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이 좋은가요? 냉면이 좋은가요?
소개팅 30분 전,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했다. 소개팅을 할 땐 늘 먼저 가서 주변을 탐색한다. 밥을 먹고 나서 걸을 곳이나 카페를 찾기 위해서다. 오늘의 소개팅 장소는 테이블이 다섯 개 정도인 작은 식당이다. 와인 안주가 주 종목이고 약간 어둡고 빈티지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든다.
'예약하셨나요? 오늘 만석입니다.'
만석? 여기는 서울도 아닌데 만석이라고? 예약할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지역이라고 약속장소를 정하겠다고 했는데 내가 굳이 우겨서 여기에서 만나자고 했다. 큰일이다. 예약도 안 해놓고 식당 잡겠다고 큰소리친 허풍쟁이가 됐다. 처음부터 이렇게 꼬이다니.
'여보세요'
'저 오늘 뵙기로 한 사람입니다. 레스토랑이 만석이라네요'
'네? 거기 예약 안 하셨어요?'
'네 안 해도 되는 줄 알고..'
'지금 택시 타고 가는 길인데 픽업하러 갈게요. 제가 아는 다른 곳으로 가요.'
'아닙니다. 장소 말씀해 주시면 거기로 갈게요'
택시로 픽업을 오다니, 안된다. 물에 빠진 생쥐 구해지듯 만날 순 없다. 그녀가 말한 곳은 여기서 800m 거리다. 일단 뛰어가야겠다.
결국 늦었다.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져 있다. 인사를 대충 하고 화장실에서 머리를 손질하니 생각보다 더 엉망이다. 어쩔 수 없다. 그녀가 기다리니 일단 테이블로 갔다.
'안녕하세요 머리가 이상하죠.'
'안녕하세요 괜찮으신데요. 추우셨죠? 그래서 제가 모시러 간다고 했는데'
'아닙니다. 잘 찾아왔습니다.'
식사를 시키고 와인도 곁들이기로 했다.
그녀가 말했다.
'와인 한 잔 드시고 속을 따뜻하게 하세요.'
'네 밖에 바람 너무 많이 불더라고요.'
빈 속에 와인을 마시니 취기가 오르며 긴장이 풀렸다.
…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마지막 연애는 언제 하셨어요?'
소개팅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질문이다. 한참 말하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지나있다. 순식간에 나의 지난 모든 연애사가 그녀에게 흘러 들어 갔다. 이게 무슨 일인지? 나의 전 여친과 전전 여친과 사랑과 전쟁, 이별과 극복, 한숨과 분노와 체념의 역사를 단숨에 말해버리다니. 미쳤나 보다.
망했다.
난 왜 여기서 옛날 연애 얘기를 다 해버린 건가.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2차 가시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얘기였어요.'
나오기 전에 술집을 검색했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냥 나와버렸다. 10분째 길바닥에 서서 핸드폰만 하고 있다.
'검색 그만하시구요. 전 아무데나 상관없어요. 그냥 저기로 들어가시죠. 다리 아픈데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구두 신으셨네요. 들어가시죠.'
아 미처 배려를 못했다. 추운 이 겨울날, 코트 입고 구두 신은 여자를 가만히 길에 세워두다니. 괜찮은 술집을 찾았더니 벌써 자리가 꽉 차서 다시 나와버렸다. 아까 일을 만회하려고 좋은 술집을 찾아갈 생각에 그녀가 떨고 있는 걸 보지 못했다.
'밴드 하셨구나, 저도 연극했어요. 둘 다 무대에 서 본 경험이 있네요.'
'네 연극이라니 정말 멋지세요. 제가 본 연극이라곤 라이어밖에 없어요.'
'라이어 너무 재밌죠. 저도 두 번 봤어요.'
그녀는 배우로, 나는 기타리스트로 대학교 동아리에서 공연을 만든 얘기를 하며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어떤 남자 스타일이 좋으신가요?'
'말 잘 통하는 사람이요, 그리고 센스가 있어야 해요. 사람이 센스가 없으면 죽어야 해요. 알잘딱깔센 아시죠'
'알잘딱깔센이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거네요'
순간 움찔했다. 나보고 말하는 건가? 오늘 내내 센스 없음을 돌려 까는 말 같다. 목이 타서 하이볼을 한 모금 마신다. 이 놈의 술집은 자리가 많은 이유가 있었다. 하이볼이 너무나 밍밍하다. 하이볼이 아니라 아이스볼이다. 하이볼에 위스키를 스포이드로 두어 방울 떨어뜨린 것 같다. 그녀와 내가 각자 네 잔째 마시고 있음에도 둘 다 취하지 않고 있다. 한 잔에 만원인데. 이 맛없는 술만 팔만 원어치 마시다니. 이 술집도 정말 센스 없는 술집이다.
'계산은 제가 할게요'
그녀가 일어나서 총알 같이 계산대로 갔다. 밥값보다 술값이 두배로 나와서 내가 계산하려 했건만. 단호하고 완강한 표정으로 나가버려서 기회를 놓쳤다. 내가 사야 다음 약속까지 기약할 수 있는데.
이렇게 만남이 끝인가 보다.
예약 안 한 레스토랑부터가 잘못이다. 망했다 망했어. 처음부터 안 풀리더라니.
택시를 기다리던 그녀가 말했다.
'내일 해장 같이 하시죠. 점심에 시간 있다고 하셨죠? '
'네'
'국밥 맛집도 있고 냉면 맛집도 있어요. 내일 일어나서 컨디션 보고 정하죠. 오늘 술값 넘 많이 나와서 저 거지됐으니까 내일 밥은 님이 사세요.'
'아 네'
!!?!
이게 뭐지? 정신없게 대답을 하다 보니 그녀가 내일 점심 약속을 순식간에 정했다.
그리고
이건 내 생에 처음으로 에프터를 받은,
내 마지막 소개팅이 되었다.