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혜정 Dec 22. 2018

[지금, 만화] 발간호, 웹툰 <신도림> 비평

장르적 관습이라는 엔진을 달고 포스트아포칼립스 땅을 질주하는 쾌속 서사

네이버에서 연재하고 있는 오세형 작가의 신도림은 목적이 매우 명확한 웹툰이다. 파죽지세로 쾌속 진격하는 통쾌한 서사를, 강자의 입장에서 즐기는 것이 그것이다. 이 통쾌함을 위해 작가는 특유의 숙달된 기술력으로 강렬한 색감과 구도, 과장된 동세, 대담한 레이아웃을 연출하여 시각적인 박진감을 극대화한다.  


낙관적 승리의 서사

강자의 입장에서 즐기는 서사란, 다시 말해 평범한 약자의 차근한 성장을 인내하지 않는 서사이다. 주인공의 정체성은 성장하지 않는다. 능력도 이미 최상위권이다. 다만 그 잠재력을 아직 다 못 끌어냈을 뿐이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크고 작은 성패를 조마조마하게 가늠해보는 대신, 퍽 낙관적인 마음으로 일명, '포텐이 언제 터질지' 기대하며 본다. 이것이 흔하게 회자되는 '사이다' 서사의 한 방식이다.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확산되는 추세이다. 최근 웹소설 등에서 볼 수 있는 회귀물, 환생물 등에서는 이미 완성된 문법이다. 이보다 더 이전, 통신문학이나 인터넷소설 당시에는 '이고깽(이계에 고등학생이 가서 깽판을 친다)'이라는 은어로 불리던 비슷한 서사가 유행했다. 애초부터 주인공이 이 세계의 가장 강력한 존재로 시작하여 그 능력을 전시하기만 하는 먼치킨류도 인기를 끈다. 투명드래곤이 유머에 그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진지하게 원펀맨으로 다뤄진다. 

전통적인 장르물에도 '록키'처럼 주인공만의 값진 승리를 하는 서사는 많았다. 이 승리를 최대한 시원하게 맛보기 위해, 전통 장르물의 작법은 주인공을 가장 밑바닥 지옥으로 끌어내렸다. 지옥과 승리, 이 사이의 낙차는 크면 클수록 좋다. 미리 준비되어 있는 시원한 물 한 잔의 가치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독자를 탈수상태로 만든다. 주인공은 주인공만을 위해 고안된 맞춤형 지옥에서 불굴의 의지로 기어 나와 승리를 거머쥠으로써 독자의 갈급함을 해소한다. 창작물에서 얻을 수 있는 대리만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사이다류에는 그러한 지옥이 없다. 독자들은 더 이상 긴 탈수 상태를 견디지 않는다. 약간의 목마름에도 펑펑 사이다를 터뜨려야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두고 혹자는 SNS 때문에 긴 호흡의 글을 못 읽게 되고, 유튜브 등의 짧은 동영상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한다. 또는 한국의 청년들이 처한 현실을 상기시키며, 주 독자층인 이들이 이미 충분히 지옥인 삶을 외면하고자, 욕망에 기반하여 창작물을 소비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어쨌든 핵심은, 이미 많은 수의 독자들이 대리만족하고 싶은 서사는 성장을 통한 어려운 승리가 아니라, 쉬운 승리라는 것이다.



주인공에게 유리하게 설계된 비일상계

주인공이 어려운 변화없이 승리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그냥 세계가 변하면 된다. 예컨대 '이고깽'에서의 주인공은, 성적 중심의 경쟁 사회에서 낙오하다시피 한 고등학생이지만, 이계에 가서 쉽게 주류에 편입된다. 비일상계의 질서는 마침 우연히도, 주인공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계로 갔더니 드래곤이 쓰는 언어가 한국어라거나, 평소 즐겨 하던 게임 속의 아바타가 된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렇게 주인공에게 맞춤화 된 비일상계에서, 평범하던 주인공은 자연히 최상위의 권위자가 된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 다음부터의 주인공이 치러내야 하는 시험은 힘든 관문이 아니라, 그 세계가 주인공을 '발견'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세계는 주인공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고 '경외'하게 된다.  

웹툰 신도림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도림에서 설정된 일종의 이계, 즉 비일상계는 핵전쟁으로 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이다. 작가는 거대하게 판을 때려 엎고, 비일상계를 원래의 일상세계 위에 포개어 세팅한 뒤 시작한다. 이 포개짐은 기존의 세계에서 외면당하던 가치가 제고될 때의 '낯설게 하기'를 극대화하는 기법이 된다. 청소년 야구, 족구, 당구, 태권도, 판치기, 헬스, 재봉, 미용 기술자가 유리해진다. 


야구 선수인 천둥과, 태권도 선수인 땡전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비주류 감각




아래의 예를 통해 기존 세계에서는 비주류들이세상이 바뀌어서 주목받을  있게 되었다는 작품의 세계관을천둥의 입을 통해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캐릭터상의 천둥은 기존 세계에서 대접받지 않던 직업들에 대한 편견이 없으나 편에서는 상대를 도발하기 위해 기존 세계의 규칙을 환기시킨다.


직업을 '잡부'로 싸잡으며 인생 패배자로 칭해서 도발하는 천둥의 대사


이렇게 기존의 공고한 장벽으로서 새로운 세대들의 진출을 가로막아오던 질서, 즉 학연, 지연, 경제력, 지위, 명예, 연령에 부여되던 권위가 모조리 붕괴된 이 세계에서는 오로지 강한 육체와 싸움의 기술만이 질서가 된다. 거기에 일부 청소년들은 방사능 부작용으로 신체적으로 18세에 성장이 멈춰져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 방사능에 면역인 것은 물론, 가지고 있던 능력까지 증폭되는 부작용을 겪는다. 원래 청소년 국가대표 야구 선수였던 주인공 '천둥'은 방망이로 총알도 되받아 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된다. 이런 아이들을 키즈(Kiz)라고 불린다. 즉, 신인류이다.  

환생을 했든 회귀를 했든 이계로 왔든, 일종의 치트키를 가진 사이다류의 주인공들은 기존 서사와는 달리 일상계를 미련없이 포기한다는 특징이 있다. 일상계에 남아 주인공의 귀환을 기다리는 가족, 친구, 연인은 더 이상 독자들에게 애틋한 존재가 아니다. 독자들은 주인공이 가족, 친구, 연인 때문에 발목 잡혀 출세를 방해 받는 것에 넌더리를 내게 되었다. 천둥 역시 함께 배터리를 구성하고 있던 포수, 완전한 타인라기보다 자신의 능력 확장 툴킷에 가까운 '점보'만 제외하고, 자신이 직접 선택한 사람들과 함께 처음부터 인간관계를 다시 구성한다. (점보의 대사는 '점보'밖에 없다.)   

6년이 지났다지만 부모나 이전의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비추는 아이들은 없다. 그들은 임모탄 조처럼 씩씩하게, 위화감 없이 새 세계에 착 달라붙어 있다. 기존 관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통해, 새 세계의 진정한 원주민이 된다. 이것이 신인류다.



기성세대와의 단절

의도된 단절, 이것은 기성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다. 신도림의 가장 핵심적인 설정은 신인류인 청소년에게 누구든 판결할 힘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천둥은 상대방이 나이가 적든 많든, 마음에 안 들면 날려버릴 힘이 있다. 방사능 부작용 때문에 18세에 성장이 멈춘다는 설정. 핵전쟁 이후 건설된 새로운 지하도시 '신도림'에서조차 배제되자, 자신들만의 도시를 새로 건설한다는 설정. 이 의도는 이렇게나 뚜렷하다.  

또한 천둥은 단순히 정의의 수호신이 아니다. 기성세대를 고발하되, '죽은 시인의 사회'와 같은 류도 이제는 낡은 담론이기 때문이다. 천둥과 그 동료들은 기성세대의 한심한 질서도 물론 거부하지만, 기성세대가 옳다고 강조하던 약자에 대한 배려, 인성, 신중, 정직 같은 가치도 때에 따라 철저히 일소에 부쳐버린다. 천둥과 동료들은 그야말로 약육강식에 최적화된 채로, 자신들이 마음에 드는 가치에 따라 행동한다. 기성 세대가 중요하게 여겼던 시스템은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모두가 억압없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게 하겠다고 기성세대가 추가해 온 여러 시스템들은 너무나도 복잡해진 나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배제와 불평등의 근거가 될 뿐이었다. 천둥과도 같은 아이들에게는 그저 또다른 억압으로 작용할 뿐이었다. 그래서 천둥은 무조건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새로운 룰대로만 행동한다.  

'천둥'과 동료들이 반복적으로 던지는 대사가 있다.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내뱉는 대사는 '강한 놈들이 간다'이다. 강한 놈들이 가도 안 될 것 같다면? 그땐 '더 강한 놈들이 간다.' 어른들의 권위에 도전하지만, 또래의 나약함도 용서하지 않는다. 권선징악의 서사조차도 희미해진다. 과거에 유행하던 니힐리스트 주인공들과 바탕은 비슷하지만 천둥은 허무나 차가운 냉소로 외면하지 않는다. 뜨겁게 날뛰는 니힐리스트 안티 히어로에 가깝다.


기성세대와는 달리 오로지 강함을 추구하며, 또래라도 나약함은 용서하지 않는다.



장르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은 그야말로 장르 관습의 샘플러다. 소년만화, 히어로물, 그 외의 다양한 액션 장르물들이 갖고 있던 관습과 클리셰들이 호쾌하게 뒤범벅되어 있다. 신도림은 이 관습들을 새로운 것처럼 포장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이거 뭔지 알지?' 같은 태도다. 사이다류가 관습을 재포장하지 않는 이유는, 서로 다 알고 있는 바로 그 관습을 통해서 최대한 빨리 본론부터 시작하기 위해서다. 

강한 동료를 얻어 나가며 주인공의 세를 키운다는 설정은 일본의 3대 소년 만화인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를 언급하지 않아도 워낙 소년 만화의 정석이다. 특히 원피스나 나루토처럼 각각의 기술과 능력을 가지고 상성에 따른 강약이 있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상성에 대한 설정


무협물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동사서독 남제북개 같은 지역적 세계관과 유사한 강북, 강남이라는 대치 세력이라든가, 무협의 주요 테마인 무림의 요리사가 요리 기술로 싸운다는 방식도 '소림사 주방장'이나 '단도행'이 떠오를 정도로 낯익다. 필살기도 한자로 병기한다. 강북에서 네트워크의 허브로 동작하는 장소의 이름은 신용문객잔이 생각나는 '신풍객잔'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방사능 부작용으로 초능력을 가진 전사가 된다는 서양의 흔한 히어로물 설정도 눈치보지 않고 가져왔다. 이러한 반복적 장치들의 거리낌없는 사용이 사이다류의 소양이기도 하다. 



<신도림>의 Tiger.D는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피터 제이슨 퀼과, 일본의 60년대 만화 <타이거 마스크>와의 모티브가 비슷하다.


스타일리쉬함, 일명 '가오'를 중시하는 작품이다 보니, 대사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독자가 알아야 하는 정보를 대화의 형식을 취해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일상계의 사람들처럼 서로 협조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탁구를 치듯 서로 받아치는 대사를 구사한다. 이런 대사는 작품의 '가오'를 살려준다.  


"너 같은 살인마는 모르겠지만, 난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거든?"

"건방 떨지 마! 입 함부로 놀리는 거 아냐! 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지. 너, 친구 없지?"


주인공의 친구들이 기습적으로 협공할 때의 대사


'누가 식당을  꼴로 만들랬어?'라는 질문에는, '내가.라든가, '지금 식당 걱정할 때가 아냐.' 라는 식의 평범한 질답 형태로 대사가 흘러가지 않는다.

핑퐁 대사의 예


캐릭터

신도림의 주요 캐릭터들은 단 두 명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두 명조차 주인공의 양면과도 같다. 여유를 부리면서 강하고 조용한 캐릭터와, 여유를 부리면서 강하고 시끄러운 캐릭터. 마치 진짜 대화처럼 현실감과 재치가 넘치는 이들은 비슷한 말버릇을 공유한다. 이런 탁구를 치는 듯한 재치 있는 대사를 바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캐릭터들은, 마치 주인공을 확장하고 복제한 것 같다. 


의성어나 의태어를 되받는 형태가 반복되기도 한다.


많은 캐릭터들이 비슷한 말투를 구사한다.

현실적인 대사나, 허세를 부리는 대사, 협박하는 스타일도 많은 캐릭터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한다.



작화  연출

캐릭터 디자인은 일본 만화인 데빌맨, 마징가 제트, 요괴소년 호야 등을 떠올리게 한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일본 소년만화에서 볼 수 있었던 위악적인 표정의 열혈계열이다. 악마의 힘을 빌린다거나, 남의 배려를 받기보다는 스스로 강함을 추구하는 안티 히어로적 가치관도 공유한다. 


"성냥팔이 소녀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녀석들…하지만 그런 영웅 따윈 애초에 필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7년이나 이 녀석들에게 싸움을 시키고 나서야 깨달았다. 소녀 스스로가 싸워야 한다. 눈 속에서 손을 비비며 울고만 있어선 어느 누구도 돌아봐 주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스스로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몸을 움츠리고 성냥불이나 켜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요괴소년 호야의 작가후지타 가츠히로의 코멘트-


<데빌맨> <진 마징가> <요괴소년 호야>의 주인공들과 <신도림>의 주인공 천둥


이렇듯 캐릭터 디자인은 일본의 위악적인 안티히어로들을 닮았는데, 색감은 서양의 느와르풍의 그래픽 노블을 지향한다. 그래서 액션 컷은 만화적 연출인 동시에 빈티지풍의 그래픽디자인이기도 하다. 디자인을 위해서 작가 오세형은 타이포나 말풍선 같이, 기존의 만화에서는 개념적 요소였던 것을 적극적으로 시각 요소로 끌어들인다.


그래픽 노블인 <드라큘라>와 <울>


기존 만화 작법에서는 상태를 설명하는 의미 기호, 즉 장외에서 나레이션으로 쓰였을 '지옥'이라는 타이포를 시각요소로 활용하여, 장내의 규칙으로 포섭했다. 지옥이라는 타이포 아래에 깔린 그림자를 보면, 이 컷에서 같은 조명 아래에 결합된 것을 알 수 있다.


만화의 개념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디자인 요소로 끌어들였다.


매 화의 엔딩이나 중요한 액션 씬은 빈티지 포스터와 같은 색감으로, 느와르 장르의 그래픽 노블처럼 제작한다.


이와 같이, 일본 만화의 캐릭터 디자인과, 서양 그래픽 노블의 색감, 만화의 시각 요소들을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바라보는 자유로운 관점, 거기에 숙달된 숙달된 작화와 연출 실력은 이 만화가 스타일리쉬한 액션 장르로서,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감각을 극대화하고 있다.


결론

클리셰가 뒤범벅이 되고, 모든 캐릭터가 마치 한두 명인 것처럼 말하고, 사이다 서사를 추구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이 작품의 단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장치라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 독자들이 얼마나 쾌감을 느끼느냐가 중요하고, 그 목적은 이미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작화와 연출에 노력을 바쳤다고 하여, 스토리는 쉽게 썼는가? 처음부터 치트키를 쓴 주인공이 비교적 쉬운 승리를 반복한다고 해서, 이러한 스토리를 창작하는 것까지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트렌디한 설정에 장르적 관습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지금까지의 패턴들을 조립하여 뚝딱 쓸 수 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 강한 주인공이 승리하는 서사, 스토리의 방향이 이렇듯 단순하면, 지루해지지 않기 위한 많은 설정과 세계관, 장치, 보조 플롯, 인물들이 필요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오케스트라 지휘하듯 조화롭게 다뤄야만 하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다. 

또한 주인공이 거침없이 쉽게 쉽게 승리하는 듯한 서사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주인공은 전통적인 방식의 고난을 겪고 있다. 그 고난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쾌감보다 커지지 않기 위해, 주인공의 가치관, 성격, 치트키로 깔아 놓은 잠재력 등으로 위장되어 있을 뿐이다. 즉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약간 비틀었다. 전통적으로는 이세계로의 부름을 받을 때 거부하던 주인공이, 강력한 계기가 생겨야만 결심하게 되는 단계가 있다. 그런데 독자들은 이 패턴을 지겨워한다. 어차피 독자들은 주인공이 행동하게 될 걸 다 안다. 그래서 주인공에게 시원시원한 '돌직구' 성격을 부여하여, 결심 단계까지의 플롯을 신속하게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모든 만화가 같은 목적을 갖고 있을 필요는 없다. 각자의 취향이 다르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 목적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 얼마나 퀄리티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신도림은 추구하려는 목적을 탄탄한 작화와 트렌디한 스토리텔링으로서 충실하게 추구한다. 이 거침없는 취향 지향과 그를 위해 구사된 기술력은 압도적이다. 이 작품을 즐기는 독자들은 자신들의 감각과 욕망을 수준 높게 다뤄주는 이 서비스에 크게 만족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작가의 이전글 저런 게 무슨 예술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