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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ug 13. 2024

불면증 (8)




     수철은 커피를 홀짝이며 911 테러의 수상한 점들을 조목조목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두 기술적이고 장황한 얘기들이었다. 그는 이 정보의 대부분을 인터넷에서 얻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수철이 가입한 음모론 관련 사이트만 해도 10개 이상이었고 그 자신도 음모론을 주제로 꽤나 성황중인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속고 있어. 아무 것도 몰라요.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하긴 무지와 무관심이야말로 사람의 본성이지. 민주주의니, 자본주의니, 신자유주의니, 세상이 잘도 굴러가는 것 같지만 실은 허울 좋은 겉치레일 뿐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우리가 개미라면 그들은 거인이라구요.”

     수철은 자신도 모르게 격양되어 언성을 높였지만 현태는 밍밍한 웃음을 흘렸다. 이 얼마나 진부한 주제인가. 현태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영웅주의에 불과했다. 세상이 뻔하지 않다고 믿고 싶어 하는 뻔한 개인들의 판타지. 혹여 수철의 음모론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뭘 어쩌겠는가. 자신들이 열심히 일해서 구한 양식이 고작 거인들이 실수로 흘린 과자 부스러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고 해서 개미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자신들이 빠져 죽어가는 호수가 실은 거인들이 뱉어 놓은 가래침이라는 걸 알게 된다고 해서 또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개미들은 여전히 과자 부스러기로 모여들고 또 계속해서 침에 빠져 죽어 갈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패배주의나 노예근성이 아니었다. 현태는 그저 그 모든 것들을, 그 부당함과 속임수, 음모들까지도, 세상의 섭리나 삶의 당연한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중력이나 바다, 날씨 앞에서 겸손해지듯 음모 앞에서도 기민해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시라도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수철은 그 뒤로도 무려 1시간이나 신나게 떠들다가 현태가 생화를 다 다듬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가게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고 나니 가게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쇼윈도를 통해 보이는 거리 역시 한산하기만 했다. 한밤중보다 더 적막한 한낮의 고요였다. 건물들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빛이 지나가는 차들에 반사되어 가게 안을 어른어른 비추었다. 현태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 모서리가 닳아빠진 햇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오전 11시쯤 찾아오는 이런 한가하고 게으른 순간이 좋았다. 우글거리는 소란에서 슬쩍 비켜 나와 홀로 방관하고 있는 이런 시간은 마치 수십 년 동안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던 것 같은 평안을 주었다. 감히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완전한 평온함을 지속할 수 있는 건 고작 20분 정도에 불과했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어느새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할 일을 찾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당장에 임박한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게 안을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누군가 그의 돌연한 태도를 봤다면 의아했겠지만, 조급증과 나태함이 하루에도 몇 번씩 엇갈리는 일상에 그는 익숙해져 있었다.  

      할 일을 찾던 현태는 어제 예약주문이 되어있던 50송이 장미 꽃다발을 미리 만들기로 했다. 오후 5시쯤 찾으러 오겠다고 했으니 점심을 먹은 뒤에 만들어도 늦지 않았지만 미리 만들어 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현태는 꽃 냉장고에서 붉은색 장미 다발이 가득 들어있는 초록색 물통을 꺼냈다. 그 장미들은 새빨간 염료로 염색이라도 한 것처럼 적나라한 색을 띄고 있었다. 그는 물통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서 한 송이씩 적당한 크기로 다듬으며 숫자를 세어 나갔다. 한 개, 두 개, 세 개……. 문득 어제 이 장미 꽃다발을 주문하러 왔던 젊은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물한 살, 많아도 스물세 살은 넘지 않아 보이는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꽃다발을 받을 사람의 성별과 나이를 묻는 질문에 스무 살의 여자라고 대답하면서 쑥스러워하던 청년을 생각하니 그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현태는 이 꽃다발을 받게 될 아가씨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 보았다. 꽃다발을 주문한 청년과 잘 어울리는 얌전하고 소심한 인상을 가진 긴 생머리의 여자일까. 아니, 어쩌면 의외로 개성이 강하고 톡톡 튀는 스타일의 그녀는 젊은 청년의 무미건조한 일상에 불현듯 뛰어 들어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 나이 또래의 연애야말로 가장 그럴 듯하다고 현태는 생각했다. 마치 불붙은 깃털처럼 가볍고, 아름답고, 또 신랄하겠지.

     현태도 이 꽃다발을 주문한 청년과 비슷한 나이에, 이 꽃다발을 받을 아가씨와 비슷한 또래인 여자와 연애를 했었다. 한정민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그의 뇌리에서 가물가물 했다. 눈 따로, 코 따로, 입 따로는 기억이 날 듯도 한데 얼굴 전체를 떠올리려고 하면 김서린 거울처럼 뿌옇게 변해 버리는 것이다. 21살의 그녀는 조금 통통하다고 할 수 있는 몸매에 짙고 곧은 눈썹과 큼직한 콧망울, 도톰한 윗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과감한 스타일로 파마했던 발랄하고 떠들기 좋아하는 아가씨였다. 원래 본 판이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애교 있는 성격인데다가 화장과 옷차림에 공을 들인 덕에 제법 남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중국어 동아리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현태는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 흔한 인간적인 호감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들 사이에는 교감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섹스까지 하게 된 건 대학가에서 흔히 벌어지는 사정 중 하나였다.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다가 여관으로 자리를 옮겨 2차 술판이 벌어졌고, 새벽에 하나 둘씩 빠져나가다 보니 결국 방에는 현태와 정민 단 둘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날의 섹스는 그의 첫 경험이었다. 사춘기 이후로 과연 그 날이 언제가 될 것인가 조바심과 두려움에 시달리곤 했는데 얼떨결에 일을 치르게 되어 그도 적잖게 당황했다. 설사 그날 밤 자신이 발기가 되지 않았더라도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황홀하고 아득했던 밤인 동시에 결코 잊지 못할 만큼 창피한 밤이기도 했다. 기저귀에 똥오줌을 싸면 어머니가 치워주었던 갓난아기 시절 이후로 그가 그토록 허둥대고 또 누군가에게 그토록 의지했던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어찌나 서툴렀는지 그날 밤 무려 3번이나 정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를 비웃거나 핀잔을 주지 않았고 또 인내심을 잃지도 않았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자꾸만 손가락이 곱아드는 그를 정민은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섹스 이후에 곧바로 둘 사이에 어떤 특별한 감정이 샘솟았던 건 아니었다. 계산속이 밝은 현태도 현태지만 깐깐한 정민 역시 그에게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그녀로서는 단지 숙맥인 남자를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재미가 쏠쏠했을 따름이었고, 또 누군가의 첫 여자가 되는 기분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녀는 참으로 쉬운 여자였다. 고작 21살의 나이에도 불과하고 정민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혹여 ‘쉽다’는 말이 모욕적으로 느껴진다면 ‘자유롭다’는 말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현태에게 있어서 ‘쉽다’는 말은 부정적이기 보다는 긍정적인 의미였다. 온통 어려운 것 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쉬운 것을 만나기 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보통 남자들은 여자들이 튕기고 까다롭게 굴어야 달려들 맛이 난다고들 하지만 그건 현태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쉽게 통할 수 있고, 쉽게 가질 수 있는 여자만이 그의 마음을 끌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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