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보라니까요.”
“글쎄, 한 3년 전인가 4년 전인가.”
“그럼 아직도 그 여자분을 못 잊고 있는 거예요?”
“그런 게 어디 있냐.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그럼 연애는 그렇다 치고, 형, 대체 그건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 거야? 설마 4년 동안 한 번도 못한 건 아니겠죠? 형 성격에 돈 주고 샀을 리는 없고, 진짜 그때부터 주욱 독수공방인 거야? 에이, 형, 안 돼요. 손놀이도 하루 이틀이지, 그러다간 진짜 골병들어요. 그건 약도 없다니까. 건강 생각해서 꼬박꼬박 제때 끼니를 챙겨 줘야 돼.”
진부한 음담패설로 화제가 옮겨가자 현태의 머릿속에서는 자신과 수철이 이 정도로 친하지는 않다는 경고등이 요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수철은 자위기구의 사용법에 대해 늘어놓았고 현태는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들 사이에 이 정도 대화는 심심풀이 격으로 오가기 마련이었지만 그의 비위에는 맞지 않았다. 영화에서 친구들이 다 함께 둘러앉아 포르노 비디오를 보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정사를 훔쳐보면서 함께 자위하는 장면이 나올 때면 구토가 치밀었다. 남자들끼리 지껄이는 음담패설조차 일종의 동성애가 아닌가.
“내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이번 여자 친구하고는 오래갈 것 같아? 어떻게 만나는 여자마다 몇 개월 넘기기가 힘드냐.”
“뭐. 이번에도 오래가기는 영 그른 것 같아요. 얼마나 집착이 심한지 사람을 아주 질리게 한다니까요. 전화벨이 몇 번 울린 후에 제가 전화를 받는지 까지 세고 있으니 말 다한 거죠. 그래도 헤어지기 전에 단물은 쪽쪽 빼먹을 생각이에요. 얘가 잠자리 실력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현태는 이제 정말로 수철과의 대화에 신물이 났다. 그는 남은 커피를 한 입에 홀짝 비워버리고는 다시 가위를 들고 백합꽃을 다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철은 갈 생각이 없는지 테이블 위에 놓인 둥그런 바구니에서 초록색 사탕 하나를 꺼내어 입 안에 털어 넣고는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형, 그런데 그 얘기 들었어요?”
“뭘?”
“미국의 911 테러 있잖아요. 그게 빈 라덴이 한 짓이 아니라 미국의 자작극이래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짜예요. 미국 정부가 다 계획한 거래요.”
“에이, 말도 안 돼. 미국이 자기 스스로 그런 짓을 했다고? 뭐 하러 그랬겠어?”
“그거야 뻔하죠. 이라크를 한 입에 꿀떡 삼키려고 한 거지. 이참에 말 안 듣는 후세인도 처리하고.”
“그렇다고 자국민을 몇 천 명씩이나 죽인단 말이야? 금전적인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그까짓 거 계산기 두드려 보니까 딱 답이 나온 거죠. 요건 남는 장사다.”
“설마.”
“미국이 어떤 나라예요? 영화든 전쟁이든 스케일로 먹어주는 나라잖아요. 찔끔찔끔하느니 한 방에 확 블록버스터 급으로 터트려버린 거죠. 그래서 선거에도 이기고 이라크도 접수하고, 쏠쏠하게 재미 좀 봤잖아요.”
현태가 웃음을 흘리며 손에 들고 있던 하얀 백합꽃으로 시선을 옮기자 수철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에요. 미국 정부는 단지 협력자일 뿐이고 실제로 911을 꾸민 주체는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게 누군데?”
“프리메이슨이요.”
“아이고오, 결국 또 그 얘기야? 그 세계적인 실세인지, 뭐 그림자 권력인지 하는 거?”
“형, 실실 웃어넘길 일이 아니에요. 여기에는 분명 엄청난 음모가 있다니까요.”
음모. 현태는 그만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며 큰 소리로 깔깔 웃을 뻔했다. 아까 민규와 얘기하던 중에 왜 자신의 입에서 밑도 끝도 없이 ‘음모’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로 이렇게 늘 음모론을 입에 달고 사는 수철 때문이었다. 수철은 아침마다 커피를 핑계로 현태에게 달려와서는 당장 무슨 급박한 일이라도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음모론을 떠벌리곤 했다.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에 다 큰 어른이 그런 유치한 뜬소문에 집착하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사실 요즘은 여기저기서 음모론이 대유행이었다. 현태 자신도 그중 몇 가지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언제 누구에게 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음모론들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정부와 북한이 사실은 물밑에서 한통속이라거나, KAL기 폭파사건이 전두환 정권의 자작극이었다거나, 1997년 한국을 강타한 IMF는 세계 투기 자본 세력들이 의도적으로 작정하고 꾸민 일이라거나, 김구의 암살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는 얘기처럼 정치적인 것에서부터, 인류는 아직 단 한 번도 달에 가보지 못했다거나, 미국 정부가 우주인과 교신을 하고 있다거나, 제약 회사들이 일부러 전염병을 퍼트린다거나, 고대에는 아시아 전체가 한국 땅이었다거나, 군대에서 사병들의 밥에 정력 감퇴제를 섞는다는 식의 다소 황당하고 우스운 얘기들도 있었다. 그밖에 국가가 국민 몰래 맺는 협정들, 여당과 야당의 비밀 회담들, 주가 조작들, 기업과 정부의 결탁들, 대기업들 간의 담합들, 환율을 조작하는 금융가들, 석유를 독점하는 자본가들, 전쟁을 부추기는 강대국들, 양쪽 편에 무기를 파는 무기상들, 이익단체들에게 놀아나는 인권운동가와 종교인들, 불분명하게 벌어지는 국가사업들, 다문화정책의 흑막들, 바다에 버려지는 곡식들, 여전히 유용한 쓰리에스 정책들, 불공정한 법원의 불합리한 판결들, 답변하지 않는 공무원들, 비리들, 뇌물들, 언론 조작들, 이중 계약들, 증거 날조와 인멸들, 뒷거래들, 암호나 다름없는 전문용어들, 인체실험들, 폐기되는 문서들, 유전자 조작 등등등.
그런데 수철이 신봉하는 음모론은 이 중에서도 가장 거창했다. 국가와 인종의 구분을 초월하는 무정부적이고 범지구적인 어떤 단체가 세계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쥐락펴락 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 단체는 모든 나라의 정부와 경제를 장악하고, 전 세계 언론과 매체와 예술을 통제하고, 특정한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전파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끝내고, 세계 인구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필요에 따라 지도자를 바꾸거나 암살한다고 했다. 물론 그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무심한 현태조차 때때로 귀가 솔깃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개별적인 진위여부야 알 수 없지만 세계를 감싸고 있는 얇은 껍질과 껍질 사이에 질기고 불투명한 막이 빈틈없이 뻗어 있다는 건 요즘사람들에게는 이미 본능이 되어 버린 예감이 아닌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