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프랑스 방랑기
익숙하지 않은 침구의 촉감, 다른 이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움직임, 오전 7시가 넘었음에도 해가 뜨지 않은 신선한 아침. 어젯밤 장시간 비행에 지친 몸을 이끌고 흥미로운 자극으로 새벽까지 깨어있던 감각들에도 이른 아침 눈이 떠졌다. 시차적응은 처음인지라 몸이 무거운 컨디션에도 오히려 재밌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시차적응 인가보다. ‘나도 드디어 겪어보네’. 대책 없는 긍정으로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을 알린다.
파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는 하나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도시. 파리에 서있으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리하면 함께 등장하는 또 다른 몇몇의 키워드가 있다. '담배냄새', '오줌 찌린내', '지저분한 거리'. 한 도시에 이렇게 모순적인 키워드가 공존할 수 있다니. 도저히 서로 녹아들지 않는 키워드들 덕분에 나는 파리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갖는 작은 기대감 하나 품지 않고 이곳에 발을 디뎠다. 아, 기대했던 거라면 딱 하나. 파리의 빵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그래서 첫 파리 여행의 주제를 <빵지순례>로 정했다. 누구나 알 법한 예술가들의 흔적, 로맨스 하면 떠오르는 어둠과 에펠탑의 빛나는 조화, 세계유산으로까지 지정된 파리의 정체성 센강. 이런 것들은 내가 향하는 방향에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바랐던 것은 단 하나, 달콤한 초콜릿이 뿌려진 에끌레어와, 들고만 있어도 파리지앵 흉내를 돕는 바게트, 부드럽게 찢어지며 버터의 풍미를 가득 퍼트리는 크루아상, 이들이 선사하는 미각의 소나타일 뿐이다.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도는 것이 이번 여행의 주된 목적이었으나 구글 지도에 저장된 빵집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첫 번째 빵집 'Utopia'로 향한다. 숙소는 파리 시내와 10-20분 떨어져 있는 외곽이었기에 버스와 지하철을 탔다. 버스는 생각보다 현대적이며 깔끔하다. 오히려 서울에서 달리고 있는 파란색, 초록색, 빨간색 오색의 버스보다 신식인 듯하다. 그러나 지하철은 한국에서 들려오던 파리 그 자체였다. 오래된 차체, 수많은 사람들의 때가 묻어있을 것만 같은 찝찝한 손잡이, 효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좌석배치, 어디서 풍겨오는지 모를 이상한 냄새까지. 실망은 없었다. 이게 내가 들었던 파리의 일부분이었으니까. 뒤덮인 환상 따위 치워버린 지 오래인 낭만 없는 이방인은 파리지앵에 한 걸음 가까워진다.
'원래 이게 파리잖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쥐가 한 마리 튀어나와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역을 걷다 보니 밝은 빛이 보인다. 인간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하는 환하고 맑은 태양의 빛. 저기가 출구구나.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간다. 파리지앵이 서로에게 관심 있는 명사였다면 그들은 분명히 눈치챘을 것이다. 방금 지하에서 올라온 우리 흉내를 낸 저 여자는 분명 이방인일 것이라고. 이제 막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엄청난 로맨스가 기다리는 듯한 눈빛을 무의식적으로 들켜버린 나는 그들의 무관심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파리지앵에서 두 걸음 멀어졌다.
고대하던 파리의 베이커리가 눈앞에 있다. 동료가 될 뻔한 파리지앵들 사이에 슬며시 끼여본다. 그들이 어떻게 가게를 누비고 다니는지 눈빛부터 몸짓, 손짓, 언어 하나도 빠짐없이 몸에 새긴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나는 짧은 사이 새겨놓았던 수많은 기록을 자연스레 꺼내 보인다. 그러나 미처 숨기지 못한 이방인의 향이 새어 나온다. 파리지앵 흉내를 내는 내 모습이 그들에게 귀여워 보였기를 바란다. 마치 엄마의 립스틱을 서툴게 바르고 질질 끌리는 원피스를 입은 채 거울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무작정 길을 걷는다. 곧 열릴 빵들의 오페라를 온전히 즐길만한 장소를 찾아본다. 파리의 거리에는 벤치가 많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내린 비 덕분에 그 많은 벤치가 축축이 젖어있다. 편히 앉아서 즐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 화려하고 클래식한 프랑스 파리의 수많은 건물들 사이 귀여운 미끄럼틀이 보인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손에 들고 있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연주회의 커튼을 올린다. 잠봉뵈르의 연주가 시작된다. 담백한 빵의 멜로디가 흘러나오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가득한 치즈가 치고 들어온다. 잔잔하게 흐르던 멜로디에 갑작스레 짭짤한 햄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흘러간 3중주였다.
다음은 무화과 타르트의 연주다. 겉은 바삭하나 속은 부드러운 타르트 반죽을 베이스로 크림치즈로 보이는 하얀 크림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러다 톡톡 튀어나오는 무화과. 박수가 절로 나오는 감동스러운 하모니다.
그렇게 이후로 찾아간 공연장에서 크루아상과 초코 에끌레어, 이름 모를 빵의 연주를 즐겼다. 아무리 좋은 연주라도 긴 시간 쉴 틈 없이 즐기면 지치는 법. 끊임없는 자극으로 기진한 미각은 더 이상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를 대신해 시각이 감상을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이 정신을 사로잡는다. 길을 따라 늘어진 화려한 듯 담백하고, 복잡한 듯 간단한 매력적인 건물들, 초록색과 노란색 사이에서 따스히 물들어가는 나무들, 파리지앵들의 여유를 책임지는 수많은 벤치들. 그사이를 홀린 듯 걷다 보니 서서히 모든 감각들이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지금의 모든 것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는 듯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찰나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담아내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파리의 현재를 느낀다. 애써 찾을 필요 없이 곳곳에 널린 미의 향연은 수많은 이들의 낭만으로 존재하는 파리의 진가를 드러낸다.
홀린 듯 걷다 보니 루브르 박물관을 지나 센강에 도착했다. 맑은 하늘, 포근히 내리쬐는 햇빛, 조용하게 흐르는 물결, 그 위를 둥글게 안고 있는 다리, 그리고 저 멀리 즐거운 웃음을 나르고 있는 유람선.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눈에 담긴다. 지하에서 올라오던 이방인의 눈빛은 이 순간을 위해 빛났던 것이 확실하다. 나는 지금 내 앞에서 과거의 영혼과, 사람들의 눈빛과, 마른 목을 축이는 오리 가족과, 불타는 태양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무수한 것들을 품고 있는 이 센강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이 거대한 센강을 품고 있는 파리와 사랑에 빠졌다.
그의 곁에 함께 있고 싶은 여인은 또 다른 그의 수많은 애인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잡는다. 조금 더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고 싶은 욕심이다. 그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욕구가 피어오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그녀의 곁에는 콩깍지 씐 주책을 들어줄 친구가 없다. 다음날 도착하기로 되어있는 미래의 동료가 갑자기 무척 그립다. 그녀의 옆에 그의 새로운 애인이 등장했다. 우리는 같은 이를 사랑하지만 질투라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끈끈한 연대를 느낀다. 그저 그를 향한 애정 어린 눈빛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그녀는 새로 나타난 그의 애인이 마음에 든다. 새로운 동료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한다. 이름은 우리를 더욱 돈독하게 할 것이다. 그녀는 마고다.
노란 긴 머리의 마고는 노트북 하나 들어갈 사이즈의 숄더백을 매고 파리바게트 Paris Baguette의 빵을 들고 나타났다. 파리에서, 그것도 파리지앵으로 보이는 무심한 마고에게서 파리바게트를 찾다니. 우리는 또 다른 공통점이 생겼다. 한국 출신 <파리바게트>의 빵을 먹어봤다는. 나는 그녀가 더 좋아진다. 마고는 빵을 먹으며 조용히 그를 바라본다. 그들은 아무도 듣지 못하는 그들만의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대화를 바라본다. 방해되지 않게 고요히,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러다 말을 건넨다. 마고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가 대신 대답해 준다. 우리는 그를 통해 대화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고가 일어나 내 앞을 지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눈빛을 교환하며 슬며시 웃는다. 나는 그녀에게 만나서 반가웠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무엇을 건네었을까. 그가 나 대신 그녀의 대답을 들어줬을 것이다. 마고가 떠나고 그의 새로운 애인을 3명쯤 더 보았을 때 나는 그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를 건네며 아쉬운 걸음을 옮겼다.
같은 한인민박에 묵고 있는 K를 만났다. 우리는 서로가 마주했던 파리의 매력을 공유한다. 눈으로 담고, 마음에 새겼던 기록들을 말의 연료 삼아 활활 불태우며 음성으로 퍼트린다. 그것들은 재로 변해 흩뿌려지는 대신 기억의 화상으로 남는다. 고통의 상처가 아닌 사랑의 흔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K와 함께 에펠탑이 눈앞에 펼쳐지는 공원으로 향했다. 형태는 남아있을 뿐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신호등과 횡단보도, 도시 중간중간 펼쳐진 푸른 잔디밭 위 자유로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이러한 아름다운 풍경을 효소로 사랑을 숙성시키는 연인들을 지나쳐 목적지에 도착했다. 역시나 곳곳에 놓인 공원의 벤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동적인 감상으로는 이곳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며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끔 정적인 감상을 유도한다. 파리와 콩깍지 씐 풋풋한 사랑을 시작한 나는 그의 정적인 면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한다. 벤치에 잠시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10걸음 떨어진 곳에서 쥐가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 한강에서 마주했다면 경악을 하며 치를 떨었을 존재이나 이곳은 파리다. 경이로운 예술적 풍경과 지저분한 조각들의 모순적인 관계가 이제는 매력으로, 낭만으로 다가온다. 이건 다 사랑의 힘이다. 눈동자에 쓰인 콩깍지 덕이다.
K와 나는 그렇게 이곳을 동적으로, 그리고 정적으로 감상한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개선문의 옥상으로 향했다. 숙소로 돌아가려던 나를 K가 데리고 온 것이다. 좁은 넓이의 스프링처럼 꼬여진 계단을 오르다 보면 숨이 찬다 싶을 때쯤 평지가 보인다. 그렇게 그 끝으로 걸어가면 나를 홀리던 파리 시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화룡점정이다. 한동안 헤어 나올 수 없도록 있는 힘껏 자신의 날개를 부풀려 구애를 펼친다. 그는 하늘에서 해를 지우고 잉크를 들이부으며 사랑의 편지를 써 보낸다. 별과 함께 빛나는 에펠탑과 늘어진 거리와 그 빛을 따라 줄 서있는 건물들, 그리고 이 모든 빛을 품은 또 다른 모습의 센강을 써 내려간다. 화려한 날갯짓과 달콤한 편지에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하던 어느 순간 고소한 빵냄새가 흘러들어온다.
그렇게 나는 생각한다.
이러니 파리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