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민숭달팽이, 누디브런치(Nudibranch)
양양에서 다이빙을 할 때마다 보고 싶은 아이가 있었다. 눈꽃처럼 하얗고 솜뭉치처럼 작은 생물이 이 깊고 넓은 바닷속 어딘가에 있다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이빙을 시작하고 1년 후, 53탱째, 드디어 만났다. 내가 발견한 건 아니고 다이빙을 할 때마다 하도 보고 싶다고 하니까 같은 팀 사람들이 찾아줬다. 다들 북적북적 모여 이 아이 사진을 찍고 손으로 가리키며 보러 오라고 했다. 천천히 다가가니 정말 새하얀 아이가 산호 위에 앉아있었다. 호흡기를 물고 환호성을 지르며(그래봤자 소리도 안 났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옆에서 보고 있던 용감독님이 사진을 찍어줬다.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이 아이는 바로바로 '왕벚꽃갯민숭이'다. '갯민숭달팽이(누디브런치 이하 누디)'의 한 종류다.
처음 다이빙을 할 때는 바다에서 만타가오리, 범프피시 같은 커다란 물고기를 보는 게 좋았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커다란 크기의 생물이 떠다니는 게 신기하기 때문이다. 버디와 가이드를 동시에 쫓느라 정신없는 초보시절엔 손만 가리켜도 보이는 큰 물고기가 참 고맙고 반가웠다. 그러다 다이빙에 좀 능숙해지고 작은 물고기들과 누디가 차츰차츰 보였다. 느릿하게 슬금슬금 기어서 무언가를 먹으며 다니는 아이들이.
갯민숭달팽이는 이름처럼 자신을 보호할 집이 없는 바다 달팽이(달팽이랑 같은 과는 아니지만 둘 다 복족류이기에 편의상 달팽이라 불린다)이다. 손가락 한, 두 마디 정도 크기이고 암수 구별 없는 자웅동체다. 아래 그림처럼 왕벚꽃갯민숭이와 비슷하게 생긴 눈송이갯민숭이도 있고, 파란색, 노란색, 보라색, 점박이 등 다양한 색과 모양의 수많은 종류의 누디가 있다. 머리 쪽의 촉수 두 개와 돌기(아가미)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토록 화려하게 생겼으면 포식자들의 눈에 띄어서 한 입에 먹혀 진작에 죽었겠지만 물고기들은 누디를 먹지 않는다. 왜냐고? '독'이 있기 때문이다. 누디는 히드라와 산호의 자포를 주식으로 갉아먹고 산다. 이에 독을 몸에 축적하고 자신을 먹으려는 동물이 오면 그 독을 쏜다. 또는 자신의 몸에 흡수된 독을 먹고 놀란 포식자들이 뱉게 만든다. 포식자들은 '저놈을 먹으면 독이 있어'라고 생각하며 먹지 않는다. 피식자인 누디도 먹히고 나서 뱉음을 당하면 대비를 한다. 한 번 먹힌 누디의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다른 색깔로 태어난다고 한다.(곰강사님왈)
누디의 예쁜 모양은 일본인들이 특히나 좋아한다. 열대 바다의 다이빙을 가면 가이드에게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그렇게 굳이 굳이 누디를 찾아준다. 빨간 누디, 파란 누디, 희한한 누디.. 일본인 다이버들이 누디를 찾아서 사진 찍는걸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누디의 맛을 본 사람도 있다. 매우 맵다고 한다.(이걸 왜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피카츄도 누디를 본딴거 아니냐는 말을 한다(믿거나 말거나, 작화가는 피카츄의 모델은 생쥐라고 했다. 전기생쥐라니. 하지만 모양도 색도 너무 비슷하다.)
최근에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 '야무진 고양이는 오늘도 우울'에 나오는 아이돌도 누디를 본떠서 만들었다.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누디 모양으로 아이돌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이건 작가의 취향인 걸까? 세일러문에서도 세일러 마스, 세일러 머큐리, 세일러 주피터 이렇게 수금지화목토천해명으로 가다가 시즌 4에서 갤럭시아가 나오고 은하계의 모든 별들이 세일러 전사로 변신할 수 있게 된다. 누디도 뭐 수백 종류는 되니 이런 식으로 하면 누디 모양의 아이돌이 졸업하고 입학하고 엄청나게 많이 나올 수 있겠다 싶었다.
어떤 바다를 들어가도 다이빙은 항상 좋다. 대물이 나오는 바다는 큰 생물들이 떠다니는 환상의 나라에 온 것 같아서 좋고, 잔잔하고 마크로들이 많은 바다는 가만히 머물러서 작은 개체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기에 좋다. 누디를 보고 있으면 삶이 별 건가 싶다. 내 앞에 있는 것들을 잘 먹고 잘 소화해서 나의 무기로 삼아 살면 되는 거지. 커다랄 필요도 없고 목표를 갖고 살 필요도 없다. 주어진 삶을 그렇게 슬금슬금 살아가면 되는 거다.
심심할 땐 '한국의 갯민숭달팽이'책을 펼친다. 모양을 보고 누디의 이름을 불러본다. 별 의미 없는 일이다. 다시 까먹게 되니까. 그냥 재밌다. 저렇게 이렇게 생긴 수백 가지 모양의 아이들이 그저 예쁘다. 다음에 돈을 모으면 외국의 누디백과를 살 거다. 10만 원이라 침흘리며 보고 있지만 언젠가 사서 봐야지.
갑자기 밤양갱 노래가 생각난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자그만 갯민숭 갯민숭이야
작디작고 작디작고 자그만 갯민숭 갯민숭♪
<출처>
한국의 갯민숭달팽이 - Korean Nuibranch - 흰갯민숭달팽이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박수현 기자의 Sea 애니멀 <8> 히드라 : 국제신문 (kookje.co.kr)
https://m.blog.naver.com/scubacollege/221678215721
생물다양성 E-BOOK > 목록 - 국립생물자원관 (nibr.go.kr) ->한국의 갯민숭달팽이 다운로드
거의 모든 것의 바다(박수현)
사진제공 : 오정근, 곰스쿠버, 용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