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현태와 정민은 가끔씩 만나 섹스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 여섯 번 정도 만남이 지속되자 현태의 마음속에도 점차 그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어렸고, 생전 처음 알게 된 여자의 육체를, 자신에게 아낌없이 품을 열어주는 아름다운 육체의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느 날 모텔 방 침대 안에서 네 개의 다리를 서로 얽은 채 현태는 정민에게 고백했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정식으로 사귀는 게 어때?”
정민도 싫지 않은지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좋아. 하지만 약속해 줘. 답답하게 굴기 없기야.”
‘답답하게 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에는 그녀가 어떤 조건을 걸었어도, 그 조건이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도 그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현태는 깔끔하게 다듬어진 50송이의 장미를 한 송이씩 둥글게 모아가며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붉은 장미꽃 사이사이에는 하얀색 안개꽃과 유카리잎을 넣어 싱그러운 느낌을 더했다. 마지막 50번째 장미까지 보태어 끈으로 단단히 고정시킨 뒤 크림색과 밝은 금색의 포장지를 두르고 빨간색 체크무늬 리본으로 장식하고 나자 제법 멋진 꽃다발이 완성되었다. 스무 살 또래의 어린 아가씨에게 어울릴 만한 산뜻한 느낌이어서 그는 만족스러웠다. 현태는 하얀 백합과 금어초로 예비용 꽃다발을 한 개 더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놓고는 흩어진 잎들이며 포장 용품들을 정리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정오를 넘기고 있었다.
[식사중입니다]라는 문구와 연락처가 적힌 팻말을 문 앞에 걸어 놓고 현태는 가게를 나섰다. 건조하고 창백한 겨울 공기가 콧구멍 속으로 파고들어와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헐떡이며 받은 숨을 내뱉었다. 하루 종일 식물들이 뿜어내는 독한 산소에 짓눌려 있던 그의 폐는 가게 문턱을 넘을 때마다 뻥튀기처럼 부풀어 올라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가게에 발을 들이는 손님들은 향기가 좋네, 공기가 상쾌하네 감탄하며 코를 킁킁거렸지만 실상 그것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금방 어딘지 버겁다는 걸 깨달으며 황급히 가게를 빠져 나가 매연이 가득한 거리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곤 했다.
현태는 유리문을 통해 수철의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수철은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에 몰두해 있었다. 누가 보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줄 알겠지만 그가 온라인으로 스포츠 도박을 하고 있다는 걸 현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도대체 매일같이 저러고도 가게가 유지된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요즘 골목마다 핸드폰 가게가 몇 개씩 들어서고 있는데도 – 근방 100m 안에도 핸드폰 가게가 3개나 됐다. - 수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애초에 그 많은 핸드폰 가게들이 어떻게 다 벌어먹고 사는지 현태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현태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철은 반사적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무서운 기세로 노려보았다.
“뭐해? 점심이나 먹으러 가지.”
현태가 진열장에 가지런히 놓인 핸드폰들을 아무런 관심도 없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점심이요? 웬일이에요? 오늘은 점심 안 싸가지고 왔어요?”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그럼 같이 나가요. 그런데 잠깐만요. 지금 중요한 타이밍이라서.”
마우스를 두들겨 대는 수철의 길쭉한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현태는 무엇을 먹으러 갈까 생각에 잠겼다. 수철이야 늘 그렇듯 중국집에 가고 싶어 할 테지만 현태는 중국집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예전부터 기름기가 많아 탐탁지 않았었는데, 얼마 전 텔레비전의 한 고발 프로그램에서 중국집 주방장이 표백제처럼 새하얀 미원 가루를 커다란 육수 국자로 하나 가득 퍼서 짜장 냄비 속에 쏟아 붓는 장면을 본 후, 시꺼먼 짜장면이나 시뻘건 짬뽕만 떠올려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건 꼭 중국집에 국한된 얘기만은 아니었다. 재료는 어떤 걸 쓰는지, 위생은 어떤지, 화학조미료는 얼마나 넣는지, 하다못해 주방장이 화장실에 다녀와서 손은 제대로 씻는지 등등, 세상에 믿을 만한 식당이 얼마나 되겠는가.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음식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자신의 입안에 넣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바쁜 날이 아니면 현태는 늘 점심, 저녁 도시락을 손수 싸오곤 했다.
“자아, 뭘 먹으러 갈까요?”
어느새 수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비비 꼬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머쓱하니 아무 말도 없는 걸로 봐서 돈을 날린 모양이었다.
“글쎄, 저기 새로 생긴 식당이나 한 번 가볼까?”
“어디요?”
“저기 사거리 골목 입구에 새로 생긴 식당 있잖아. '대나무골'이라던가.”
그 식당은 얼마 전 개업식을 한다며 내레이터 모델들을 불러 놓고 한바탕 요란을 떠는 통에 현태의 눈에까지 뜨였던 곳이었다. 내레이터 모델들은 한 겨울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택이 나는 분홍색 비닐 소재의 미니스커트와 탑 나시, 살색 망사 스타킹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들은 전혀 추위를 느끼는 것 같지 않았는데 이런 일에 적잖게 단련이 되어있거나 짙은 화장 덕분이었을 것이다. 일렬로 늘어선 4명의 아가씨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동안 커다란 링 귀걸이를 하고 있는 나머지 한 명이 마이크를 잡고 납작한 목소리로 외쳐댔다.
“여러분, 지금 여기를 주목해주세요. 대나무가 얼마나 몸에 좋은지는 여러분도 잘 아시죠? 저희 대나무골은 그 좋은 대나무 통에 밤, 잣, 버섯, 대추, 은행을 넣고 밥을 짓는답니다. 몸에 좋은 건 물론이구요, 맛도 너무 좋지요. 최고만 따지는 사장님 고집 때문에 반찬에 쓰이는 소금도 모두 국산 죽염소금만 쓰고 있어요. 혹시 대나무가 중국산일까봐 걱정되신 다구요? 그런 염려 싹 붙들어 매세요. 대나무 하면 어디죠? 예, 담양이죠. 바로 사장님 고향이 담양이라구요. 일주일에 한 번씩 고향에서 직접 대나무를 공수해 오니까 너무 믿음이 가시죠? 다른 재료들도 모두 산지에서 직접 가져 온 것들이랍니다. 어머니의 손맛, 자연 그대로의 맛, 정성과 건강이 가득한 식사가 그리울 땐 저희 대나무골을 꼭 찾아주세요.”
좌우로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여자댄서들을 구경하러 모여든 사람들 틈에서 현태는 내레이터 모델이 하는 말에만 온통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녀의 말이 정치가들의 경제 공약처럼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안심’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아, 그 대나무 통에다 밥해주는 데요? 역시 형님은 점심 한 끼를 먹어도 좋은 걸로만 찾으시네. 하여간 자기 몸은 엄청 챙긴다니까. 아주 오래오래, 진짜 오래 사시겠어요.”
수철은 이죽거리며 현태를 놀렸다. 요즘처럼 개화된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음식을 가린다는 건 유난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라는 게 수철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일일이 가려 먹다가는 정신 건강에 더 나쁠 거라고 수철은 종종 현태에게 충고하곤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