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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세 Oct 24. 2024

부여 타파스 바(Buyeo Tapas Bar) 부여 편

2024. 10. 18 ~ 19 충남 부여

삶에 충분히 도전적이었다면 실패는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이 그토록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밤은 쓰고 길었다. 긴긴밤, 내 손에 칼을 쥐고 이 땅의 소산들을 씻고 다지고 구워서 접시에 올리던 순간은 내게 깊은 호수와 같은 위로였다.


예술가는 남들보다 더 아프고 슬프고 기뻐야 한다고 믿었다. 그 울렁이는 파도와 가슴을 뒤흔들어버리는 불꽃을 글로 쓰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는 것이다. 내게 요리는 글이고 그림이고 춤이고 노래였다. 나는 내 요리가 누군가에게 내게 그랬듯 따뜻하고 벅차오르기 바랐다.


문득 알게 되었다. 지난 긴긴밤, 내 손에 칼을 쥐고 이 땅의 소산들을 씻고 다지고 구워서 접시에 올리던 순간에 내가 깊은 호수와 같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요리사이기 때문이 아니다. 예술가이기 때문도 더더욱 아니다. 단지 지난 8년간 어설픈 내 요리를 먹어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이 세상에게 환대받아왔다.


내 친구는 부여를 좋아한다. 부여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을 애정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응원하고 그들의 미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각지에서 모인 청년들과 아무런 연고 없이 새로운 갈림길 앞에 선 그들을 반겨주고 물심 방면 도와준 부여의 주민들. 공간이 필요하면 빈 공간을 선뜻 내어주고 문을 고쳐야 하면 뚝딱뚝딱 고쳐주시는 동네의 마스터라 불리는 기술자 어르신. 그렇게 현재 청년들은 두 개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각자의 브랜드를 운영한다고 했다. 젤라또를 만들기도, 책방을 운영하기도, 어르신을 대상으로 미술수업을 하기도 하며 문화기획자인 한 친구는 부여비트라는 이름으로 부여 어르신과 아이들까지 모두 모아 시민 뮤지컬 공연을 두 번이나 총괄하고 진행했다고도 했다. 새로운 기회가 필요했던 청년들은 지역의 따듯한 품 안에서 안전하게 자신만의 일을 찾을 수 있었고, 청년이 빠져나가던 부여에는 새로운 활기를 내 친구는 자기 일처럼 기쁘게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감사한다. 당신들의 아름다운 고향, 그 땅의 흙과 숲, 연못에서 나는 훌륭한 소산들에 감사한다. 청년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함께 일구어낸 벅찬 활기에 감사한다. 호기심 많고 열정적인 내 친구는 사과와 배가 무르익는 계절, 당신들의 멋진 삶에 나를 초대해 주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또다시 칼과 도마를 손에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코스에서는 환대에 대한 단순하고 순수한 감사의 마음을 진솔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배와 마, 표고, 사과대추, 연근, 밤, 흙대파와 같은 재료들은 자연에서 본래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질감과 형태의 인상을 최대한 살려서 접시 위에 올리고 부순 후추와 팔각향과 재피, 그리고 적절히 사용한 가을 숲의 나물과 허브를 통해 부여의 풍부한 숲 향과 풀 씹는 듯한 단 맛을 생동감 있게 입체적으로 연출하고자 했다. 가을은 풍부하고 무성하되 여물어가며 단단해지는 계절이다. 재료의 맛과 향을 넘쳐흐르지 않고 섬세하고 조화롭게, 또 다채롭게 담아내는데 집중했다.


어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며, 씀.


- 핀초(Pintxo)
▪︎ 부여 고추 피클과 구운 민물 장어 핀초
▪︎ 세따스 알 아히요(Setas al ajillos; 마늘과 올리브유에 볶은 양송이) 핀초
▪︎ 구운 방울토마토와 도라지, 훈연 치즈 핀초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에서 최초의 핀초를 만든 호아킨 아란부루(Joaquin Aranburu)는 산 세바스티안에서 가장 훌륭한 세 가지의 재료를 주제로 핀초를 만들었다.

라 니냐 쿠리오사(La niña curiosa), 호기심 많은 아이는 두 손 가득 부여의 흙과 숲, 강을 움켜쥐고 빵 위에 올려 부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핀초를 만들었다.

- 화이트 와인 식초를 곁들인 배 가스파초(Gazpacho)
* 아체타이아 디 카노사 발사믹 콘디멘토 화이트(Acetaia di Canossa Balsamic Condimento 'White')

5년 이상 숙성된 말바시아 포도(Malvasia grapes) 발사믹 소스를 곁들인 안달루시아식 배 가스파초(Gazpacho). 청량하고 시원한 배의 흰색 과실에 맑고 따뜻한 호박색 비네거가 조화를 이루고, 깊고 달콤한 가을 향이 입맛을 깨우며 코스의 시작을 알린다.

- 부여 사과대추와 크림치즈 바르끼또(Barquito; 채소나 열매 위에 치즈를 듬뿍 뿌린 타파스)

마치 호수 위를 떠가는 작은 조각배 같은 사과대추 조각 위에 진하고 고소한 크림치즈를 뿌렸다. 달콤한 과실향과 부드럽고 섬세한 맛을 가진 아르베키나(Arbequina) 올리브유를 곁들였다.

- 브랜디에 졸인 부여 표고버섯과 사과대추, 연근을 곁들인 빠에야(Paella)

거칠게 부순 흑후추와 팔각향, 재피, 흑설탕이 먼저 접시 바닥에 깔린다. 솔방울, 소나무 껍질, 단단한 과일 껍데기와 감태, 월계수 잎은 재료 질감 그대로의 인상을 보존한 채로 존재감을 가진다. X.O. 등급 브랜디에 졸인 표고버섯과 연근, 그리고 소프리토(Sofrito)와 양송이 뒥셀(Duxelle), 사프란을 곁들여 부여 쌀로 만들어진 빠에야는 그동안 쌓여온 흙과 숲의 질감 위에 올려져 부여 그 자체를 나타낸다.

이번 플레이트는 당신들의 아름다운 고향, 흙과 숲, 연못에 헌정하는 경의와 감사, 존경이다. 저물어가는 가을밤의 *소야곡(小夜曲)이고 환대에 대한 답장이다.

*소야곡(小夜曲) : 작은 밤의 음악, 밤에 듣는 작은 음악

- 멜 이 마또(Mel i mato; 신선한 치즈와 벌꿀, 견과류를 곁들인 타파스)

신선한 생 치즈에 부여 밤과 호박씨, 호두를 곁들인 후 부여의 아카시아 벌꿀과 흑설탕을 뿌려 만든 타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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