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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혜정 Jun 09. 2017

김훈과 유디트

'언니의 폐경'에는 살아있는 자매가 없다.

김훈의 인터뷰를 읽었다.


(여자를) 어떤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묘사하는데 나는 매우 서툴러요.


한 편으로는 반가웠다. 그간 여성들이, '김훈의 여성은 사물화 되어 있다'라고 아무리 얘길 해도 트집으로만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문장력 만렙 찍은 훌륭하신 소설가의 예술 세계도 잘 모르는 주제에 예민하기만 한 여자들이 감히 불평이냐며 일축되었다. 그런데 김훈 스스로 밝혔다. 여자를 사람으로 묘사할 수 없다고 자백했다. 우리들의 지적은 의미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 김훈뿐일까? 기존의 다른 작품에서도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함수를 가진 장치였다. 피해자, 희생자, 남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버튼, 연애나 섹스를 위한 공략 대상, 남자의 무조건적 안식이 되는 모성애적 성녀, 남자의 일을 방해하는 관문, 남자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봉사자, 남자의 뮤즈, 남자의 야만성을 묘사하기 위해 잔인하게 살해당하거나 강간 당하는 일회용 신체, 남자의 동기와 엔딩으로만 존재하는 납치된 수많은 여자 친구들.


지금까지의 문학과 예술은 이렇게나 많은 유사 김훈들이 생산해왔다. 그런 상황에서 김훈인들 뭘 배울 수 있었을까. 여성들조차 작품 속의 여성에게 기대하는 모습은 남성들의 시선으로 굴절된 모습이지 않은가. 


그래서 여성들이 더 많은 활동을 해야 한다.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창작을 해야 한다. 일하고 공부하고 싸우고 노는 여자들, 비열하고 의협심 있고 점잖고 활기차고 대범하고 소심하고 이기적이고 이타적이고 폭력적이고 상냥하고 야망에 불타고 좌절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사람을 구하고 위협하고 유혹하고 유혹당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여자들을 봐야 남자들과 똑같은 사람인 줄 안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인격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배우기 힘든 환경이었다며 김훈을 실드칠 생각은 물론 없다. 모르면 지금부터라도 고민하겠다고 하면 좋았을 텐데. 인류의 절반을 모를 수 있는 것도 특권이다. 만약 여자가 전쟁 소설을 썼다고 치자. 총기 다루는 묘사가 엉망이라면, 다들 벌 떼같이 달려들었을 거면서.


여하튼 그런 의미로 이번 글에서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년 출생)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르테미시아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카라바조 화풍을 잇는 뛰어난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장녀의 재능이 남동생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크 초기 시대에는 여자가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 위대한 아버지는 딸에게 각 잡고 미술을 가르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테미시아 이전에도 화가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사사한 여성 화가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아르테미시아의 미술학교의 입학은 거절되었다. 오라치오는 포기하지 않고 토스카나의 화가인 아고스티노 타시를 고용해서 딸의 개인 교습을 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타시는 17살의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한다.


타시아르테미시아의 명예를 위하여 결혼하겠다고 맹세했으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당시의 강간 범죄를 해결하는 방식. 한국 역시 1999년에 결혼을 약속했다는 이유로 강간범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례가 있다), 결국 아버지는 타시를 상습 강간으로 고발했다.


이 재판은 7개월이 걸렸는데, 그 과정에서 아르테미시아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에도 강간을 고발한 여자들은 남자의 신세를 억울하게 망치려는 꽃뱀이 아닌가 의심받았기에, 모진 고문 속에서도 일관된 진술을 할 수 있어야 증언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모진 고문과 수치스러운 부인과 검사로 점철된 재판 끝에, 아르테미시아는 승소한다.


참고로 오라치오의 그림을 훔치려고 했다거나, 처제와 간통하며 아내를 죽이려는 계획까지 재판 중에 드러난 타시는 1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 1년이 압축적으로 지옥 같았기를 빈다.


아르테미시아는 그런 일이 있었던 이후로도 신세를 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당시 여자들은 잘 다룰 수 없다고 여겨졌던,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들의 그림들을 누구보다도 박진감 있게 그려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이다.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명료하다. 유디트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단호하고, 그녀의 몸은 술 취한 장수쯤 짓누를 수 있을 만큼 건장하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홀로페르네스의 몸을 붙잡고 있는 하녀의 자세도 살아 있다. 많은 남성 화가들이 이 유디트를 그렸지만, 아르테미시아만큼 패기 넘치는 그림은 단연코 없다.


1614년에 그린 첫번째 버전.


다들 알겠지만 이 그림은 구약성경 유딧기에 있는 내용을 소재로 한 것이다. 아시리아 군대가 유대 도시 베툴리아를 침략하자, 아름다운 과부였던 유디트가 거짓 투항하여 적장 홀로페르네스에게 술을 만땅 먹인 뒤 그 목을 잘라버렸다는 이야기다. 이걸로 아시리아는 패배했다.


이런 논개 같은 이야기에 많은 화가들이 영감을 얻었는데, 아르테미시아가 아버지에게 전수받은 화풍의 주인인 카라바조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카라바조의 유디트, 1598-1599


카라바조의 그림의 유디트는 더 가녀리고, 고운 미인이다. 찡그린 얼굴 표정도 어쩐지 관조적이다.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유디트는 더더욱 살인자와는 거리가 멀다. 질펀한 연회 끝에 침대 위에서 사람의 목을 딴 상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차림새는 흐트러짐 없이 정숙하다. 모자 위의 깃털조차 얌전하다. 표정은 방금 전 살인을 한 사람 같지 않다. 빨리 도망쳐야 할 텐데 시선을 의식하는 것처럼 섹시하고 도발적이다. 크라나흐는 모에를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긴 무기, 냉정하고 섹시한 표정, 가냘픈 몸매,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 그리고 적군의 장수를 암살한 아름다운 여성. 불가능한 이상들의 조립이 아닌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유디트, 1530


크리스토파노 알로리의 유디트는 어떤가. 좀 심하게 말하자면 청순하고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성에게 사람 목만 들려준 것 같다. 방금 저지른 살인의 충격으로 멍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냥 남성이 보고 싶은 무해한 표정으로 그렸을 거라는 데에 500원 건다. 유디트는 애국을 위해 살인을 결심할 정도로 갸륵하지만, 원래는 절대 억세고 해로운 여성이 아니어야 하니까. 숭배받을만한 여성이어야 하지 않은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의 유디트, 1613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보티첼리의 유디트도 마찬가지.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요동치는 인간이라기보다 아름다운 사물 그 자체다. 그렇다, 이런 걸 보고 김훈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이 시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장인이 그린 마스터피스급의 김훈스러움이다.


보티첼리의 유디트, 1470


다음은 조르조네의 유디트도 보자. 아름답고 우아하고 정숙하며 고요하다. 역시 남성이 보고 싶은 여성의 모습이다.  치마의 절개선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 맨발로 얼굴을 밟고 있는 상황까지 페티쉬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 역시 비난하는 게 아니다. 난 많은 명화도 페티쉬의 지도라고 생각하니까.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여성 화가가 또 있다. 페데 갈레치아 그린 유디트이다. 아르테미시아가 태어난 지 3년 후의 그림이다. 이 분도 아버지가 예술가였고, 딸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개인 교습을 시켰다. 비록 여성이 그렸다지만 나로선 그다지 감흥이 없는 그림이다. 아무리 자화상이라고는 해도, 결국 남성이 바라보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내재화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페데 갈레치아의 유디트, 1596


코르넬리우스 갈레의 유디트는 성녀 기믹이다 못해 아예 천사들이 와서 돕고 있다. 이 정도까지 연출되면 더더욱 유디트란 여성은 인간이 아니다.


코르넬리우스 갈레, 1610



카를로 사라세니의 유디트 역시 참으로 고우시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은, 그녀가 한 일은 옳은 일이기에 동요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 표정은 좀 섬뜩한데...?


카를로 사라세니, 1615


너무나도 유명한 클림트의 유디트를 빼놓을 수가 없다. 정숙하고, 현명하며, 애국심 넘치고, 청순한 유디트는 근대로 넘어와서 요염하고 관능적으로 변했다. 이전의 유디트들이 천사의 가호를 받는 성스러운 이미지로 그려졌다면, 근대 이후에는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할 만큼의 고혹성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클림트의 유디트, 1901


클림트에 와서는 농염하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미소까지 머금고 있는 섹스의 상징인 유디트가 되었다. 물론 난 이 그림을 좋아해서 직접 보러 가기도 했지만, 역시 남자들이 보고 싶은 여성의 특성만 채취되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프란츠 스턱의 그림 역시 유혹하는 유디트이다. 그냥 야한 걸 그리고 싶었을 뿐인 것 같기도...


프란츠 스턱, 1928


이제 성스럽거나 섹시한 유디트는 모두 보았으니, 개인적으로 아주 애정하는 작가인 프란시스코 고야의 유디트를 보자. 이 분은 정말이지 인정이다. 에로스고 여성의 사물화고 나발이고 간에 그냥 잔인한 걸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싶을 뿐인 마이웨이가 장사이신 분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1819–23


고야는 제외하고, 모든 유디트 중에 가장 인간이라고 느껴지는 그림은 단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그림이다. 그녀의 개인적인 분노가 담겨 있기에 저토록 압도적인 에너지가 분출하는 것이라 하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도 저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서의 유디트란 얼마나 후련한가!


아르테미시아는 23살 때 여성 최초로 피렌체 디세뇨 아카데미아의 회원이 되는 명예를 얻고, 그 후로도 많은 작품 활동을 한다. 그 후론 결혼하고 자식들도 낳고 잘 사셨다. 다행이다.


아르테미시아가 수많은 남성 화가들의 관음과 숭배의 시선 속에서 사물화 되어 흘러 다녔던 유디트를 비로소 한 명의 여성으로, 인간으로 살려내 주었듯이, 여성들도 여성을 창작해야 한다. 여성을 오롯이 인간으로서 살아 숨 쉬게 해야 한다.


(근데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으니... 후배님들에게 맡길까 한다...)

전혜정 소속청강문화산업대학교 직업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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