻 없는 말장난만 난무하는 것처럼 들릴 뿐이었다. 방어하다 보면 내가 하려던 말이 아닌 말을 하게 됐고, 그것으로 인해 더 큰 공격을 받았다. 말할 의욕, 글을 쓸 의욕을 상실했다. 난 진보적 지식인을 추구하는 학우들, 소위 운동권 학우들과도 더 이상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학우들의 입술만 쳐다봐도 피곤을 느꼈다. 교지나 학보라도 보면 더 가관이었다. 내가 읽고 싶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나도 이 학교 학생인데, 교지나 학보조차 나보고 공부해서 적극적으로 이곳에 비집고 끼어 앉든지, 아니면 지금처럼 그렇게 양아치처럼 배척당하든지를 강요한다고 느껴졌다. 난 아주 작은 내 자리와 아주 소수의 친구만을 필요로 했지만, 그것조차 없었다. 대학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비루먹은 개처럼 밀려났다.


학교 밖에서 생활을 찾기 시작했다. 매일 음악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술이 깨면 불행하기 때문에 깨기 전에 또 마시곤 했다. 나중엔 술로도 좀처럼 행복해지지 않아 환각제를 먹었다. 환각제를 구할 수 없을 땐 약국을 돌면서 몸살약을 처방받아서 그중 밴드 멤버가 알려준 알약만 따로 모아서 먹었다. 그땐 의약 분업 전이었으니까.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정신병원을 다니는 돈조차 부모한테 미안해서 구걸하기도 괴로웠다. 약이나 술에서 깨면 미칠 것 같은 우울함 속에서 오늘도 이렇게 쓸모없게 하루를 보냈구나, 난 하루하루 썩어가는구나, 난 가치가 없는 인간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죽고만 싶었다. 남들은 반짝반짝 앞서 나가는데. 유학을 가든가 봉사 활동을 하든가 인턴을 하든가 해서 주류의 삶을 좇든, 공부를 해서 사회의 중요한 일에 의견을 내고 참여하는데, 나는 그저 하루하루 뒤쳐지는구나. 그런 우울함을 견디기 위해 다시 술이나 약을 먹어야 했다.


난 삶을 살던 기둥과 뿌리를 잃고 어떤 식으로 숨을 쉬어야 할지 몰라 괴로웠다. 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철학서, 종교서 등을 뒤졌다. 그러나 책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람이 싫어졌다. 주변에 사람 냄새만 나도 증오했다.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수준을 넘어, 성격 파탄자처럼 되어 아무나 향해 으르렁거렸다.



서론이 길었지만, 리처드 바크의 환상이란 책은 이 시기에 읽었다. 좀 더 내 마음 상태에 가깝게 위로를 해주었던 것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나 데미안이었고, 지금은 이 환상이란 책에서 느껴지는 서양식 사고의 한계 때문에 그렇게 추켜세울 마음은 없지만, 역시 가장 내 마음을 때렸던 사건 중에 하나가 이 책을 읽었을 때였으므로 이것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난 술이나 약 말고도 행복해지기 위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도 하고 싶었다. 구도하고 번뇌를 씻으면, 그럼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이걸 읽을 당시에는 서양식의 진리나 본질에 대한 탐구가 해탈이나 구도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던 때였다.

그렇게 오해한 내게, 환상은 굉장히 강렬한 책이었다. 리처드 바크는 기독교에 회의를 느끼고 나름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를 만들어냈다. 자기 스스로 구원의 방법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환상 속의 주인공도 작자와 같은 ‘리처드’다. 이 소설을 쓰는 행위는 리처드 바크에겐 일종의 구도였을 것이다.


주인공 리처드는 작은 비행기의 파일럿이며 사람들을 태워주고받은 돈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길에서 도날드 시모다를 만난다. 의례적인 인사도 없었다. 그가 외로워 보여서 말을 거는 리처드에게 시모다는 대답한다.


 “당신도 역시 외롭게 보였어요.”


리처드가 귀찮으면 떠나겠다고 말하자 시모다는 이렇게 말한다.


 “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말에 대한 리처드의 대답은 놀랍게도, 다음과 같았다.


 “늦어서 미안해요.”


둘은 만날 운명이었다. 리처드는 단번에 그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대답한 것이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기다린 메시아를 향해,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한 것이다. 시모다는 비행기가 없어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바라기만 한다면 원하는 건 모두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물 위도 걸을 수 있었고, 다친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었다. 둘은 함께 여행하고, 리처드는 시모다의 인도를 받는다. 


구원이었다.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를 만난 것처럼, 싯다르타가 고타마를 만난 것처럼, 리처드는 시모다를 만난 것이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말로 절실하게 구원자가 필요한데, 왜 이런 메시아들은 나보다 덜 괴로워 보이는 사람에게 나타난 걸까, 하고 말이다.


 시모다는 말한다. 


 “난 메시아가 되는 일을 그만두었소.”


 시모다는 그런 식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은 알지만, 특별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런 시모다처럼 특별하지 않은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의 맨 앞에도 소개되어 있다. 성경 형식으로 쓰인, 강에서 사는 미생물에 대한 우화다. 이 우화야말로 이 책의 진짜 핵심일 것이다. 


강바닥 바위 밑에 달라붙어 물결을 견디며 사는 생물들이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중 한 생물이 ‘달라붙어 있는 것에 싫증이 난다. 난 바위를 잡은 손을 놓겠다’고 말했다. 

다른 모든 생물들이 비웃고 만류하며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이 생물은 두 손을 놓아버렸다. 

이 생물은 가혹하게 강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달라붙기를 거부하자 마침내 물결은 그를 밑바닥으로부터 들어 올려 자유롭게 했다.

이 생물은 물결을 따라 하류로, 하류로 계속해서 흘러갔다. 

마침내 이 생물이 다른 바위에 도착하자, 그곳에 달라붙어 있던 생물들이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러 오신 저 메시아를 보라!’


그 생물은 자신은 모두와 다를 것이 없다며, 손만 놓는다면 모두 자신처럼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구세주여!’라고 외칠뿐이었다.


시모다는 그렇게 먼저 손을 놓아버렸을 뿐인 메시아였다. 계시받지 않은 메시아인 시모다의 가르침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이 현세란 무엇인가? 이 세상 만물은 무엇인가? 그건 모두 환상이오. 모든 것이 이러한 현상 세계에 내포되어 있는 환상이오. 그 점을 이해하겠소?”


시모다는 이 세상은 환상일 뿐이며, 본질은 따로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쓴 [메시아 편람]을 리처드에게 준다. 무겁고 성스러운 성경책이 아니라 메시아 편람이라니, 그 소박함이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모다는 유명해지지만 당연히 적도 생겼고, 총으로 살해당한다. 시모다는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리처드는 그에게 상처를 치료하는 기적을 다시 한번 보이라고, 죽어가는 시모다를 안고 얼빠진 소리를 하지만 시모다는 그대로 죽는다.


“난 연극을 좋아하나 봐…”


죽은 시모다를 안고 망연자실해 있는 리처드의  품속에서 메시아 편람이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지며 바람에 펄럭 펄럭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리처드는 그 책을 주워 들었다.


‘이것이 끝인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농장 들판에서 어떤 미친개에게 한번 물린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빈말이란 말인가?’ 


그리고 열린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책에 적힌
모든 것은
어쩌면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장소는 버스 안이었는데, 난 남들이 보건 말건 하염없이 울었다. 나에게도 메시아가 필요했기 때문에, 누군가 날 구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메시아가 오지 않은 것에 대해, 그리고 그 메시아가 죽어버린 것에 대해 화를 내면서 한참 동안을 울었다. 


지금은 말했듯이 이 책의 서양식 사고에 한계를 느끼기에 추천작으로 꼽지는 않지만, 내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기에 몹시 애착을 느낀다. 하지만 시모다의 가르침은 리처드 바크에게만 통하는 구원이었다. 난 그 당시에도 조금도 구원을 얻지 못했다. 멋지다고 생각은 했지만.


시모다의,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허상이라면서 본질의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는 태도는 플라톤의 이데아설에 뿌리가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안 할 수가 없다. 그런 음모 이론은 근대까지의 서양을 지배하고 있던 것 아닌가? 리처드 바크도 결국은 그 사고 안에 한계를 가진 것이 아닌가? 시모다는 진리나 본질이 따로 있다는 것처럼 말했지만, 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다행히 공부가 되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던 절대적인 진리나 본질은 허상일 수도 있다, 진리나 본질에 대한 믿음은 근대까지였으며, 현대에 들어서 해체되었다, 딱 거기까지는 배운 것이다. 

오히려 환상보다는 나중에 배운 이런 지식이 내 정신 상태에 더 도움이 되었다. 내가 구하던 진리나 본질이 구도이고 해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진리와 본질을 알아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애초에 그런 건 없었다. 그 사실을 그저 건조한 학문으로 배우는 순간, 난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구제하지 못하는 학문은 진정한 학문이 아니라더니, 때론 그냥 공부만 해도 삶은 구제된다.


이제 환상을 읽고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않지만, 여전히 시모다는 부럽다. 자신만의 이론을 가지고 자신만은 확실히 구할 수 있는 메시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모다처럼 나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리고 내 멋대로 살아 보기로 한 결정에는 약간 도움이 되었다. 지금 난 4학년 2학기이지만 지금에서야 이런 지식들을 가르쳐 준 학교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주위를 싫어하지 않는 방법은 주위와 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정신적으로 무장하면 되는 것이었다. 타인을 증오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며, 타인을 위해 살 수도 있는 것, 내가 싫어했던 저 똑똑한 학우들이 바로 그런 걸 하려고 싸우고 공부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동시에 진정한 자신을 위한 구원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2002년

전혜정 소속청강문화산업대학교 직업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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